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지도나 문서를 찾아보면, 미얀마는 버마라고도 불리며 두 이름이 같이 쓰인다. 버마는 브라만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했다. 이 글에서는 편의를 위해 이하 미얀마로 통칭하겠다.
대한민국은 1991년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가 내린 결정에 따라 미얀마라고 부르고 있다. 외국에서는 미얀마 보다는 버마라는 이름을 주로 쓴다. Myanmar known as burmese 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왜 한 나라에 다른 두 이름이 공존하는 것일까. 먼저 미얀마의 역사를 봐야 한다.




대한민국 이전에 조선왕조가 있었던 것처럼, 버마 왕조가 있었다. 버마 왕조의 역사는 영국에 의해 1885년 끝이나고, 1886년에 영국령 인도에 속한 한 주로 존재했다. 1937년에는 버마가 인도로부터 분리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1942년 아웅산과 일본군이 미얀마에 들어와 일본 식민지가 시작된다. 아웅산은 미얀마의 독립운동 혁명가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현 미얀마를 이끄는 아웅산 수찌가 아웅산의 딸이다. 아웅산은 미얀마 독립을 목적으로 일본군과 함께 미얀마에 들어왔으나, 영국보다 잔인한 일본군의 통치를 보고 생각을 바꾼다. 1945년, 일본군이 패망하고 아웅산은 영국 정부와 담판을 지어 독립을 이끌어냈다. 아웅산은 미얀마에서 ‘민족의 영웅’, ‘국부’로 불린다.


독립 후, 버마연방이 설립되었다. 민주적 정치가 행해졌으나, 1962년 네윈 장군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군부독재가 시작되었다. 이후 군부를 향한 계속된 민중 저항이 있었다.
2010년에는 길었던 군부독재가 끝나고, 민주적 투표가 이뤄졌다. 이 투표에서 승리한 당은 바로 군사정권의 지원을 받는 당이었다. 형식적 민주화는 되었으나 군사정권만 연장된 꼴이었다. 이후 2015년에 개최된 총선에서 야당인 국민민주연맹이 상하원·지역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며 정권교체를 확정했다. 국민민주연맹을 이끄는 당수가 바로 아웅산 수찌이다. 이렇게 2015년에야 군사정권에서 벗어나 실질적 민주화를 이루었다.



미얀마 이름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버마와 미얀마, 이 둘로 국호가 병용되고 있었다. 앞에 언어에서 구어와 문어가 다르다고 했는데, 구어로는 버마, 문어로는 미얀마였다.
1989년, 군부에서 미얀마의 공식 명칭을 미얀마로 변경했다. 버마라는 이름이 영국 식민지시대의 잔재라는 이유와 주류 민족인 버마족 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포괄하겠다는 의미에서였다. 현재 두 개 이름이 혼용되는 것은 이에 대한 반발이다. 군부를 향한 저항은 국민 정서를 대변한다. 국민들은 군부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외국 언론사 및 시민단체, 정부 등도 마찬가지였다. 미얀마는 정통성도 정당성도 없는 군부가 지은 이름이다. 군부를 인정치 않는 사람들은 미얀마 대신 버마라는 단어를 쓴다. 외국에서는 ‘버마라고 알려진 미얀마’라는 표현을 쓴다. 한국 일부 언론사도 미얀마 군부를 인정치 않는다는 의미로 버마라는 표현을 쓴다. 물론, 공식 명칭은 미얀마이다.
이렇게, 미얀마는 민주화 역사가 짧다. 군부 잔재도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위 정보들은 서적과 인터넷 검색, 저자의 기본상식을 토대로 쓰여졌습니다.

한 나라에 대해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텐데, 크게는 직접 살아보는 방법과 자료 및 문헌조사로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조사도 하고 살아도 보면 좋겠지만, 외부에서 검색할 수 있는 자료는 이정도구나 하는 수준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도차이나 반도는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한 반도이다.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얀마는 인도차이나반도에 속해있으며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 라오스, 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공식 수도는 네피도이다. 2006년까지는 양곤이었으나 바뀌었다. 현재까지도 양곤은 경제수도라고 불리고, 많은 지도에서 아직도 양곤을 수도라 표기하고 있다.


기후는 전반적으로 고온다습한 열대 몬순 기후이다. 계절은 건기, 우기, 겨울로 나눠진다. 건기중 가장 시원한 계절인 11월-2월 기간중 평균최저 기온은 17℃이나, 3월에서 5월 기간중 평균 최고기온은 40℃가 넘는다.


인구는 약 5350만명이다.(2017년 10월 8일 12:41시 기준 53,501,874명) 평균나이는 27.9세로 젊은 편이며 약 40%가 도시에 살고있다.


공용어는 버마어(미얀마어)이며, 구어체와 문어체가 다른 형태로 쓰이는 특징이 있다.



※위 정보들은 서적과 인터넷 검색, 저자의 기본상식을 토대로 쓰여졌습니다.

한 나라에 대해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텐데, 크게는 직접 살아보는 방법과 자료 및 문헌조사로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조사도 하고 살아도 보면 좋겠지만, 외부에서 검색할 수 있는 자료는 이정도구나 하는 수준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얀마 공부_공유.pdf



미얀마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온라인으로 접근 가능한 매체로만 미안마에 대해 알아보았다.

위에 첨부는 발표용 pdf파일이고, 아래는 그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사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얼마든 찾을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목차를 나누고 내 것으로 하나씩 소화하며 정보를 모았다는 데에 무게를 더할 수 있다.

이슈가 무엇일까, 중요한 내용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선별하며 글을 썼다.

감정과 감성적인 판단은 최대한 자제하려 노력했다.

필요하신 분은 참고하시길, 그리고 출처는 꼭 밝혀주시길:)




1. 기본정보

(1)위치

인도차이나 반도는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한 반도이다.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얀마는 인도차이나반도에 속해있으며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 라오스, 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2)수도

 공식 수도는 네피도이다. 2006년까지는 양곤이었으나 바뀌었다. 현재까지도 양곤은 경제수도라고 불리고, 많은 지도에서 아직도 양곤을 수도라 표기하고 있다.

(3)기후

기후는 전반적으로 고온다습한 열대 몬순 기후이다. 계절은 건기, 우기, 겨울로 나눠진다. 건기중 가장 시원한 계절인 11월-2월 기간중 평균최저 기온은 17℃이나, 3월에서 5월 기간중 평균 최고기온은 40℃가 넘는다.

(4)인구

인구는 약 5350만명이다.(2017년 10월 8일 12:41시 기준 53,501,874명) 평균나이는 27.9세로 젊은 편이며 약 40%가 도시에 살고있다.


(5)언어

공용어는 버마어(미얀마어)이며, 구어체와 문어체가 다른 형태로 쓰이는 특징이 있다.






2. 미얀마 국명 그리고 역사


(1)배경

여러 지도나 문서를 찾아보면, 미얀마는 버마라고도 불리며 두 이름이 같이 쓰인다. 버마는 브라만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했다. 이 글에서는 편의를 위해 이하 미얀마로 통칭하겠다.
대한민국은 1991년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가 내린 결정에 따라 미얀마라고 부르고 있다. 외국에서는 미얀마 보다는 버마라는 이름을 주로 쓴다. Myanmar known as burmese 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왜 한 나라에 다른 두 이름이 공존하는 것일까. 먼저 미얀마의 역사를 봐야 한다.


(2)역사: 버마왕조부터 현대까지

대한민국 이전에 조선왕조가 있었던 것처럼, 버마 왕조가 있었다. 버마 왕조의 역사는 영국에 의해 1885년 끝이나고, 1886년에 영국령 인도에 속한 한 주로 존재했다. 1937년에는 버마가 인도로부터 분리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1942년 아웅산과 일본군이 미얀마에 들어와 일본 식민지가 시작된다. 아웅산은 미얀마의 독립운동 혁명가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현 미얀마를 이끄는 아웅산 수찌가 아웅산의 딸이다. 아웅산은 미얀마 독립을 목적으로 일본군과 함께 미얀마에 들어왔으나, 영국보다 잔인한 일본군의 통치를 보고 생각을 바꾼다. 1945년, 일본군이 패망하고 아웅산은 영국 정부와 담판을 지어 독립을 이끌어냈다. 아웅산은 미얀마에서 ‘민족의 영웅’, ‘국부’로 불린다.

독립 후, 버마연방이 설립되었다. 민주적 정치가 행해졌으나, 1962년 네윈 장군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군부독재가 시작되었다. 이후 군부를 향한 계속된 민중 저항이 있었다.
2010년에는 길었던 군부독재가 끝나고, 민주적 투표가 이뤄졌다. 이 투표에서 승리한 당은 바로 군사정권의 지원을 받는 당이었다. 형식적 민주화는 되었으나 군사정권만 연장된 꼴이었다. 이후 2015년에 개최된 총선에서 야당인 국민민주연맹이 상하원·지역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며 정권교체를 확정했다. 국민민주연맹을 이끄는 당수가 바로 아웅산 수찌이다. 이렇게 2015년에야 군사정권에서 벗어나 실질적 민주화를 이루었다.



(3) 두 이름을 가진 나라


미얀마 이름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버마와 미얀마, 이 둘로 국호가 병용되고 있었다. 앞에 언어에서 구어와 문어가 다르다고 했는데, 구어로는 버마, 문어로는 미얀마였다.
1989년, 군부에서 미얀마의 공식 명칭을 미얀마로 변경했다. 버마라는 이름이 영국 식민지시대의 잔재라는 이유와 주류 민족인 버마족 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포괄하겠다는 의미에서였다. 현재 두 개 이름이 혼용되는 것은 이에 대한 반발이다. 군부를 향한 저항은 국민 정서를 대변한다. 국민들은 군부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외국 언론사 및 시민단체, 정부 등도 마찬가지였다. 미얀마는 정통성도 정당성도 없는 군부가 지은 이름이다. 군부를 인정치 않는 사람들은 미얀마 대신 버마라는 단어를 쓴다. 외국에서는 ‘버마라고 알려진 미얀마’라는 표현을 쓴다. 한국 일부 언론사도 미얀마 군부를 인정치 않는다는 의미로 버마라는 표현을 쓴다. 물론, 공식 명칭은 미얀마이다.
이렇게, 미얀마는 민주화 역사가 짧다. 군부 잔재도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3. 아웅산 수찌

(1)민주화 그리고 아웅산 수찌

앞에서 설명한, 민족의 영웅 아웅산이 낳은 딸이 바로 아웅산 수찌이다.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가정을 꾸려 살아가던 중, 1988년 군부반대 집회인 ‘8888항쟁’에 참가하면서 민주화 운동 지도자로 급부상하게된다. 정부에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야당세력을 통합한 수찌는 1989년에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서방세력도 군부에 민주화 압박을 했다. 1990년에 총선이 이뤄져서 수찌가 이끄는 야당연합이 압승했으나, 군부는 선거결과를 무효시키고 야당 지도부를 투옥시킨다. 1991년 수찌는 민주화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는데, 가택연금으로 시상식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2010년 다시 총선이 있었고, 군부인 여당이 압승을 거둬 수찌는 연금에서 해지된다. 연금에 처해진 동안에도 수찌는 몰래 외국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등 암암리에 민주화 활동을 했다.

2015년 수찌가 이끄는 야당연합이 총선에서 승리했다. 2016년에는 야당연합에서 틴초라는 대통령이 배출되었다. 미얀마 헌법상, 외국인 배우자 및 자녀를 두고 있는 자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 현재 수찌의 직함은 외교부 장관 겸 국가자문역이다.


(2)아웅산 수찌가 가지는 의미

아웅산 수찌는 민주화 운동에서 상징적 인물이다.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으니, 군부에서도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다. 현 총선에서 승리하고 대통령을 배출한 야당 실질적 지도자이며, 사실상 대통령 역할을 수행하는 위치에 있다. 미얀마에 대한 모든 국내외 기대가 아웅산 수찌에 쏠리는 이유이다.

수찌는 상징적 민주화 인물이지만, 시민사회 문제에는 큰 발언을 하지는 않았다. 현실 정치에 참여한 기간도 길지 않다. 대통령을 넘는 권한을 갖지만, 결국 대통령은 되지 못한다는 한계도 있다.

상징적 권력, 실질적 권력이 있지만 현실 정치에서 문제를 풀어낼지는 미지수이다. 짧은 민주화 역사, 군부 잔재, 수찌라는 조합은 정치, 종교, 사회 등 여러 영역에서 기대와 혼란을 함께 보인다.





4. 종교

(1) 불교의 나라 미얀마

미얀마를 수식하는 단어들이 있다. 황금의 나라, 천불천탑의 나라, 기부의 나라, 그리고 이 모두를 포함하는 '불교의 나라'이다.

불교역사가 2,500년이 넘는 미얀마에는 탑이 400만개가 넘는다. 그 중 관광지로도 유명한 쉐다곤 파고다가 있다. 파고다는 '불탑'을 의미한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는 탑골 공원이 가진 다른 이름이 파고다 공원인 이유다. 같은 이름을 가진 어학원도 있다.) 미얀마에 있는 불교신자들은 공덕을 위해 얇은 금을 불상 혹은 탑에 붙인다. 옛날부터 이 때문에 미얀마는 금 세공기술이 발달하기도 했고, 황금의 나라라고도 불린다. 2016년 기준으로 GDP가 1,391달러(한화 약 150만원)인 미얀마는 세계에서 기부지수가 1위인 기부의 나라이기도 하다.(한국은 75위이다.)  불교 최고 덕목이자, 수행방법인 보시가 기부로 나타난다. 어려운 이들에게 기부를 하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이 불교 관련 시설과 승려들에게 기부된다. 이 이름들이 생긴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불교국가 미얀마가 있다. 이 모든 이름들은 불교적 공덕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얀마는 국민 90%가 불교를 신앙종교로 갖고있다. 그 외, 기독교(4%), 이슬람교(4%) 등(정령신앙 1%, 기타신앙 2%)이 나머지 10%를 차지한다.


(2) 신쀼의식과 종교모독죄

미얀마 남자들은 일생에 한번 이상은 반드시 신쀼의식을 치른다. 부처가 왕자일 때 출가하여 수행했듯이 남자들도 유년기에 단기간 승려 생활을 재현하는 행사이다. 아들이 신쀼의식을 받을 경우, 그 어머니도 함께 공덕을 쌓게 된다고 믿는다. 미얀마에는 ‘종교 모독죄’가 있기도 하다. 불교 관련 시설에 신발을 신거나 짧은 옷차림으로 들어가면 이 죄에 속한다. 불교 관련 이미지를 종교적 목적 외에 사용해도 죄에 속하는데, 부처 문신을 하거나 부처 캐릭터 가방을 드는 등이 이에 해당한다. 종교 모독죄를 저지르면, 구속이나 구금 그리고 강제추방을 당할 수 있다. 이렇게 국민 정서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불교는 미얀마에 깊이 들어와 있다.





5. 소수민족 탄압

(1)로힝야족 사태

불교나라 미얀마에서 이슈가 되는 한 사건이 있다.  스스로는‘미얀마 소수민족’으로, 미얀마 정부에서는 ‘불법 이민자’로 분류하는 로힝야족 탄압이다. 로힝야족은 무슬림으로 인도 동부 언어인 벵골어를 쓰며, 180만~200만 규모로 78년 이전엔 대부분 미얀마 서부와 북부에 살았다.

과거부터 지속적으로 이슈가 된 사건이지만, 아웅산 수지가 집권함에 따라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로힝야족은 인근국가인 방글라데시로 도망가거나 보트피플로 연명하기도 하는 처지이다. 21세기형 홀로코스트(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독일 제국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유태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천1백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이다.) 라고도 불린다.


(2)영국 식민시대 그리고 소수민족

로힝야족 사태는 여러 요소가 겹쳐 만들어졌다. 먼저 영국 식민지 시대를 살펴보자.

영국 식민지 시대 때, 영국 정부와 영국 기독교 선교사들은 미얀마 국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노력했다. 기대와는 다르게 불교가 강한 미얀마, 그중 버마족을 개종시키기는 어려웠다. 영국 정부는 버마족을 견제하기 위해, 산간이나 구석에 사는 소수민족을 개종시켜 미얀마 식민통치 부역자로 사용하였다. 로힝야족은 무슬림이지만 식민통치 부역자로 사용된 종족 중 하나였다.(우리나라 친일파와 비슷하다.)


(3)정치적 이유 : 군부독재가 자행한 불교 사회주의

로힝야족 탄압은 군부독재에서 시작했다. 군부독재자였던 네윈은 버마족과 불교를 우선시하는 ‘버마식 사회주의’, ‘불교 사회주의’를 국정철학으로 내세웠다. 일당독재, 외국인 추방, 등 폐쇄적 요소들이 담긴 그 정책에는 소수민족 탄압도 포함되어 있었다. 1982년, 미얀마 군부가 만든 국적법에서 국민 기준을 영국 통치 이전부터 거주한 민족으로 제한했다. 식민잔재를 청산하겠다는 법이다. 로힝야족은 본인들이 토착민족이라 주장했지만, 결국 외국에서온 이민자로 분류되었다.

1978년, 로힝야족 20만명이 방글라데시로 밀려났다. 91~92년에는 25만명 이상이 쫓겨났고, 그 흐름은 계속되고 있다. 단순히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군부와 로힝야족간 방화, 살인, 강간 등 비인도적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4)종교적 이유 : 소수종교 탄압

민주화가 된 현재에도 로힝야족 탄압은 끊어지지 않았다. 민주화 과정에서 불교와 민족주의가 결합하여 배타적인 소수 종교 탄압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미얀마 불교 자체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일부 과격한 불교 민족주의 단체가 탄압을 행하고 있다. 이는 타임지에도 미얀마 불교 테러리즘의 얼굴 이라는 제목으로 다뤄진 적이 있다. 최근에도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위엄있는 W)가 발표되었다. 극단적 불교 지도자 중 대표적 인물은 ‘아신 위라투’라는 사람이다.


(5) 소수종교 탄압과 기독교

정부군, 불교와 같은 종교, 사회, 정치적 요소들이 결합되어 로힝야족 사태가 발생하였다. 로힝야족은 소수종교 탄압 예시 중 하나일 뿐이다. 미얀마에 사는 기독교인 수십만명이 종교박해를 피해 말레이시아에 난민으로 있다는 기사도 발표되었다.


현재, 실질적인 미얀마 지도자인 아웅산 수찌는 이런 탄압에 대해 특별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는 상황이다.


6. 가난, 영양, 질병

(1)아시아 개발은행 자료 : 가난선과 유아사망률

아시아 개발은행에 참고할 만한 미얀마 자료가 있다. 자료에 따르면, 미얀마 국민 25%가 동아시아 국가빈곤선 아래에 있다.(In Myanmar, 25.6% of the population lives below the national poverty line.), 하루에 태어나는 아이 천명 중 40명은 첫 돌 전에 생을 마감한다.(For every 1,000 babies born in Myanmar, 40 die before their first birthday.)


(2) WFP 자료 : 아동 영양

WFP에서도 참고할 만한 자료가 있다. 아이들 중 35%가 만성영양실조에 의해 성장 둔화 징조를 보인다. 아이들 중 8%는 심각한 급성영양실조에 처해있다. (Undernutrition rates continue to be among the highest in the region. More than 35 percent of children in Myanmar show signs of stunted growth caused by chronic malnutrition, while 8 percent of children are acutely malnourished.)


(3) 식량 안보 불안

이와 같은 가난과 영양 문제는 식량 안보 불안에서 생긴다. 식량안보가 불안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진과 사이클론 등 자연재해가 빈번하기 때문이며, 다른 한 가지는 불안한 내부정세로 인해 많은 내부 유혈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정치, 종교, 사회 문제가 결국 식량안보까지 이어진다.


(4)로힝야족 아동영양

아동 영양상태만 보면, 방글라데시 연안에 사는 소수민족 아이들 상태가 가장 심각하다고 한다. 이는 바로 앞에서 이야기 한, 로힝야족 아이들 이야기이다. 여러 국제기구에서 아이들을 위한 지원을 하려 하나, 미얀마 정부에서는 그런 지원조차 봉쇄하고 있는 실정이다.

관련한 최근 기사를 아래에 인용한다.

“로힝야족 인권단체인 아라칸 프로젝트의 크리스 레와 국장은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고 있다"며 "이런 간접적 희생자들이 정부군에 의해 살해된 이들보다 많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단체에 따르면 미얀마 정부군이 살해한 로힝야족 수는 200명 정도이지만 봉쇄에 따른 지원 부족으로 사망한 어린이수는 무려 1천명에 달한다.

작년 두 마을에서 진행된 조사에 따르면 이 지역에 사는 어린이 1만3천155명 중 3천466명이 심각한 급성영양실조(SAM)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봉쇄로 인해 3천200명의 어린이가 이에 추가될 것으로 우려된다고 신문은 전했다.”

(5) 교육 및 질병

그 외, 다른 문제들도 심각하다. 미얀마 어린이들 중, 약 50%만 초등교육을 마친다.(Coupled with food insecurity, only about half of school age children complete their primary education.)

World Development Indicators(2015)에 의하면 중학교(lower secondary) 입학률이 48.3%, 중학교 수료율이 48.7%이다.

결핵 환자 비율은 아시아에서 제일 높으며, 세계 평균 3배이다.(Tuberculosis (TB) prevalence rates in Myanmar are among the highest in Asia and three times the global average.)  HIV 발생 위기그룹, 특히 마약류 주사가 그 원인인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인 23%가 된다.(HIV prevalence among at-risk groups, especially people who inject drugs, is one of the highest in the world, at 23 percent.)


로힝야족 미얀마 국경이탈 다시 급증세…누적 난민 58만2천명


미얀마 로힝야족이 매일매일 핫이슈이다. 한국에서 검색만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로힝야족 사태를 정리해 보았다.

정치, 종교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일어난 일이며, 아웅산수찌도 이 문제와 연관이 있다.


(1)로힝야족 사태

불교나라 미얀마에서 이슈가 되는 한 사건이 있다.  스스로는‘미얀마 소수민족’으로, 미얀마 정부에서는 ‘불법 이민자’로 분류하는 로힝야족 탄압이다. 로힝야족은 무슬림으로 인도 동부 언어인 벵골어를 쓰며, 180만~200만 규모로 78년 이전엔 대부분 미얀마 서부와 북부에 살았다.

과거부터 지속적으로 이슈가 된 사건이지만, 아웅산 수지가 집권함에 따라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로힝야족은 인근국가인 방글라데시로 도망가거나 보트피플로 연명하기도 하는 처지이다. 21세기형 홀로코스트(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독일 제국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유태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천1백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이다.) 라고도 불린다.


(2)영국 식민시대 그리고 소수민족

로힝야족 사태는 여러 요소가 겹쳐 만들어졌다. 먼저 영국 식민지 시대를 살펴보자.

영국 식민지 시대 때, 영국 정부와 영국 기독교 선교사들은 미얀마 국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노력했다. 기대와는 다르게 불교가 강한 미얀마, 그중 버마족을 개종시키기는 어려웠다. 영국 정부는 버마족을 견제하기 위해, 산간이나 구석에 사는 소수민족을 개종시켜 미얀마 식민통치 부역자로 사용하였다. 로힝야족은 무슬림이지만 식민통치 부역자로 사용된 종족 중 하나였다.(우리나라 친일파와 비슷하다.)


(3)정치적 이유 : 군부독재가 자행한 불교 사회주의

로힝야족 탄압은 군부독재에서 시작했다. 군부독재자였던 네윈은 버마족과 불교를 우선시하는 ‘버마식 사회주의’, ‘불교 사회주의’를 국정철학으로 내세웠다. 일당독재, 외국인 추방, 등 폐쇄적 요소들이 담긴 그 정책에는 소수민족 탄압도 포함되어 있었다. 1982년, 미얀마 군부가 만든 국적법에서 국민 기준을 영국 통치 이전부터 거주한 민족으로 제한했다. 식민잔재를 청산하겠다는 법이다. 로힝야족은 본인들이 토착민족이라 주장했지만, 결국 외국에서온 이민자로 분류되었다.

1978년, 로힝야족 20만명이 방글라데시로 밀려났다. 91~92년에는 25만명 이상이 쫓겨났고, 그 흐름은 계속되고 있다. 단순히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군부와 로힝야족간 방화, 살인, 강간 등 비인도적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4)종교적 이유 : 소수종교 탄압

민주화가 된 현재에도 로힝야족 탄압은 끊어지지 않았다. 민주화 과정에서 불교와 민족주의가 결합하여 배타적인 소수 종교 탄압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미얀마 불교 자체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일부 과격한 불교 민족주의 단체가 탄압을 행하고 있다. 이는 타임지에도 미얀마 불교 테러리즘의 얼굴 이라는 제목으로 다뤄진 적이 있다. 최근에도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위엄있는 W)가 발표되었다. 극단적 불교 지도자 중 대표적 인물은 ‘아신 위라투’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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