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대륙 대부분의 나라를 보면, 영어 혹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쓴다. 영국의 식민지였느냐, 프랑스의 식민지였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마다가스카르 같은 경우는 프랑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프랑스어와 현지어인 말라가시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공용어로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두 언어를 유창하게 사용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적당히 반씩 섞어서 쓸 수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를 상상했는데, 실제로 보니 둘 다 아니었다.


마다가스카르의 옛날 왕궁에서 찍은 안내 돌판이다. 써있는 글은 말라가시어인데, 문자로는 영어를 사용한다. 우리나라에 한글이 있기 이전에 한자를 문자로 쓰며 우리말을 쓴것과 유사한 것이다. 읽는 법이 조금 다르지만, 영어를 읽을 줄 안다면 말라가시어를 읽어내려가기에 큰 무리가 없다. 


 사실, 보통 현지인(말라가시인)들은 프랑스어를 잘 하지 못하고, 현지어인 말라가시어만을 사용한다. 사용하는 단어 중, 프랑스어가 외래어로써 가끔 섞여있기는 하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의 사람들도 아직 어묵을 ‘오뎅’이라고 하거나, 찹쌀떡을 ‘모찌’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숫자를 쓸 때에도 보통 현지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쓴다.

 그러면, 프랑스어는 언제 쓰이는 것일까? 프랑스어는 주로 관공서에서 쓰는 서류나 계약서 등에 사용되는데, 소위 ‘잘 살고 배운’ 말라가시인들이 주로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 더 ‘잘 살고 배운’ 사람들은 영어까지도 잘한다.

 아내와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현지인들이 자기들끼리는 현지어로 대화를 하다가 주문을 할 때는 프랑스어로 말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주문을 받은 사람은 같은 현지인이었고 주문이 끝나자 다시 자기들끼리는 ‘편한’ 현지어로 이야기를 했다. 프랑스어를 쓴다는 것은 ‘잘 살고, 배운’ 사람이라는 것을 티 낼 수 있는 수단이고 증거인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아주 간단한 현지어는 구사할 수 있지만, 프랑스어는 하지 못한다. 현지인이 볼 때에는 나는 참 이상한 사람이다. 외국인인데도 고급인 프랑스어를 안 쓰고 누구나 다 사용하는 현지어만 할 줄 아니까 말이다. 하루는 동네 시장에 야채를 사러 갔다. 현지어로 야채가 얼마인지 물어봤는데, 금액을 프랑스어로 이야기해주는 것이었다. 내가 웃으며, “Azafady, tsy afaka teny frantsay. Teny gasy, azafady”(미안해요. 저 프랑스어를 할 줄 몰라요. 말라가시어로 말해주세요)라고 말하니 가게 주인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현지어 숫자로 가격을 말해 주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마다가스카르를 보면 어떠한 의미에서는 식민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를 포함하여, 자국의 것보다 프랑스의 것을 더 우월하게 여기는 현지인들을 제법 많이 보았다. 생활의 많은 측면들에서도 프랑스와 주종관계처럼 보이는 것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나라들이 아프리카 대륙에 적지 않을 것이라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대문에 글을 쓰고 있다. 쓰는 내용은 'MAMA CENTRE'이다. 이른바 '마마센터'인데, center가 아니라 centre인 이유는 프랑스어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말라가시어를 현지어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일상용어에 프랑스어가 섞여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적절한 외래어를 쓰면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되는 것처럼(절대, 항상 그렇지는 않다.), 정식적인 용어나 명칭을 정할 때에 프랑스어를 많이 정한다.


 마다가스카르와 비교해 본다면, 우리나라는 참 대단한 면이 있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아직 일본어의 잔재가 우리의 언어생활 속에 남아있지만, 오용되고 있는 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대중에 널리 퍼져있는 듯하다. 물론, 한국에는 영어열풍이 아직도 불고 있다. 누군가 영어로 말을 걸어오면 위축되고, 외국인에게는 무조건 영어로 응대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나에게도 있음을 고백한다. 단순히 영어 실력 때문에 나의 그런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공용어를 쓴다는 것이 단순히 두 개의 언어를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마다가스카르의 사람들을 보며, 또한 나의 모습을 보며 언어의 문제는 한 나라의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태도가 실린 아주 묵직한 문제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타문화권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마주한다는 것은 설레기도 하지만 긴장되기도 하는 일이다.


한국에서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로 가려면, 대부분 1번 이상 경유하는 항공편을 이용해야 한다. 우리 같은 경우는 태국의 방콕과 케냐의 나이로비를 거쳐 마다가스카르의 안타나나리보로 입국하는 경로였다.


​케냐 공항에서 마다가스카르로 가는 공항에서 마신 커피. 케냐에서 케냐AA를 마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한국을 잘 떠나서 방콕에 도착하였다. 비행기에도 공항에도 같은 동양권의 사람들이 가득했다. 문제는 방콕에서 나이로비로 출발하는 비행기에서 있었다. 공항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비행기에 타고 보니 우리를 빼고는 주변에 보이는 모든 사람이 ‘흑인’이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아프리카에 간다는 실감이 났다.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모를 압박과 긴장감이 우리에게 있었다. 문화권이 다를 뿐 아니라, 우리와 생김새가 전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이 만들어낸 우리 안의 편견이었을 것이다. 물론, 반년을 살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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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던 자카랴와 나의 발. 내 발도 타서 검어졌다. ​


​마다가스카르의 사랑하던 말라가시인 가족. 잘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흑인처럼 새까맣지는 않다.

같은 동양인이라도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사람 각각의 생김새가 갖는 특징이 있다. 같은 한국 사람 중에서도 생김새가 다르고 피부색도 조금씩 다르다. ‘흑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나라마다, 또한 종족마다 조금씩 다른 피부색과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살았던 마다가스카르의 말라가시인 같은 경우는 체구가 작고, 인도 사람을 연상시키는 어두운 갈색 피부톤을 갖고 있었다. 반면, 우리가 경유했던 케냐의 사람들 같은 경우는 정말 밤처럼 까만 피부에 근육질의 큰 몸집을 갖고 있다. 물론, 사람마다 개인차는 있고 그 차이를 우리가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한 번은, 지나가는 ‘흑인’에게 안녕하냐는 의미의 말라가시어인 ’마나호아나’ 하고 인사를 건네었는데, 굉장히 기분 나쁜 표정으로 ‘Hello!’ 하고 나를 스쳐갔던 기억이 있다. ‘Hello!’라는 말에는 ‘나는 마다가스카르 사람 아닌데, 너 왜 그 언어로 나한테 인사해?’라는 의미가 담겨있었을 것이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비행기 안에서의 그 긴장감, 그 떨리는 순간이 우리에게는 아프리카에 진입하는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아프리카에 대한 글을 써보려고 앉았다. 아프리카라는 이름에 걸맞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글을 시작해야 할까? 끝이 없는 초원, 그 사파리의 왕좌를 차지한 사자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검은 대륙의 신비와 놀라움에 대해 이야기해도 좋겠다.


 글을 잘 포장하기 위한 매력적인 소재를 떠올리려 잔머리를 굴리던 내게 떠오른 건, 참 부끄럽게도 한 아이와 그 엄마의 이름이었다. ‘자카랴와 쥬스트라’.

 자카랴. 결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우리 부부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첫사랑과 같은 아이였다. 인형처럼 새까만 피부와 내 영혼까지도 관통하는 눈망울을 가진 아이였다. 자카랴가 처음으로 걷기 시작했을 때를 기억한다. 넘어질 듯 넘어질 듯 아장아장 걸어와 나에게 안겼던 그 순간에는 내가 기쁨이라는 감정을 마치 처음 접한 듯이 기뻤다. 자카랴가 막 입을 떼고 말하기 시작한 때를 기억한다. 잠잠히 내 품에 안겨있을 때,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다다’라고, 그들의 언어로 ‘아빠’라 말해주었을 때는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났었다. 그다음 날부터 자카랴가 모든 사물을 가리키며 ‘다다’라고 부르는 것을 본 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았지만 말이다.

 쥬스트라는 자카랴의 엄마였다. 처음 만났을 때에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나눴다. 남편은 멀리 돈을 벌러 가서 홀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는 것, 나와 같은 나이임에도 이미 다섯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 그중 한 아이는 하늘로 보내 주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소통에 필요한 것은 언어보다도 이해하려는 마음과 전하고픈 마음이라는 것을 그날 알게 되었다.

엄마인 쥬스트라와 아들인 자카랴이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사진을 찍는 것을 고마워하기도,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마치, 검은 성모마리아 같다는 생각도 하게된 아름다운 모습니다.

 우리 부부는 결혼하자마자 아프리카 대륙의 마다가스카르라는 나라로 오게 되었다. 우리가 아프리카에 가면, 주어진 반년의 시간 동안 무언가 대단한 것을 보게 될 줄 알았다. 뭔지는 몰라도 심오한 것을 알게 될 줄 알았다. 사실 그런 것들을 기대했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미디어에서, 책에서 본 엄청난 것들을 사실 그 땅에서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건물만큼 큰 바오바브나무를 보았고 그 희귀하다는 여우원숭이도 보았지만 우리가 만난 가치 있는 것들은 책에 나오지 않는 작은 것들이었다. 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아이를 안았을 때, 집을 방문했을 때, 함께 밥을 먹을 때, 시시덕거리며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에, 그들을 볼 수 있었고 그들과 마주한 우리를 오히려 더 잘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자카랴를 안을 수 없을 정도로 냄새가 많이 났는데, 아내가 씻기고서라도 안고 뽀뽀해주겠다며 목욕을 시키는 장면이다. 물론, 나중에는 냄새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어디를 가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아프리카’라고 단순히 이야기했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어디를 갔다 왔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이제는 조금 다르게 말한다.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마다가스카르라는 나라에 갔다 왔고, 그 나라에만 18개의 종족이 있으며, 내가 살았던 곳에서는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러고 보니, 이제 조금 아프리카가 보이는 것 같다. 아프리카는 나라가 아닌 대륙이라는 것, 그 대륙 안에는 수많은 나라가 있으며, 그 나라 안에는 또 수많은 종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도 형태는 다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와 같이 소중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마다가스카르에서 보낸 반년의 시간은, 나에게 아프리카를 이해하는 시작과 같은 시간이었다. 우리 부부가 그곳에서 보냈던 평범한 일상 중 기억나는 것들을 담담히 이야기하려 한다. 이 시간을 통해, 아프리카와 우리의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를, 그들에 대해 알고 우리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지피지기’의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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