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할아버지가 없었던 나에게, 할아버지는 외할아버지 한 분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장애인이셨다. 꼽추셨다. 어릴적 엄마에게 할아버지 등이 왜 저러냐고 물어보니, 엄마는 ‘아파서’그렇다고 대답했다. 나이가 먹고 머리가 커가며 그것이 병이 아닌 장애임을 알아갔지만, 적어도 노틀담의 꼽추에 등장하는 콰지모도는 내게 낯설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침을 놓을줄 아셨다. 어릴 적부터, 시골동네에 많은 사람들이 아픈곳이 있으면 침을 맞으러 찾아왔다. 물론, 돈은 받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불법 의료활동이었을까 싶다. 나도 많이 맞았다.
할아버지는 재활원을 지키는 경비원이셨다. 여름 방학이면, 시골에 놀러가 할아버지가 일하는 곳까지 걸어서 혹은 자전거를 타고 놀러갔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는 교회에 다니는 집사셨다. 집이 없으신 전도사님인지 목사님인지를 방까지 내주며 교회를 돕고 했던... 그런 분이었다. 하지만, 그 목사님이 사고를 치고 도망을 간 이후로는 교회에 가지 않으셨다고 한다. 아마도 도둑질이었던 것 같다. 우리 결혼식 때에야 오랜만에 교회에 발을 들이셨었다. 정말정말 오래된 이야기이다.

첫째 딸은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혈육이 아닌 큰아들은 감옥에 갔다가 지금은 외국으로 도망가 있다. 둘째아들은 연락이 되지 않고, 셋째 아들은 부인 없이 아이들과 살고 있다. 할아버지는 얼마나 가슴아픈 아버지였을까.

언젠가부터, 할아버지는 항상 술을 마셨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술을 마셨다. 특별히 취하거나 기분을 내기 위해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습관처럼 자연스레 마시셨다. 그래서 집에는 항상 빈 소주병이 박스채로 있었다.
그리고 다시 언젠가부터,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하셨다. 나는 기억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언제 왔는지, 가는지, 결혼은 했는지는 더이상 알지도 궁금하지도 않으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아름다운 기억이 하나 있다. 쫙 뻗은 시골길, 옆으로는 논이 펼쳐있고 저 멀리에는 민둥산이 보였다. 할아버지와 나는 뒤에서 걷고 있었고, 사촌동생 예진이는 빨리 오라며 앞에 뛰어가고 있었다. 햇살은 따뜻했고, 바람은 시원했다. 분위기에 취해서였을까, 할아버지에게 건방지게 한마디를 건넸다. “할아버지, 이런게 행복이겠죠?” 할아버지는 어이가 없어서 웃으셨다. 나도 따라 웃으며, 예진이에게 천천히 가라고 외치며 함께 걸었던 길이 아직도 생각난다.

인도 출장중,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슬픈 소식도 빨리 알 수 있는 좋은 세상임을 다시 느낀다.
엄마와 할머니가 지켜보시는 가운데에서 마지막을 맞으셨다 했다. 퇴직은 하셨지만, 늘그막까지 문을 지키시던 마지막 직장인 재활원 장례식장에 모셨다 했다. 들은 것은 이 두가지이다. 한국이었으면, 서울이든 부산이든 밤새 장례식장으로 달려갔겠지만, 그럴수도 없다. 이미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위해, 먼 땅에서 이토록 할수있는 일이 이토록 없나 싶다. 디지털 세상이니, AI가 어쨋느니, 세상의 눈부신 발전이 지금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인다. 다 빛이 바래 보인다.

그래서, 키보드를 잡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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