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너무 유명한 소설,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를 읽게되었다.

1. 읽게된 동기

이년 전이던가, 상위랭킹에 갑자기 등장한 책이 있었다. 제목이 특이했고, 책커버 일러스트가 제목과 대비된다고 생각해서 유독 기억나는 책이었다. 제목이 드는 괴기한 느낌과는 달리, 일러스트는 벗꽃나무 아래 호수, 를 가로지른 다리, 위에 소년과 소녀가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다름아닌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이다. 계속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었지만, 읽지는 않고 있었다. 이후, 영화화 되고, 애니화도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뜻언뜻 들리는 스포로 인해, 식인종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책 읽을 생각은 안하고 있었다.

어느날 도서관에 갔다. 사실 도서관은 항상 간다. 정확히 말하면 읽지못한 책들을 반납하러 갔다. 적어도 나는 책이 잘 안잡히는 떄가 있는데, 그때가 요즘이다. 패기로 몇권을 들고 집에갔지만, 페이지도 안넘어가고 크게 흥미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냥 반납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도서관을 방문했다. 책을 반납하고 습관처럼 얇은 책을 하나 빌렸다. 스탕달의 ‘적과흑’. 들어본적 있지만 본적은 없는 고전은 항상 실패가 없었기에. 그리고 집에 가려는데, 반납함에 누가 올려놓은 책이 있었다.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 였다. 아무책도 손에 잡히지 않을 떄에, 나름 라이트노벨이라고 생각한 책이니 가볍게 볼까.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이 보았나 궁금했기도 했고. 그래서 읽게 되었다.

2. 내용

한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이다. 소년은 소설을 좋아하고, 다른 이들과 별로 접촉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항상 풀잎배에 비유한(했)다. 약한, 침몰가능성이 큰, 내 의지가 아닌 그저 흐름대로 떠밀려만 다니는 풀잎배 말이다.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클래스메이트인 한 소녀의 비밀에 대해 알게된다. 그 소녀에 췌장에 대해서다. 소녀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미래에 가정을 꾸린다든가, 대학교에 입학한다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꿈은 꾸지 못할정도의 시간이었다. 가족을 제외하고는 비밀로 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렇게, 소년은 소녀의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다. 아니, 서로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둘의 관계는 평행선 같았지만, 점차 가까와진다. 서로를 아니, 자신을 더 잘 알게되었다. 둘의 만남은 우연도, 운명도 아니었다. 선택이었다. 어쩔수없이 흘러갔다고 생각한 그 순간들조차 자신이 선택한 일이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둘 사이의 끝은 어디일까. 언제까지일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그 기쁨을 쌓아가려는 찰나에 소녀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남은 소년은 소녀의 유언(공병문고)을 읽게되고, 남은자의 삶을 살게 된다.

3. 포인트

(1)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의 의미

소설의 처음에, 그리고 중요한 부분에 이 문장이 나온다.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 소년이 소녀에게 보낸 메시지이고, 소녀가 유언으로 고백한 문장이다. 소녀의 아픔을 대신 가져가고 싶다는 소년의 마음이다. 소녀의 활달함과 사랑을 동경하고 그를 닮아가고 싶다는 소년의 고백이다. 아프지 않고 너와 함께 하고싶다는 소녀의 고백이다. 더 말할 수 있다. 어떤 마음으로 소년과 소녀는 저 문장을 말했을지. 멋진 문장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어본 사람에게는 말이다. 책 내용 부분부분들이 생각나면서 서로가 어떤 마음이었을지를, 그 담을 수 없는 마음이 저 한문장으로 표현되었다.

(2) 자신의 발견

소년은 자신이 풀잎배라 했다. 외톨이이고, 그런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소녀를 만나고서 변화된다. 아니, 알게된다. 자신의 다른 면을 말이다. 소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에게 없지만, 되고자 하는 부분이 있다. 상대방에게 그 면을 보았고, 상대방을 통해 자신을 더 알 수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해준 사람이다. 소설 초반에 소년과 소녀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소녀의 이름은 중간부터 나오지만, 소년의 이름은 소설의 마지막에야 밝혀진다. 적어도 그제서야 독자에게 공개한다. 이름은 그 사람을 나타낼까, 누군가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성급히 이름을 먼저 물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독자는 소년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고나서야, 그 이름을 알게된다. 그때, 이름은 더 큰 의미를 갖게 된다. 소년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고와 관념을 자신의 이름 안에 가둬놓고 있었지는 않을까. 적어도 소녀는 소년을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제서야 소년도 자신을 알게 되었다.

(3) 죽음의 시기

작가는 책에 반전 혹은 반칙을 썼다. 바이얼레이션!이라고 소리치며 호루라기라도 불고싶은 심정이다. 시한부 병에 걸린 소녀, 그 소녀를 죽음으로 이끈것은 병이 아니라 불운의 사고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녀는 병으로 인해 죽음을 준비할 수 있었다. 만약, 소녀에게 병이 없었다면 소중한 만남도 죽음에 대한 준비도 하지 못했겠지. 아픈 췌장은 오히려 신의 선물이지 않았을까.

4. 나에게 주는 의미

우리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다. 혈전으로 인한 뇌경색, 으로 인한 뇌졸중이 병명이었다. 죽음을 준비하실 새도 없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 이후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힘듦의 이유 중 하나는 아버지가 죽음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고싶던 말을 못했다. 듣고싶던 말을 듣지 못했다. 죽음이 마냥 기쁠수는 없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그것을 가족들 혹은 가까운 이들에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일 것이다. 가까운 부부의 시어머님이 말기 암으로 고통스러워하시지만, 동시에 가족과 함께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한다. 물론, 당사자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이라 생각한다. 허나, 내게 선택지를 준다면 그 선택에 망설임은 없을 것 같다.

아버지의 병(?)은 유전이었다. 그 유전을 내가 받았다. 얼마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아버지와 같은 병... 이라기 보다는 죽음을 유발할 수 있는 수치가 내게 발견되었다. 누군가에게 수치가 안좋게 나왔다니까, 그러면 증상이 어떻게 되요? 라고 물어보길래 그냥 죽는거지요 뭐. 라고 대답했다. 맞다. 증상이 나타나면 그것이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지금 내가 그렇다. 물론, 그를 대비해 약을 먹고있다. 의학이 획기적으로 발달하지 않는 이상 평생 먹어야 한다. 만약, 약을 먹지 않는다면 나는 적어도 아버지가 살아간 날들만큼만 이 세상에 있어야 했을지 모른다. 쉽게 말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고 그냥 살았을 것이다. 뭐야, 약 먹으면 되는거잖아? 시한부도 아니고? 라고 이야기할지 모른다. 맞다. 아마도 나는 아버지보다 오래 살 것이다. 약도 먹고 있고, 검사도 꾸준히 받을테고, 검사 결과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각오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약을 매일 아침 먹는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하다. 이 약을 먹지 않으면 죽을수도 있는거구나. 쫀득하다고 할까. 죽음과 만나지는 않았어도,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다. 이 글을 누가 읽을까. 가족과 검사결과를 물은 불운한(?) 몇 사람만이 이 이야기를 알고있다. 어디다 말하기도 그렇다. 당장 죽는것도 아니고, 한달 후에 죽는것도 아니고, 응급실에 실려갈 일도 없고,(있기야 하겠지만, 실려가면 다음은 없을테니) 팔이나 눈이 하나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혼자서 조용히, 하기 싫어도 죽음과 조금씩 마주하게 된다.

주인공 소녀와 내가 같지는 않다. 그런데,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남은 삶의 최대치를 알아버렸을 때, 그리고 그 길이가 남들과 같지 않음을 알았을 때, 소녀의 준비에 대해 말이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묵묵히 죽음을 준비해가는 외로움, 그 가운데에 소녀의 삶에 불쑥 들어온 한 소년이 어찌 반갑지 않았을까. 물론 난 대학도 졸업했고 결혼도 했다. 층위가 다른 책임과 상황이 내게 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답은 없을테고 결론을 낼수도 없을테지. 허나, 내가 맞이한 상황을 조금 더 이해하고 생각할 수는 있겠다.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글을 맺고 싶다. 죽음을 맞이할 소녀의 마음으로, 남은자의 삶을 사는 소년의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겠다. 지금에 기뻐하고, 미래를 기대해야겠다. 물론, 이 자리를 일어선 후에 나는 다시 현실의 암울함으로 들어갈테지만 조금씩이라도 빛으로 나가야지. 이 소설을 손에 잡은것처럼.



어린시절,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을까. 처음으로 비디오 테잎을 손에 쥐어보았다. 생일선물이었나 싶은데, 그 비디오테잎이 바로 ‘라이온킹’이었다. 라이온킹을 만든 회사가 ‘디즈니’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도, 라이온킹의 OST를 부른 사람이 ‘엘튼존’이었다는 사실도 한참이나 나이가 든 후에야 알았다. 한국말 더빙이었다. 외국어 자막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지금 들으면 오글거릴 수 있겠지만, 각 캐릭터 성우들의 목소리와 한국어로 번역된 각 노래의 가삿말을 아직 흥얼거릴 수 있을만큼 꽤나 생생히 기억한다. 몇번이나 보았을까. 라이온킹의 처음과 마지막에 흘러나오는 ‘Circle of life’라는 곡이 참 좋았다. 삶의 순환이라는 노랫말이 줄거리와 기가막히게 연결된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주인공 심바, 소꿉친구이자 배우(사)자 날라, 아버지 무파사, 삼촌 스카, 티몬과 품바, 사라비 각 케릭터의 대사와 행동 눈빛까지도 참 기억이 난다. 심지어 애니메이션이었음에도. 물론, 각각이 갖는 의미들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비디오 플레이어도, 라이온킹 테잎도 이제는 어디갔는지 찾을 수 없지만, 그때 받은 라이온킹은 아직도 선물로 고이 간직하고 있다.

2015년, 결혼을 앞두고 신혼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혼여행지에 영국이 포함되어 있었고, 뮤지컬을 한편 볼 계획이었다. 소심한 나는 비교적 저렴한 오페라의 유령 정도를 볼 생각이었지만, 대범한 아내는 대체 무슨 소리냐며 라이온킹 정도는 봐줘야하지 않냐는 이야기를 했다. 예약은 나의 몫이었는데, 예약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 계획한 것보다 좋은 자리(즉, 비싼 자리)를 예약하고 만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파혼의 위기를 맞았지만 사랑으로 잘 넘겨내었다. 돌이키면, 그 실수는 참 행운이었다. 더 좋은 자리에서 라이온킹을 볼 수 있었으니. 약간의 스포를 하자면, 뮤지컬 시작에 ‘Circle of life’와 함께 모든 동물들이 나와 심바의 탄생을 축하한다. 여기저기서 동물들이 나오고 심바가 천천히 들려 올라오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눈물은 줄줄 나오는데,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눈을 부릅뜨고 복도를 지나는 동물들을 쳐다보았다. 뒷자리에 앉은 영국 할머니도 울고있었다.

그 감동을 안고, 올해 한국에서 열리는 투어표를 감사하게도 구할 수 있었다. 정말 어린아이같은 마음으로 두근두근 신나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번에도 ‘CIrcle of life’가 울려퍼지는 오프닝에 눈물이 줄줄 났다. 저 들려올려진 심바는 자기가 어떤 삶을 살아내야 할지 알고 있을까.(사실 인형이었고, 동일한 인형은 4만원에 판매되고 있었다.) 나는 이미 결말을 알지만, 그 과정을 한번더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아주 단순 비교를 하면, 영국에서 본 공연이 더 우수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영국에서 본 배우들이 그대로 캐스팅되었고, 옆에서 북치는 아저씨들도, 마치 사람같은 치타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두가지 큰 차이가 있었다. 음향과 동물의 숫자였다.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내 귀 문제인가, 혹은 자막이 몰입을 방해하나 싶었는데 대사치는 소리가 뭉툭했다. 소리는 느낌이라 치더라도, 오프닝에 등장하는 동물의 수는 눈에 띄게 적었다. 무대에서 오는 차이지 않을까. 영국의 극장을 생각해보면, 로비가 매우 좁았는데 시골에 있는 버스터미널 정도로 기억한다. 바글바글했다. 반면에, 무대는 넓고, 복도 경사는 완만했다. 배우들이 연기를 펼치기에 좋은 무대, 동물들이 등장하기 좋은 복도였다. 물론 전용 극장이니 비교할 바는 아니다. 더 할말은 많으나 여기까지.

좋은 공연이었다. 소리가 더 뭉툭하다 하더라도, 동물의 숫자가 줄어든다 하더라도. 그 오프닝을 보면 나는 다시 눈물을 흘릴것 같다.

 언덕 위에 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도시를 등지고 시선은 안개 낀 바다를 향합니다. 그 안개를 헤치고, 한 배가 들어옵니다. 배가 안개를 열듯, 그를 보는 남자의 마음도 열립니다. 그 안에 잠자던 기쁨이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펼칩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알무스타파’ 신의 선택을 입은 자이자 신의 사랑을 받은 자. 그는 예언자입니다. 신의 사랑을 받아 모든 것을 알지만, 함부로 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아마도 이런 사람이 있다면, 예언자라는 말은 참 잘 어울립니다.


 배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입니다. 배가 왔으니 떠나야 합니다. 그가 있는 곳은 오팔리즈, 이곳에서 열두해를 있었습니다. 이곳에 있던 시간만큼 고향으로 가는 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언덕을 내려와 도시로 향하자 슬픔이 밀려옵니다. 기쁜 것은 고향으로 향하는 것이며 슬픈 것은 있던 곳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곳을 어찌 떠날 수 있을까요. 이 도시 거리마다 자신의 것을 쪼갠 영혼의 조각들을 뿌려놓았고, 간절한 바람이 퍼져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떠나는 것이 아픈 이유는 사랑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떠나야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남는다는 것은 가질 수 없는 것을 탐내는 것이며, 틀안에 자신을 가두어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도시로 퍼집니다. 집에서 집으로, 들판에서 들판으로 외침이 들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기에 말입니다. 그 외침은 필사적이었을수도 있겠습니다. 예언자는 중얼거립니다. 이별의 날이 만남의 날이 되어야 하는가. 이별은 만남으로 완성됩니다. 이별 또한, 관계의 한 형태이기에.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이 만약 수확의 날이라면, 내가 뿌린것은 무엇이었을까. 예언자는 결심합니다. 나의 등불을 높이 들어야 할 때이구나. 하지만, 내가 든 등불은 공허하고 또 어둡다. 등은 나의 것일지언정, 그 안에 불타는 것은 밤의 수호자가 기름을 채우고 불을 켜야 한다. 등을 든 나의 손이 공허하지 않도록.


 예언자는 도시 안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모여 있었습니다. 마치, 신약성서에서 오병이어 사건이라 기록되는 그때처럼 말입니다. 예수가 그 자리에 도달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갈망함으로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목자 잃은 양같으니 가엽다고 하였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사랑이라고 부를수 있음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의 영과 육은 채움받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목소리를 냅니다. 사랑과 아쉬움의 언어였습니다. 목소리는 다르지만 마음은 같았겠지요. 그때 성스러운 사원에서 한 선지자가 걸어 나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알미트라입니다.

 알미트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말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과 소망은 당신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요. 당신이 기억하는 나라와 고향에 있는 소망이 얼마나 간절하며 그리운 것인지를요. 허나, 마지막 부탁이 있습니다. 진리를 전해 주십시오. 우리는 그것을 또 전할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그 아이들은 다시 다음 세대에게 말입니다. 그대는 우리를 알지 않습니까. 우리의 눈물을 보았고, 우리의 웃음을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삶을 또 죽음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 사이에서 당신이 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알기를 원합니다.


 예언자는 말합니다. 오팔리즈 시민들이여, 내가 무슨 말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지금 그대들의 영혼 속에 살아 움직이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


 그렇게, 이별을 위한 만남이 시작됩니다.

선지자 알미트라는 사랑을 묻습니다.

알미트라는 다시 결혼을 묻습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이 아이들에 대해 묻습니다.

부유한 자가 주는 것을 묻습니다.

여관을 꾸리는 노인이 먹고 마심을 묻습니다.

농사꾼이 일에 대하여 묻습니다.

여인이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묻습니다.

석공이 집에 대하여 묻습니다.

베 짜는 직공이 옷에 대하여 묻습니다.

상인이 사고파는 일에 대하여 묻습니다.

도시의 재판관이 죄와 벌에 대하여 묻습니다.

법률가가 우리네 법에 대하여 묻습니다.

웅변가가 자유에 대하여 묻습니다.

여사제가 다시 이성과 열정에 대하여 묻습니다.

여인이 고통에 대하여 묻습니다.

남자가 자아를 아는 것에 대해 묻습니다.

교사가 가르치는 것에 대해 묻습니다.

젊은이가 우정에 대하여 묻습니다.

학자가 말하는 것에 대해 묻습니다.

천문학자가 시간에 대하여 묻습니다.

도시 원로들 가운데 한명이 선과 악에 대하여 묻습니다.

여사제가 기도에 대하여 묻습니다.

해마다 한 번씩 도시를 찾는 은자가 나와 즐거움에 대하여 묻습니다.

시인이 아름다움에 대해 묻습니다.

나이든 사제가 종교에 대해 묻습니다.

알미트라가 죽음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저녁이 되고, 이별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선지자 알미트라가 말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지금껏 말씀하신 그대의 영혼에 축복이 있기를. 이에 예언자는 답합니다. 내가 과연 말하는 자였을까. 나 또한 여러분과 함께 듣는 자가 아니었나. 예언자는 질문하는 자들이 이미 생각으로 아는 것을 말로 옮기기만 했을지 모릅니다.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배와 선장은 말이 없었습니다. 돛은 팔락이고 닻은 올라올 준비를 마쳤습니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모든 것들이 예언자가 침묵에 이르기를 각자의 묵묵함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말합니다. 작별의 날조차 지나갔다고 말입니다. 정말 떠나야할 때가 왔습니다.


 배가 동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울음은 마치 한 가슴에서 나오는듯 했습니다. 울음이 그치고, 사람들이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을 때까지 한 사람이 남아있었습니다. 알미트라였습니다. 알미트라는 홀로 방파제 위에서 그가 남긴 말 중, 그저 한 마디를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잠시만 있으면 바람결에 한숨을 돌리다가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을 것입니다.





 고통이란 깨달음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이 부서지는 것과 같으며, 즐거움은 자유의 노래이나 자유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어찌 다른 말로 풀어놓을 수 있을까요. 책을 한번 읽고나서 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다시 한번 읽는것 뿐이었습니다.


 하루 남짓한 이 이야기는, 마치 예언자의 일생을 본듯합니다. 도착하여 사명을 다하고 떠나는 이야기. 태어나고 살며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사람들이 한 질문과, 그 사람들의 관계가 묘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에 대해, 교사가 가르치는 것에 대해, 법률가가 법에 대해 묻습니다. 가장 잘 답할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묻습니다. 아마도, 질문을 할 수 있을때까지는 언제까지라도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질것 같습니다. 답은 각자 안에 있었겠지요. 다만 흩어져 모호했을 뿐, 예언자가 언어의 틀로 잠시 형체를 갖춰놓았지만 시간이 다시 형체를 흩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질문을 해야할 때가 오겠지요.다르지만 틀리지 않은 답을 다시 얻을 수 있을것만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문득 썼습니다. 하루의 시작에 예언자의 마지막을 다시 보았습니다. 허나 예언자가 그랬듯 이 마지막으로 시작할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답보다는 질문을 찾아야겠습니다. 묻고싶은 것을 찾았을 때, 이미 답은 제 안에 있겠지요. 물론, 그 답을 찾아가는데에는 적지 않는 시간이 들겠지만. 혹시 압니까. 잠시만 있으면 바람결에 한숨을 돌리다가 또 다른 여인이 그 답을 낳을지요.




도서관에 갔습니다. 석양이 비칠때쯤, 춥지만 아직은 빨간 시간이었습니다.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책을 5권 또 빌렸습니다. 대출권수가 5권으로 제한되어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욕심대로 책을 한움큼 빌려 왔겠지요. 마치 이정도는 다 읽어버릴듯이 말이지요. 허나, 언제나 그렇듯 빌린 책을 다 정독하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책을 만지고 머릿글이라도 읽고 내용을 훑는 재미와 기쁨이 항상 있습니다.

첫번쨰로 빌린 책은,
서영인씨의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입니다. 사야카의 ‘멀리 갈 수 있는 배’를 빌려 읽었습니다. 그런데, 책 사이에 작은 자료위치안내표(?)가 있었습니다. 그 표에 적힌 것이 이 책이었습니다. 나와 같은 책을 대여한 누군가가 찾아본 책. 한번 읽어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알까요. 취향에 맞을지요. 사실, 작가님의 성함도 책 제목도 처음 듣는 책입니다. 빌려서 잠시 안을 들여다보니, 망원동에 관한 내용입니다. 반년 전까지만해도 저 또한 망원동에 살았기에,(지금도 사실 그 옆동네에 삽니다.) 책에 나오는 지명들과 가게들은 저희집 앞마당과 같았습니다.

둘째와 셋째 책은
​​이어령 선생님의 ‘읽고 싶은 이어령’, ‘언어로 세운 집’ 입니다. 선생님의 ‘지의 최전선’, ‘지성에서 영성으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읽은적이 있습니다. 무슨 성(性) 이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성, 감성, 영성 등등입니다. 그러한 성들은 정말 굳게 닫힌 성(城)처럼 구분되는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서로 침범해서도 안되고, 그 순간 서로를 무너뜨린다거나 양쪽이 민망하게되지는 않을까 하는 개념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어령 선생님의 글을 읽고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날카로운 지성인듯 싶으나, 다시보니 세밀한 감성으로, 조금 더 고민하니 숭고한 영성으로 다가오는 글들이 많았습니다. ‘읽고 싶은 이어령’은 이어령 선생님을 읽어보고 싶어서 집었습니다. 그 앞의 부제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지성에게’ 저는 지성이 아니지만 지성이고 싶었나봅니다. ‘언어로 세운 집’은 한국시를 기호학으로 풀어낸 책입니다. 시를 읽고 싶었고, 해석의 도움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 도움주는 분이 이어령 선생님이라니요.

넷째는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입니다. 이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신비하게 시청했던 기억이 납니다. 원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는 빌려보리라 마음 먹고 있던 책입니다. 도서관을 나가려다 우연히 ‘예언자’가 눈으로 꽂혀 집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다섯째는
​​유발 하라리의 ‘대담한 작전’입니다. 사피엔스 혹은 호모데우스 등등 그 유명한 책들을 사실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유명한 책들은 누가 선물해주지 않는 이상 급하게 보지 않는 편입니다.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는 책 중, 유발하라리 것은 이 책이 유일했습니다. 그 대단한 책들도 이 작가가 쓴 것이지요. 작가의 맛을 볼 수 있을것이라 생각하여 빌렸습니다.

모두 리뷰를 쓸 수 있을까는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손에 잡히는 대로 보이는대로 읽어봐야겠습니다:)



동기

고영성씨가 쓰신 ‘어떻게 읽을 것인가’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요즈음은 책을 어떻게 읽을까에 대해 고민을 하는 시기입니다. 책에 대한 리뷰를 본격적으로 써보려 합니다. 된다면 영상 콘텐츠도 새로 만들까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평소에 책을 좋아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읽었고,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자주 많이 책을 보는 편입니다. 주변의 인식도 그러했습니다. 책 선물도 많이 하는 편이구요. 그런데, 막상 책을 주제로 하는 콘텐츠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니 막막함이 들었습니다. 사실, 체계적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혼자만의 만족만으로 책을 읽고 있던 것이지요.

내가 무얼 느끼고 있던 것일까. 나는 왜 감동을 받았을까.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할 가치나 있는 내용이 내게 있던 것일까 하는 반성들이 들게 되었습니다. 동네에 있는 도서관에 갔습니다. 대학 도서관이 아니니 책의 종류는 많지 않았지만, 제목이 눈에 익은 책들이 몇권 있었습니다. 고영성씨의 책은 그중 하나였습니다. 책을 어떻게 읽을까. 내가 제대로 읽어왔던 것인가? 하는 질문을 품어왔던 저에게,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책일까? 하는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책 한권을 볼 때에 어떻게 봐야 할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원했습니다. 그 답을 열어보기 위해 책을 집게 되었습니다.




내용

책에는 총 10가지의 독법을 말합니다. 독법이라 말하면 정확치 않은데, ‘읽는 형태’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읽음의 대상은 꼭 책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독아 : 나를 읽다.

먼저, 나를 읽는 ‘독아’를 이야기합니다. 내가 책을 읽어서 뭐 변화라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답입니다. 우리 뇌는 성장하고, 독서를 통해서 변화할 수 있다. 라는 말을 여러 과학적 근거를 들어 설명합니다.


(2)다독 : 많이 읽다.

다음은 다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뇌는 많이 읽는 것에 적응할 수 있다. 다독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을텐데 그 중 하나로 계독이 있다. 계독이란, 한 분야를 가지고 여러 책을 두루 읽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학부 졸업논문을 쓸 때에 한 인물에 대해 언급이라도 된 책은 모조리 옆에 쌓아놓고 읽으면 정보를 모았던 기억이 납니다. 뿐만 아니라,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그 자리에 가면 해당분야 책이 모여있지요. 그러면 원래 빌리려고 했던 책 외에도 끌리는 책들을 여러권 쓸어서 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면, 내가 원하는 정보들을 더 입체적으로 얻기가 용이하지요. 단어를 알지는 못했지만, 내가 하던 것이 ‘계독’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하고 이해했습니다.


(3)남독 : 다양하게 읽다.

다독의 다른 한 갈래는 남독입니다. 남독은 계독과 달리 한 분야가 아닌 여러 분야의 책을 읽는 것입니다. 남독을 하면 비판력과 창의력 그리고 관대함(이해력)이 길러진다고 합니다. 남독은 여러 아이디어와 개념을 알고 이으며 사고할 수 있게 하는데 그로부터 바로 창의성이 나오고, 누군가의 의견의 옳고 그름 혹은 넓이와 깊이를 재어가며 읽을 수 있으니 비판력이 길러지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내가 얼마나 편협하고 잘 모르고 있었는지를 알게되니 관대함(이해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바꿔 말하면, 좁은 범위만 많이 읽는 편독은 오히려 오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계독을 잘못하면 편독이겠지요?)


(4)만독 : 느리게 읽다.

다음은 느리게 읽기를 뜻하는 만독입니다. 단순히 물리적 시간을 늘여 천천히 읽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책 한권의 내용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읽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한권을 가지고 반년을 읽는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책 한권에 있는 단어, 사건, 배경 등등에 대해서 그냥 지나가지 않고 하나씩 공부해가며 읽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근대 소설을 한편 읽는다면, 그 소설 주인공과 주변인물의 직업, 말투, 살던곳에 대해서 공부를 해가며 읽는다면 소설 한권으로 한국 근대를 꿰뚫을 수 있겠지요?

고등학생 시절을 생각해봐도 적용이 될듯 합니다. 여러 문제집을 풀지 말고, 한 문제집을 반복해서 풀라는 말이 기억납니다. 문제를 암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문제집에 있는 개념들만 잘 정리하면 다량을 푸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된다는 맥락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동의가 되는 말입니다.


(5) 관독 : 관점을 갖고 읽다.

다음은 관독입니다. 관점을 가지고 읽는다는 뜻입니다. 책을 쓰는 사람의 관점을 받아들여 읽기도 하는 것이고, 내가 특정 관점을 가지고 읽기도 하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예를들어.. 나는 진화론에 반대하지만, 일단 찰스다윈의 진화론적 관점을 받아들이고 읽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오히려 진화론을 한번 까보려는 관점을 가지고 그 책을 읽을 수도 있겠지요. 저자님의 경우에는 그냥 책을 읽을 때보다 서평을 쓸 목적으로 책을 읽으면, 책의 구조가 더 잘 보인다고 말하며 관독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주의해야할 점은 특정 관점에만 집중해서 보고싶은것만 보게 되는 터널링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단어로 이해하면 ‘확증편향’된 관점으로 책을 읽게 된다고 할 수 있을듯 합니다.


(6) 재독 : 다시 읽다.

다음은 재독입니다. 말 그대로 다시 읽는 것입니다. 

재독이 가지는 기능으로 크게 두가지를 말합니다. 그 첫번째는 옛 추억으로 우리를 돌려놓는 것인데요.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안정감에 들게 하지요. 옛 친구들을 만나는 것 처럼요. 이는 ‘건강한 방어기제’를 형성해준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방어기제라 하면 부정적인 단어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맞딱뜨리면 동굴에 숨어버리는 것처럼 현실을 피하려는 어떠한 시도를 다 방어기제라고 하며, '안좋은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독이 ‘건강한 방어기제’를 형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려움에 맞딱뜨렸을 때에 중요한 것은 그 어려움의 크기보다 어떻게 대처하는냐가 중요하다고 하는데요. 재독이 바로 그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함으로 건강한 방어기제를 만들어준다는 것이지요. 어렵고 힘들 때 읽고싶은 책이 있지요. 꼭 희망을 주는 내용의 책이 아니더라도 읽고 싶어지는 책이 가끔 있습니다.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건강한 방어기제를 저도 모르게 찾고있던 것이네요.

한가지 다른 기능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재독이란 다시 읽는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하는 생각과 내일의 내가 하는 생각이 정확히 같지는 않습니다.  책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겠지요. 예전에는 명저라 느꼈던 것이 다시보니 졸작인 것이 있을테구요. 예전에는 별뜻 모르고 읽었는데, 다시읽고 또 읽을수록 깨달음이 생기는 책이 있을 수 있겠지요. 단순히 책에 대한 깨달음을 넘어, 작가님이 주목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책을 읽는 ‘나’의 변화라고 하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다시읽기 : 재독이 주는 효용이라고 합니다. 


(7) 필독 : 쓰면서 읽다.

다음은 필독입니다. 필독은 말 그대로 쓰면서 읽는 것입니다. 밑줄을 긋고, 그은 밑줄에 대한 생각과 감상을 남기고, 더 나아가서는 읽은 부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남기면서 읽는 것을 말합니다. 작가님은 이 단계가 단순히 독서가에서 필사가로 나아가 작가가 되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책 읽기는 확실히 매력이 있습니다. 읽다가 깨닫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이 나를 변화시킬 것이라 믿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막상 책을 덮고 나면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는듯도 합니다. 아련한 옛사랑의 추억인양.. 어느 부분에서 감명깊었고, 그 부분에 대해 조금 더 묵상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간혹 듭니다. 그런데, 그런 깨달음이 들 때에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그때 그때 글로 적어놓으면 기억에 남을 뿐더러 깨달음의 내용이 더 구체적이게 됩니다. 물론, 독서의 흐름이 끊길 수 있으며 읽는 속도는 느려지지요. 일장일단이 있지만, 책 한권을 잘 씹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독법이 아닐까 합니다.


(8) 낭독 : 소리 내어 읽다.

이어서 낭독을 말합니다. 낭독은 말 그대로 말로 읽는 것입니다. 구술문화와 언어문화를 비교하며 낭독의 효용성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또한, 낭독을 통해 독서모임과 같이 사회적으로 함께 독서를 하는 효용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9) 난독 : 어렵게 읽다. 

작가가 다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난독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단순히 머리 싸매고 끙끙대며 읽는 어렵게 읽기가 아닙니다. 작가님이 말하는 난독은 사실 읽기 방법이라기보다는 극복해야할 독서의 유형입니다. 난독은 말 그대로 읽기가 어렵다 라는 뜻입니다. 인터넷 시대, 동영상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실  ‘읽기’라는 것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인터넷 기사로 몇페이지를 읽었어도 그 내용을 나중에 확인해 보았을 때에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상이나 감상을 남길 수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 글의 내용으로 들어갔을 때에 대화가 어렵다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까지 가지 않더라도 저의 경우도 해당이 됩니다. 인터넷으로 무언가를 읽을 때에 무언가 어려움 없이 슥슥 읽힌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할 때면 컽만 알고 있고 알맹이에 대해서는 무지한 경우가 많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난독 또한 쉽지 않지만 극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여러 과학적 근거들을 책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0) 엄독 : 책을 덮으며 읽다.

마지막,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독서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바로 엄독입니다. 엄독은 책을 덮는 것입니다. 책에서 느낀것들 생각한 것들을 가지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책을 읽은 후에, 잠을 자기도 하고, 산책을 하기도 하며 내용을 소화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 꿈을 꾸기도 하고 미래를 그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바로 작가가 말하는 ‘어떻게 읽을까?’에 대한 나름의 답입니다.



감상 & 아쉬운 점

책을 읽으면서, 사실 갸우뚱 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책 내용이 이상하다거나 내용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책을 읽기 전 기대한 내용과는 살짝 다른 방향성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말 그대로 책을 읽을 때에 어떻게 읽을까에 대한 의문과 답을 기대하며 책을 읽었습니다. 예를들어, 작가의 배경에 대해 알아봐라. 책은 작가의 생각과 사상 환경이 만들어낸 고민의 결론이다. 그리고 목차를 봐라. 이런 식으로 '책'에 집중된 내용을 기대했습니다.(뻔히 아는 내용이더라도) 그런데 작가님의 내용은 사실 책보다 '사람'에 무게를 두고 있었습니다. 책의 내용을 취하고 더 느끼는 방법이라기보다는, 그 책을 읽는 사람이 취하는 방식에 대한 분류와 분석을 해놓으셨습니다.


책 제목을 섹시하지는 않지만 알아듣기 쉽게 다시 써보면... 
"독서 유형의 분류와 분석 ; 그렇다면 '너'는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라고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저는, 부족해서인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창의력을 기르기 위해서 남독을 한다든가, 갑자기 독서클럽에 들어가 낭독을(의미적으로)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오히려 기대하지 않은 부분에서 배운 것들이 많았습니다. 이 책, 저 책을 읽다가 또 보기도 하고, 천천히 보기도 하고, 다른 분야를 읽었다가, 관심있는 분야를 갑자기 파기도 하는 것이 제 독서라이프(?)였습니다. 잘 모르고 그렇게 했는데, 이제는 그 행동과 습관들이 가지는 각각의 의미들을 조금 더 알고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어려운데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사람입니다. 아마 이 글을 읽고있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시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람인 것은 알지만 '사람'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참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역사, 정치, 경제, 생물, 화학 등등을 배우며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이지요.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파진다는 것은 알았지만, 배움으로써 그 이유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됩니다. 맞으면 왜 아픈지,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구하고 싶긴 했는데 그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여러 실마리를 배우기도 합니다. 그렇게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데요. 이 책이 마치 '독서'라는 존재에 대해서 대답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형식으로든 책을 읽고, 즐거움과 유익을 얻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어떻게 읽을 때에 어떤 유익을 얻는지는 경험적으로만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애소설을 읽으면 기분이 좋다든가, 판타지를 읽으면 짜릿해지고, 시를 읽으면 차분해지고, 혹은 읽고나서 기억에 남는 책들을 나도 모르게 펴게 된다든가 하며 말입니다. 이 책은 그 독서법(?)을 분류하고 분석하여 내가 여태껏 어떤 독서습관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효과를 받았겠구나, 그러면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도 읽어봐야겠다 하는 가이드 역할을 하는 책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책 마지막에 소개된 버지니아 울프가 꿨던 꿈을 적으며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나는 간혹 이런 꿈을 꿀 때가 있다. 최후의 심판일이 동터 오고 위대한 정복자들과 변호사들과 정치인들이 각자의 대가 - 불멸의 대리석에 지워지지 않게 새겨진 그들의 왕관과 월계수와 이름 - 를 받게 된다. 하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오는 모습을 지켜볼 때, 그는 베드로 쪽으로 몸을 돌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봐, 이들에게는 포상이 필요 없어. 그들에게는 줄 것이 없어. 그들은 책 읽기를 사랑하잖아.'


​​


무라타 사야카 씨의 ‘멀리 갈 수 있는 배’를 읽었다.

​동기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두 가지였다. 그 첫번째는 경험, 이라기보다는 호기심이다. 어떤 호기심이냐 하면 이 작가의 책인 ‘편의점 인간’을 읽어서 든 작가와 그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두번째는 신문 광고였다. 이 작가의 문제작이라는 자극적인 문구와 함께 책의 표지가 실려 있었다. 별 망설임 없이 도서관에 검색을 하고, 예약을 하여 이 책을 읽게 되었다.

​​
내용
세 여자의 이야기이다. 여자라고 하기가 조심스럽다. 주인공들은 그 경계에 서있기도 한 사람들이니까. 아니, 경계 위에 둥둥 떠다닌다고 하는게 조금 더 맞겠다.
한 사람인 ‘리호’는 남자처럼 행동하는 여자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궁금해하며, 방황한다. 아니 어쩌면 답을 찾아가려는 시도를 한다.
둘째는 ‘치카코’이다. 치카코는 자신과 자신 주변의 모든 것이 바로 별의 조각이며 자신도 그의 일부라 여긴다. 치카코의 사랑의 대상은 과연 사람이라는 대상에 국한될 수 있을까. 여성으로 태어났으면 꼭 남성을 사랑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이 아닌, 별을 사랑할 수는 없는가.
셋째는 ‘츠바키’이다. 츠바키는 밤에도 자외선이 있다며 선크림을 바르는 여성이다. 여자, 혹은 여성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찾고 그 예시를 찾는다면 마치 츠바키가 뿅 하고 검색될 것만 같다. 전형적인 커리어 우먼같은 모습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보통의 경우 혹은 소설에서 이런 설정의 캐릭터는 무언가에 얽매어 있을것만 같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유하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확고해보이며 다른 이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담이 없다. 방황하는 리호와 치카코 곁에 어쩐지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있다.
그래서일까, 소설의 목차는 리호와 치카코의 이름으로만 되어있다. 두 사람에 무게를 옮겨가며 소설은 진행되고, 치카코는 그 무게중심에 있다. 이 소설은 이 세명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대화와 사건의 흐름이다. 이 세명은, 혹은 셋중 둘은 자신을 알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실험하고 의심하며 자신과 남을 설득하려 한다.

메모1. “자신의 성을 찾아가는 리호의 모습이 마치 ‘아버지’에 대한 다큐를 찍던 나의 모습인 듯 하다. 나는 이상한 존재일까. 아버지가 있었는데, 있다가 없다는 것이, 지금은 없다느 것이 큰 차이를 가져오는 것일까.
마치 전등빛 같은 것일까. 환히 나를 비추다가도 그 빛을 다하면 거짓말처럼 나도 빛 가운데에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
언제쯤 정상이 아니라는 불안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보고 또 본것들을, 찾아보고 또 찾아본 것들을 뒤적이지만 답은 없고.
위안을 받는 것은 내 주변의 것을 보니 내 윤곽이 어렴풋이 보이므로 나를 알았다고, 그래도 요만큼은 알았다고 자위해본다”



벌써 몇년전의 이야기지만, 학부 졸업작품으로 아버지에 대한 다큐를 찍었다. 제목은 “당신이 있던 자리”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결국 하고싶었던 것은 아버지가 아닌 내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남들보다 조금 일찍 돌아가셨다. ‘아버지 뭐 하시니?’, ‘너희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치디?’라는 영화같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움츠려들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중적이다. 나는 아버지가 있으면서 없었다. 그러면 나는 아버지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있던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정상 범주 내에 없어 보이지만, 나 또한 정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상하지 않고,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다.
다큐를 찍는 내 과정이, 리호와 같다고 생각했다. 겉보기에는 남들과 다를 바 없다. 자신도 분명 어느 성에 속한다는 확신이 있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개념과 사고로는 증명해낼 수가 없다.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리호가 참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메모2. “아주 작지만 확실한 한가지를 확인했을 때의 기쁨”


리호는 끊임없는 실험을 한다. 그러다, 작고 확실한 한가지를 확인하며 기쁨을 느낀다. 아이러니하다. 남들과 다른데 정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기쁨이 든 때는 다른 이들과 나의 공통점을 발견했을 때이다. 이것봐, 나도 그렇다고, 나도 그러니까 정상이라고, 내가 누군지는 헷갈리지만, 이것만은 절대 부정할 수가 없어. 하고 말이다. 그렇게 자신과 타인에게 당당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한가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기쁨을 느낀다.


메모3. “당연한 것을 실험까지 해가며 나 자신에게 설명해야 하는 헛헛함. 그 결과를 확인했을 때에 찾아오는 거부할 수 없는 안도감.”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것.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프다는 것,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마르다는 것. 다섯시간쯤 멈추지 않고 운동하면 힘들다는 것. 이런 것들을 실험까지 해가며 나를 설득해야 한다. 애써 정상이라고 말이다. 더 서글픈 것은, 그 당연한 결과를 확인했을 때에 참으로 거부하기 힘든 안도감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다름의 증거를 찾고 싶었지만, 그들과의 교집합을 확인한다. 결국, 하고싶었던 것은 다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안도가 아니었을까.

메모4. “그때 치카코는 이것이 바로 섹스가 아닐까 생각했다.” ‘S가 갖는 의미, 행위와 그를 받치는 정서적 공감. 둘 중 하나라도 부재하다면 그것은 과연 ‘S’일까?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들은 ‘S’가 아닐지도... 그런데 문득, 그 단어의 의미를 깨닫는다. 우주의 한 조각이 나이며 내가 별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치카코의 마음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위와 같지 않았을까. 남들이 그러하다고 하는 것에 끼워맞추면, 나는 해당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혼란보다는 궁금해하는 그때에, 내가 그 행위에 대해 갖는 의미를 깨닫고, 그것은 순간이라도 내게는 진리가 된다.

메모5. “사람의 삶의 모양은 선도 점도 아닌 입체에 시간이라는 변수가 계속 적용되는 식이다. 마치, 누군가가 내 생 몇개의 점만 보고 이어 나를 판단하듯이.
내가 ‘. . .’ 이런 점을 말하면. 사람들은 ‘.___.___.’점을 이어 ‘나’라고 하겠지. 혹시 아니? ‘.+||._~.’내가 이럴지.
그런 면에서, 리호는 부자연스럽다. 타인이 점을 보고 나를 판단하듯, 리호도 점으로 자신을 증명하게 한다.”


맞다. 리호는 부자연스럽다. 보이지 않는 어떤 형체에 자신을 끼워 맞춰간다. 점과 점 사이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무엇들이 있다. 내 삶은 어느 시점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흐름, 누적, 변화 그리고 지금. 아무리 단어들을 나열해도 나를 어찌 설명할까. 설명했다 라고 인정할 뿐. 다른이에게 나를 설명할 때에 어려운 점(.)이다. 한정된 시간과 단어와 표현으로는 나는 시간의 축에 나라는 점을 점.점. 찍을 수 밖에 없다. 소통의 어려움이 있는 것은 점과 점 사이에 생략된 과정들을 다 보일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리호는 마치 자신이 찍어놓은 점을 타인처럼 바라본다. 답답하지만, 그 부자연스러움이 어찌 보면 이해가 간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이해 선상에 놓지 못했을테니...

정리 : 감상
단순히 성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성이라는 것을 두고 일어나는 일이지만, 남성과 여성의 대립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보이는 것은 존재의 대립이며, 증명의 치열함이다. 등장인물들이 어찌보면 조금 답답하고,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다. 설정을 유지하려다보니 로봇처럼 캐릭터가 딱딱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내가 보였다. 싫어도 보였다. 남들이 그렇다고 하는 것과 내가 그렇다고 하는것, 실제로 그런것과 그렇다고 믿고싶은 것. 그 안개를 걷어내지는 못했지만, 잠시 고개를 들이밀고 그 안을 훑은 느낌이다. 아마, 작가 안에 있는 여러 고민들이 누군가가 볼 때에는 ‘자극적이고’, ‘미친(크레이지 사야카 라는 별명처럼)’듯이 보이는 자연스러움으로 써낸듯하다. 완벽하지 않고 미완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더 친근감이 든다. 그 또한 나의 모습과 닮아서.

크리스마스가 다가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 시즌이 기쁨과 감사가 있기도 하지만, 각종 행사준비로 분주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제 아내도 성가대 연습을 위해 교회로 향했습니다. 저는 다른 일은 없었지만, 아내가 몸이 아파서 모셔오기 위해 차를 교회에 대놓고 시간이 좀 남은 상태였습니다. 책도 신문도 키보드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무얼 할까 하다 중고서점을 본 기억이 있어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렇게 발견한 ‘’흙서점’ 입니다.



밖에 책이 한가득 쌓여 있습니다.
종이에 뭐라고 써 붙어있는지 보이시나요?
​​



한권에 책이 천원입니다. 미쳤습니다..ㅋ
책(사 모으기)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환장할 문구입니다.​



결국, 여덟권의 책을 업어왔습니다.
일곱권은 천원짜리, 한권은 가격을 모른채로 실내에 있는 것을 골랐습니다. 아저씨가 잠시 생각하더니 그냥 천원에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책을 샀는지, 어떻게 읽었는지는 나중에 또 남길 일이 있겠지요.

중고서점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새책도 좋지만, 중고책은 일단 저렴하기도 하고 보물을 찾는 느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남겨놓은 낙서나 흔적을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기억까지 덤으로 사는 기분이랄까요.

앞으로 자주 방문할 것 같습니다. ‘흙서점’

역사란 무엇일까. 역사란 대체 무엇인가. 사학을 전공했지만, 그와는 전혀 무관하게도 여전히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왜냐하면 정해진 답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는 질문할 수 있겠다. 나는 역사를 무엇이라 생각할까? 아니, 인식할까?

역사는 발전하는 것인가 아니면 넓어지는 것인가. 사람, 대상, 혹은 단체는 발전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비정상인 것인가?


밀란 쿤데라의 '커튼'을 읽고 있다.

박웅현씨의 '다시, 책은 도끼다.'를 읽고서 손에 잡은 책이다.

'다시, 책은 도끼다.' 리뷰 링크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대출기한을 연장했다. 천천히 읽고, 또 읽고싶어지는 책이다. 결국, 나는 이 책을 사게될 것 같다. 곁에 두고 계속 꺼내보고 싶은 책이 이미 되었으니 말이다.

책 전체에 대한 리뷰는 아직 멀었지만, 그중 기억해놓고 싶은 부분이 있어 적고 생각을 남기려 한다.


'1부 연속성의 의식 중, ['역사'라는 단어의 다양한 의미들]

"위대한 의사 A는 어떤 병을 고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잇는 치료법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십 년 후 의사 B가 더 효과적인 치료법을 만들어 내고, 그리하여 이전(그러나 천재적인) 치료법은 폐기되고 망각된다. 과학의 역사는 진보의 특성을 지닌다.

 역사의 개념이 예술에 적용되면 진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완성, 개선, 향상을 함축하지 않으며, 미지의 땅을 탐험하고 그것을 지도에 글여 넣으려고 시도하는 어떤 여행에 가깝다."


우리는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낼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자기를 소개할 때, 한 단체가 지나온 길을 설명할 때가 그 때이다. 지금의 '나', 현 상태의 '나'가 있다. 나의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것도 있지만, 선택이 아닌 어떠한 환경들도 지금의 '나'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나는 '진보'하였는가? 실제로 그리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는 믿음이 있다. 그러하다고 믿고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 실제에 조금은 더 근접한 말일까.

자기소개서 쓰기가 왜 어려울까. 대상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이 왜 어려울까. 밀란 쿤데라의 단어를 빌리면 '커튼'을 잔뜩 쳐놓아서이다. 지금의 나는, 도덕적으로 훌륭할까. 낭비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가. 누군가에게 정말 떳떳한 삶을 살고 있을까. 문제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렇다'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모순에 있다. 내가 인생을 똑바로 살아왔다면 나는 발전하고 진보했어야 맞는 말이니까. 그래야 남이 좋아하고, 그것이 '정상'이니까. 하나를 숨기면, 다른 하나를 다시 숨겨야 한다. 숨긴다 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지금의 나로부터 시작해 과거를 더듬으며 사실아닌 과정을 적어내려갈 때에 완성된 것은 역사일지 소설일지 알기 어렵다.


돈키호테가 왜 그리 유명한 소설일까. 현실에 맞서 꿈을 좇은 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여서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은 줄 알았다. '라만차의 돈키호테' 그 이름도 멋지다. 돈키호테는 괴물과 맞서 싸웠다. 충성스러운 하인인 산초가 있다. 사랑하는 공주님을 위해 순정을 바칠 줄도 아는 남자이고, 자신의 신념을 지킬 줄 아는 멋진 사나이로 여행중이다. 똑같은 말이지만 다시 이야기해볼까. 알폰소 키하다라는 정신병자가 소설을 하도 많이 읽어서 스스로를 돈키호테라 이름짓고, 조금 더 정신병자같은 바보인 산초라는 사람을 데리고 다닌다. 풍차를 괴물이라 부르며 달려든다. 옆동네 이쁘지도 않은 한 여인을 공주라고 부르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한번도 본 적도 없고 실재하지도 않는 이를 '사랑'한다라고 한다면 과연 사랑이란 무엇일까. 착한 사람들을 악당이라고 외치며 공격하고, 무전취식하고 때로는 돈도 뜯기며 지금도 계속 돌아다니는 중이다.

돈키호테의 주인공은 하나이지만, 이야기는 두개이다. 우리는 이 두개의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읽을수 밖에 없다. 커튼, 역사, 돈키호테까지 왔다. 지금의 나는 알폰소 키하다이지만, 돈키호테로 남들에게는 소개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렇게 강렬히 믿는다는 것이다. 상황은 꼬이고 악화된다. 내가 아닌 나를 '자신'이라고 믿으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까.

사실 아닌 역사를 나도 모르게 만들어놓고, 마치 나는 진보해야 하는 것처럼 만들어진 나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존재대로 살아라. 자신을 사랑해라. 현재가 너에게 가장 큰 선물(PRESENT)이라는 등의 우리를 위로하는 말들이 있다. 이 말들이 정말 전하고픈 메시지는 커튼을 걷으라는 소리 아닐까. 진보하고 싶다면, 나아지고 싶다면, 조금 더 넓어지고 싶다면, 당신 자신을 똑바로 봐라. 돈키호테로 포장된 누군가가 아니라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자신을 먼저 바라보고 직면해라. 그래야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첫 단추를 끼는 것이 아닐까. 아직도 첫 단추를 끼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인정한 다음에야 우리는 스스로에게 맞는 옷을 고를 자격이 주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제목 : 테레즈 라캥


동기

에밀 졸라의 소설, 동명의 영화작품을 기억한다. '테레즈 라캥' 프랑스에 대해 묘한 호감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저게 무슨 뜻일까... 궁금하기도 했다.(사람 이름이었다.) 결국, 고전이어서 선택했다.



내용

1860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펼쳐진 이야기이다. 어린시절 아버지에 의해 고모에게 맞겨진 테레즈, 테레즈의 사촌이자 그녀와 결혼하게 되는 병약한 카미유, 결혼 후 만나게 되는 새로운 남자 로랑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숨은 주인공을 한명 더 이야기하자면 카미유의 엄마인 라캥 부인이다.

사랑에 빠진 테레즈와 로랑은 계획을 꾸며 카미유를 죽인다. 그리고는 죄책감이 불러운 카미유의 유령에 괴로워하다 종국에는 함께 자살을 택한다.


테레즈의 변화

테레즈는 바라는 것도 없는, 무엇을 바라야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여자였다. 모든 일에 수동적으로, 심지어는 결혼조차도 의지없이, 사랑하지도 않는 사촌과 하게 된다. 그런 테레즈가 로랑을 만나 변화를 보인다. 말을 하기 시작하고, 의지를 내비치고, 욕망을 보였다.


숨은 주인공 라캥 부인

마지막에, 라캥 부인은 중풍(?)에 걸린다. 말도, 표현도 못하고 눈뜨고 볼수밖에 없는 몸 상태이다. 그 상태에서 함께 살고 있던 테레즈가 자신의 아들인 카미유를 죽이고, 함께 가담한 로랑과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찌나 충격이었을까. 그 사실을 알리려 모든 노력을 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 테레즈와 로랑의 파국을 보는 것이 삶의 유일한 소망이 되어 결국, 그 소망에 다다른다.

마지막 한 페이지

책의 마지막 한 페이지에서 그 둘은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한다. 그리고 라캥 부인은 그것을 보고 있다. 원래는 서로를 죽이려 했다. 한명은 칼을, 한명은 독약으로 말이다. 그런데, 서로의 무기를 확인한 순간 그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독약을 나눠마셔 함께 죽는다.

아이러니하다. 이 둘은 사랑했다. 첫눈에 반했고, 뜨거웠다. 결혼 후에는 죄책감에 서로를 미워하고 괴롭힌다. 살인을 통해서 이뤄진, 비극을 배태한 결혼이었다. 결국, 그 둘은 마지막 페이지에서야 죽음을 앞두고서야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지체없이 실행한다.



결론

각자의 욕망만을 보고 나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라캥 부인은 자신의 아들만을 위해서 테레즈를 희생시켰다.

카미유는 그런 부인 아래에서 그저 당연히 받으며 자랐고, 그렇게 살고자 했다.

테레즈는 나중에서야 찾은 성적 욕망을 따랐다.

로랑은, 친구의 여자 그리고 재산을 탐했다.

다들, 가엾다. 조금이라도 주변을 돌아봤으면 어땠을까. 나의 결정과 선택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어떠한 영향을 받을지 조금만 고려했다면 어땠을까. 허나, 이런 생각은 싸구려 감상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말이 없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는 가정은 힘이 없다. 이런 세상이다. 이를 인정한 상황에서 나아갈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각자의 저지른 상황을 인정한 다음 걸음은 무엇이었을까. 어디서부터 풀어나갈 수 있었을까. 알 수는 없다.

제목 : 도망치고 싶을 때 읽는 책, 이시하라 가즈코

다시 써본 부제 :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인정하라!

동기

책은 제목으로만 골랐다. 요즘 유행하는 퇴사 시리즈라든가, 괜찮아 시리즈들이 있다. 광고나 기타 매체에서 이 책은 몇번 스쳐가듯 본적이 있다. 작가도 후기도 읽지 않았지만, 제목만으로도 한번 읽어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사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절망이야 다 끝이야 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적어도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고 인지하는 단계이다. 그래서 이 책을 잡게 되었다. 그럴 떄 읽는 책이라고 제목에 써있으니 말이다.

마포중앙도서관에는 누가 대출해갔길래, 상호대차라는 놀라운 시스템을 이용해 책을 빌려보았다.

내용

내용을 한줄로 요약해보라고 한다면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라' 라고 쓰고 싶다.

보통의 우리는 타인중심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남의 눈치를 보고, 나의 감정보다는 남의 의견을 더 우위에 두었다. 물론, 머리로는 내 감정을 소중히 해야함을 알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자존심도 있고, 두려움도 있어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회피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고민을 듣거나 상담 비스무리한것을 하면(내 주제에), 본질에서 벗어난 이야기로 뱅뱅 도는 경우가 많다.

당장 생각나는 예는 연애문제이다. 우리 집 상황이 안좋다. 상대방 집 상황도 안좋다. 그런데 내 상황은 이렇고, 상대방은 이런거 같다. 상대방의 말을 논리적으로 끼워맞추어 결론을 도출해 보면 결국 가장 합리적인 답은 이별이라는 답에 도달한다. 그런데, 헤어지고 싶냐라고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니란다. 계속 또 상황과 주변머리만을 이야기한다. 모두가 한 경우는 아니겠지만,

"'헤어지고 싶어'가 솔직한 내 마음이야. 그런데, 내가 그런 생각과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진 않아. 왜냐면, 주변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 그리고 난 그렇게 나쁜놈이 아니야."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게 들리지 않는다.

'나는 도망치고 싶다.' 이 마음은 결론이면서 시작이다. '도망치고 싶어'라고 솔직히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 이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과연 소수일까. 많은 이들이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을 품지만, 본인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이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계속해서 풀리지 않고 쌓이고 꼬여갈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도망치고 싶다'라는 마음을 가진 것 자체가 실패나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그 마음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나는 그런 상태가 아니야!라고 말한다면 ok다. 허나, 혹시나 그렇다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외면한다면 현재의 상황은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있음을 인지하고 내가 그런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시작인 것이다. 그 해결법은 꼭 도망이나 포기가 아닐 수 있다.

결론

내 경우에는 책을 잡기 전 '도망치고 싶다'라는 마음을 사실 인지하고 인정했다. 어느 순간 알게되었다. 아닐거라고 아닐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맞았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것이 조금은 부끄럽지만, 조금의 용기를 내어 이 책을 집었다. 책을 빌릴 때, 이런 제목의 책을 빌려줄 때 사서가 나를 보며 한심한 듯 생각을 하진 않을까 조금 염려한 것은 안 비밀이다.

책에서는 여러 기술을 이야기해주기도 한다. 거절하는 법이라든가, 이런 기분이 들 때 어쩌해야한다든가 말이다. 여러 말을 하지만 핵심은 '인정하라, 그러면 시작될 것이다.'이다.

책은 술술 읽힌다. 심지어 종이도 두꺼워서 두께도 금방 줄어든다.

엄청난 교훈이나 처세술이 담겨있지는 않다. 우리가 기대하며 펴든 모든 자기계발서가 그러하듯 말이다. 혹시나 '도망치고 싶다.'라는 마음이 듦을 스스로가 인정했다면, 가볍게 읽어볼만한 책이다. ''당신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과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을 알고 인정하고 이 책을 손에 잡은 당신은 제법 용기가 있는 사람이에요." 라고 책의 저자가 말을 건넬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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