이미 너무 유명한 소설,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를 읽게되었다.

1. 읽게된 동기

이년 전이던가, 상위랭킹에 갑자기 등장한 책이 있었다. 제목이 특이했고, 책커버 일러스트가 제목과 대비된다고 생각해서 유독 기억나는 책이었다. 제목이 드는 괴기한 느낌과는 달리, 일러스트는 벗꽃나무 아래 호수, 를 가로지른 다리, 위에 소년과 소녀가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다름아닌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이다. 계속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었지만, 읽지는 않고 있었다. 이후, 영화화 되고, 애니화도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뜻언뜻 들리는 스포로 인해, 식인종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책 읽을 생각은 안하고 있었다.

어느날 도서관에 갔다. 사실 도서관은 항상 간다. 정확히 말하면 읽지못한 책들을 반납하러 갔다. 적어도 나는 책이 잘 안잡히는 떄가 있는데, 그때가 요즘이다. 패기로 몇권을 들고 집에갔지만, 페이지도 안넘어가고 크게 흥미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냥 반납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도서관을 방문했다. 책을 반납하고 습관처럼 얇은 책을 하나 빌렸다. 스탕달의 ‘적과흑’. 들어본적 있지만 본적은 없는 고전은 항상 실패가 없었기에. 그리고 집에 가려는데, 반납함에 누가 올려놓은 책이 있었다.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 였다. 아무책도 손에 잡히지 않을 떄에, 나름 라이트노벨이라고 생각한 책이니 가볍게 볼까.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이 보았나 궁금했기도 했고. 그래서 읽게 되었다.

2. 내용

한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이다. 소년은 소설을 좋아하고, 다른 이들과 별로 접촉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항상 풀잎배에 비유한(했)다. 약한, 침몰가능성이 큰, 내 의지가 아닌 그저 흐름대로 떠밀려만 다니는 풀잎배 말이다.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클래스메이트인 한 소녀의 비밀에 대해 알게된다. 그 소녀에 췌장에 대해서다. 소녀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미래에 가정을 꾸린다든가, 대학교에 입학한다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꿈은 꾸지 못할정도의 시간이었다. 가족을 제외하고는 비밀로 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렇게, 소년은 소녀의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다. 아니, 서로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둘의 관계는 평행선 같았지만, 점차 가까와진다. 서로를 아니, 자신을 더 잘 알게되었다. 둘의 만남은 우연도, 운명도 아니었다. 선택이었다. 어쩔수없이 흘러갔다고 생각한 그 순간들조차 자신이 선택한 일이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둘 사이의 끝은 어디일까. 언제까지일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그 기쁨을 쌓아가려는 찰나에 소녀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남은 소년은 소녀의 유언(공병문고)을 읽게되고, 남은자의 삶을 살게 된다.

3. 포인트

(1)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의 의미

소설의 처음에, 그리고 중요한 부분에 이 문장이 나온다.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 소년이 소녀에게 보낸 메시지이고, 소녀가 유언으로 고백한 문장이다. 소녀의 아픔을 대신 가져가고 싶다는 소년의 마음이다. 소녀의 활달함과 사랑을 동경하고 그를 닮아가고 싶다는 소년의 고백이다. 아프지 않고 너와 함께 하고싶다는 소녀의 고백이다. 더 말할 수 있다. 어떤 마음으로 소년과 소녀는 저 문장을 말했을지. 멋진 문장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어본 사람에게는 말이다. 책 내용 부분부분들이 생각나면서 서로가 어떤 마음이었을지를, 그 담을 수 없는 마음이 저 한문장으로 표현되었다.

(2) 자신의 발견

소년은 자신이 풀잎배라 했다. 외톨이이고, 그런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소녀를 만나고서 변화된다. 아니, 알게된다. 자신의 다른 면을 말이다. 소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에게 없지만, 되고자 하는 부분이 있다. 상대방에게 그 면을 보았고, 상대방을 통해 자신을 더 알 수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해준 사람이다. 소설 초반에 소년과 소녀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소녀의 이름은 중간부터 나오지만, 소년의 이름은 소설의 마지막에야 밝혀진다. 적어도 그제서야 독자에게 공개한다. 이름은 그 사람을 나타낼까, 누군가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성급히 이름을 먼저 물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독자는 소년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고나서야, 그 이름을 알게된다. 그때, 이름은 더 큰 의미를 갖게 된다. 소년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고와 관념을 자신의 이름 안에 가둬놓고 있었지는 않을까. 적어도 소녀는 소년을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제서야 소년도 자신을 알게 되었다.

(3) 죽음의 시기

작가는 책에 반전 혹은 반칙을 썼다. 바이얼레이션!이라고 소리치며 호루라기라도 불고싶은 심정이다. 시한부 병에 걸린 소녀, 그 소녀를 죽음으로 이끈것은 병이 아니라 불운의 사고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녀는 병으로 인해 죽음을 준비할 수 있었다. 만약, 소녀에게 병이 없었다면 소중한 만남도 죽음에 대한 준비도 하지 못했겠지. 아픈 췌장은 오히려 신의 선물이지 않았을까.

4. 나에게 주는 의미

우리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다. 혈전으로 인한 뇌경색, 으로 인한 뇌졸중이 병명이었다. 죽음을 준비하실 새도 없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 이후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힘듦의 이유 중 하나는 아버지가 죽음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고싶던 말을 못했다. 듣고싶던 말을 듣지 못했다. 죽음이 마냥 기쁠수는 없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그것을 가족들 혹은 가까운 이들에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일 것이다. 가까운 부부의 시어머님이 말기 암으로 고통스러워하시지만, 동시에 가족과 함께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한다. 물론, 당사자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이라 생각한다. 허나, 내게 선택지를 준다면 그 선택에 망설임은 없을 것 같다.

아버지의 병(?)은 유전이었다. 그 유전을 내가 받았다. 얼마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아버지와 같은 병... 이라기 보다는 죽음을 유발할 수 있는 수치가 내게 발견되었다. 누군가에게 수치가 안좋게 나왔다니까, 그러면 증상이 어떻게 되요? 라고 물어보길래 그냥 죽는거지요 뭐. 라고 대답했다. 맞다. 증상이 나타나면 그것이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지금 내가 그렇다. 물론, 그를 대비해 약을 먹고있다. 의학이 획기적으로 발달하지 않는 이상 평생 먹어야 한다. 만약, 약을 먹지 않는다면 나는 적어도 아버지가 살아간 날들만큼만 이 세상에 있어야 했을지 모른다. 쉽게 말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고 그냥 살았을 것이다. 뭐야, 약 먹으면 되는거잖아? 시한부도 아니고? 라고 이야기할지 모른다. 맞다. 아마도 나는 아버지보다 오래 살 것이다. 약도 먹고 있고, 검사도 꾸준히 받을테고, 검사 결과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각오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약을 매일 아침 먹는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하다. 이 약을 먹지 않으면 죽을수도 있는거구나. 쫀득하다고 할까. 죽음과 만나지는 않았어도,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다. 이 글을 누가 읽을까. 가족과 검사결과를 물은 불운한(?) 몇 사람만이 이 이야기를 알고있다. 어디다 말하기도 그렇다. 당장 죽는것도 아니고, 한달 후에 죽는것도 아니고, 응급실에 실려갈 일도 없고,(있기야 하겠지만, 실려가면 다음은 없을테니) 팔이나 눈이 하나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혼자서 조용히, 하기 싫어도 죽음과 조금씩 마주하게 된다.

주인공 소녀와 내가 같지는 않다. 그런데,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남은 삶의 최대치를 알아버렸을 때, 그리고 그 길이가 남들과 같지 않음을 알았을 때, 소녀의 준비에 대해 말이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묵묵히 죽음을 준비해가는 외로움, 그 가운데에 소녀의 삶에 불쑥 들어온 한 소년이 어찌 반갑지 않았을까. 물론 난 대학도 졸업했고 결혼도 했다. 층위가 다른 책임과 상황이 내게 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답은 없을테고 결론을 낼수도 없을테지. 허나, 내가 맞이한 상황을 조금 더 이해하고 생각할 수는 있겠다.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글을 맺고 싶다. 죽음을 맞이할 소녀의 마음으로, 남은자의 삶을 사는 소년의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겠다. 지금에 기뻐하고, 미래를 기대해야겠다. 물론, 이 자리를 일어선 후에 나는 다시 현실의 암울함으로 들어갈테지만 조금씩이라도 빛으로 나가야지. 이 소설을 손에 잡은것처럼.



어린시절,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을까. 처음으로 비디오 테잎을 손에 쥐어보았다. 생일선물이었나 싶은데, 그 비디오테잎이 바로 ‘라이온킹’이었다. 라이온킹을 만든 회사가 ‘디즈니’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도, 라이온킹의 OST를 부른 사람이 ‘엘튼존’이었다는 사실도 한참이나 나이가 든 후에야 알았다. 한국말 더빙이었다. 외국어 자막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지금 들으면 오글거릴 수 있겠지만, 각 캐릭터 성우들의 목소리와 한국어로 번역된 각 노래의 가삿말을 아직 흥얼거릴 수 있을만큼 꽤나 생생히 기억한다. 몇번이나 보았을까. 라이온킹의 처음과 마지막에 흘러나오는 ‘Circle of life’라는 곡이 참 좋았다. 삶의 순환이라는 노랫말이 줄거리와 기가막히게 연결된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주인공 심바, 소꿉친구이자 배우(사)자 날라, 아버지 무파사, 삼촌 스카, 티몬과 품바, 사라비 각 케릭터의 대사와 행동 눈빛까지도 참 기억이 난다. 심지어 애니메이션이었음에도. 물론, 각각이 갖는 의미들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비디오 플레이어도, 라이온킹 테잎도 이제는 어디갔는지 찾을 수 없지만, 그때 받은 라이온킹은 아직도 선물로 고이 간직하고 있다.

2015년, 결혼을 앞두고 신혼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혼여행지에 영국이 포함되어 있었고, 뮤지컬을 한편 볼 계획이었다. 소심한 나는 비교적 저렴한 오페라의 유령 정도를 볼 생각이었지만, 대범한 아내는 대체 무슨 소리냐며 라이온킹 정도는 봐줘야하지 않냐는 이야기를 했다. 예약은 나의 몫이었는데, 예약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 계획한 것보다 좋은 자리(즉, 비싼 자리)를 예약하고 만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파혼의 위기를 맞았지만 사랑으로 잘 넘겨내었다. 돌이키면, 그 실수는 참 행운이었다. 더 좋은 자리에서 라이온킹을 볼 수 있었으니. 약간의 스포를 하자면, 뮤지컬 시작에 ‘Circle of life’와 함께 모든 동물들이 나와 심바의 탄생을 축하한다. 여기저기서 동물들이 나오고 심바가 천천히 들려 올라오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눈물은 줄줄 나오는데,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눈을 부릅뜨고 복도를 지나는 동물들을 쳐다보았다. 뒷자리에 앉은 영국 할머니도 울고있었다.

그 감동을 안고, 올해 한국에서 열리는 투어표를 감사하게도 구할 수 있었다. 정말 어린아이같은 마음으로 두근두근 신나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번에도 ‘CIrcle of life’가 울려퍼지는 오프닝에 눈물이 줄줄 났다. 저 들려올려진 심바는 자기가 어떤 삶을 살아내야 할지 알고 있을까.(사실 인형이었고, 동일한 인형은 4만원에 판매되고 있었다.) 나는 이미 결말을 알지만, 그 과정을 한번더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아주 단순 비교를 하면, 영국에서 본 공연이 더 우수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영국에서 본 배우들이 그대로 캐스팅되었고, 옆에서 북치는 아저씨들도, 마치 사람같은 치타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두가지 큰 차이가 있었다. 음향과 동물의 숫자였다.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내 귀 문제인가, 혹은 자막이 몰입을 방해하나 싶었는데 대사치는 소리가 뭉툭했다. 소리는 느낌이라 치더라도, 오프닝에 등장하는 동물의 수는 눈에 띄게 적었다. 무대에서 오는 차이지 않을까. 영국의 극장을 생각해보면, 로비가 매우 좁았는데 시골에 있는 버스터미널 정도로 기억한다. 바글바글했다. 반면에, 무대는 넓고, 복도 경사는 완만했다. 배우들이 연기를 펼치기에 좋은 무대, 동물들이 등장하기 좋은 복도였다. 물론 전용 극장이니 비교할 바는 아니다. 더 할말은 많으나 여기까지.

좋은 공연이었다. 소리가 더 뭉툭하다 하더라도, 동물의 숫자가 줄어든다 하더라도. 그 오프닝을 보면 나는 다시 눈물을 흘릴것 같다.

 언덕 위에 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도시를 등지고 시선은 안개 낀 바다를 향합니다. 그 안개를 헤치고, 한 배가 들어옵니다. 배가 안개를 열듯, 그를 보는 남자의 마음도 열립니다. 그 안에 잠자던 기쁨이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펼칩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알무스타파’ 신의 선택을 입은 자이자 신의 사랑을 받은 자. 그는 예언자입니다. 신의 사랑을 받아 모든 것을 알지만, 함부로 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아마도 이런 사람이 있다면, 예언자라는 말은 참 잘 어울립니다.


 배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입니다. 배가 왔으니 떠나야 합니다. 그가 있는 곳은 오팔리즈, 이곳에서 열두해를 있었습니다. 이곳에 있던 시간만큼 고향으로 가는 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언덕을 내려와 도시로 향하자 슬픔이 밀려옵니다. 기쁜 것은 고향으로 향하는 것이며 슬픈 것은 있던 곳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곳을 어찌 떠날 수 있을까요. 이 도시 거리마다 자신의 것을 쪼갠 영혼의 조각들을 뿌려놓았고, 간절한 바람이 퍼져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떠나는 것이 아픈 이유는 사랑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떠나야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남는다는 것은 가질 수 없는 것을 탐내는 것이며, 틀안에 자신을 가두어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도시로 퍼집니다. 집에서 집으로, 들판에서 들판으로 외침이 들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기에 말입니다. 그 외침은 필사적이었을수도 있겠습니다. 예언자는 중얼거립니다. 이별의 날이 만남의 날이 되어야 하는가. 이별은 만남으로 완성됩니다. 이별 또한, 관계의 한 형태이기에.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이 만약 수확의 날이라면, 내가 뿌린것은 무엇이었을까. 예언자는 결심합니다. 나의 등불을 높이 들어야 할 때이구나. 하지만, 내가 든 등불은 공허하고 또 어둡다. 등은 나의 것일지언정, 그 안에 불타는 것은 밤의 수호자가 기름을 채우고 불을 켜야 한다. 등을 든 나의 손이 공허하지 않도록.


 예언자는 도시 안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모여 있었습니다. 마치, 신약성서에서 오병이어 사건이라 기록되는 그때처럼 말입니다. 예수가 그 자리에 도달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갈망함으로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목자 잃은 양같으니 가엽다고 하였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사랑이라고 부를수 있음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의 영과 육은 채움받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목소리를 냅니다. 사랑과 아쉬움의 언어였습니다. 목소리는 다르지만 마음은 같았겠지요. 그때 성스러운 사원에서 한 선지자가 걸어 나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알미트라입니다.

 알미트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말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과 소망은 당신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요. 당신이 기억하는 나라와 고향에 있는 소망이 얼마나 간절하며 그리운 것인지를요. 허나, 마지막 부탁이 있습니다. 진리를 전해 주십시오. 우리는 그것을 또 전할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그 아이들은 다시 다음 세대에게 말입니다. 그대는 우리를 알지 않습니까. 우리의 눈물을 보았고, 우리의 웃음을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삶을 또 죽음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 사이에서 당신이 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알기를 원합니다.


 예언자는 말합니다. 오팔리즈 시민들이여, 내가 무슨 말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지금 그대들의 영혼 속에 살아 움직이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


 그렇게, 이별을 위한 만남이 시작됩니다.

선지자 알미트라는 사랑을 묻습니다.

알미트라는 다시 결혼을 묻습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이 아이들에 대해 묻습니다.

부유한 자가 주는 것을 묻습니다.

여관을 꾸리는 노인이 먹고 마심을 묻습니다.

농사꾼이 일에 대하여 묻습니다.

여인이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묻습니다.

석공이 집에 대하여 묻습니다.

베 짜는 직공이 옷에 대하여 묻습니다.

상인이 사고파는 일에 대하여 묻습니다.

도시의 재판관이 죄와 벌에 대하여 묻습니다.

법률가가 우리네 법에 대하여 묻습니다.

웅변가가 자유에 대하여 묻습니다.

여사제가 다시 이성과 열정에 대하여 묻습니다.

여인이 고통에 대하여 묻습니다.

남자가 자아를 아는 것에 대해 묻습니다.

교사가 가르치는 것에 대해 묻습니다.

젊은이가 우정에 대하여 묻습니다.

학자가 말하는 것에 대해 묻습니다.

천문학자가 시간에 대하여 묻습니다.

도시 원로들 가운데 한명이 선과 악에 대하여 묻습니다.

여사제가 기도에 대하여 묻습니다.

해마다 한 번씩 도시를 찾는 은자가 나와 즐거움에 대하여 묻습니다.

시인이 아름다움에 대해 묻습니다.

나이든 사제가 종교에 대해 묻습니다.

알미트라가 죽음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저녁이 되고, 이별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선지자 알미트라가 말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지금껏 말씀하신 그대의 영혼에 축복이 있기를. 이에 예언자는 답합니다. 내가 과연 말하는 자였을까. 나 또한 여러분과 함께 듣는 자가 아니었나. 예언자는 질문하는 자들이 이미 생각으로 아는 것을 말로 옮기기만 했을지 모릅니다.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배와 선장은 말이 없었습니다. 돛은 팔락이고 닻은 올라올 준비를 마쳤습니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모든 것들이 예언자가 침묵에 이르기를 각자의 묵묵함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말합니다. 작별의 날조차 지나갔다고 말입니다. 정말 떠나야할 때가 왔습니다.


 배가 동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울음은 마치 한 가슴에서 나오는듯 했습니다. 울음이 그치고, 사람들이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을 때까지 한 사람이 남아있었습니다. 알미트라였습니다. 알미트라는 홀로 방파제 위에서 그가 남긴 말 중, 그저 한 마디를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잠시만 있으면 바람결에 한숨을 돌리다가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을 것입니다.





 고통이란 깨달음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이 부서지는 것과 같으며, 즐거움은 자유의 노래이나 자유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어찌 다른 말로 풀어놓을 수 있을까요. 책을 한번 읽고나서 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다시 한번 읽는것 뿐이었습니다.


 하루 남짓한 이 이야기는, 마치 예언자의 일생을 본듯합니다. 도착하여 사명을 다하고 떠나는 이야기. 태어나고 살며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사람들이 한 질문과, 그 사람들의 관계가 묘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에 대해, 교사가 가르치는 것에 대해, 법률가가 법에 대해 묻습니다. 가장 잘 답할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묻습니다. 아마도, 질문을 할 수 있을때까지는 언제까지라도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질것 같습니다. 답은 각자 안에 있었겠지요. 다만 흩어져 모호했을 뿐, 예언자가 언어의 틀로 잠시 형체를 갖춰놓았지만 시간이 다시 형체를 흩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질문을 해야할 때가 오겠지요.다르지만 틀리지 않은 답을 다시 얻을 수 있을것만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문득 썼습니다. 하루의 시작에 예언자의 마지막을 다시 보았습니다. 허나 예언자가 그랬듯 이 마지막으로 시작할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답보다는 질문을 찾아야겠습니다. 묻고싶은 것을 찾았을 때, 이미 답은 제 안에 있겠지요. 물론, 그 답을 찾아가는데에는 적지 않는 시간이 들겠지만. 혹시 압니까. 잠시만 있으면 바람결에 한숨을 돌리다가 또 다른 여인이 그 답을 낳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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