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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타 사야카 씨의 ‘멀리 갈 수 있는 배’를 읽었다.

​동기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두 가지였다. 그 첫번째는 경험, 이라기보다는 호기심이다. 어떤 호기심이냐 하면 이 작가의 책인 ‘편의점 인간’을 읽어서 든 작가와 그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두번째는 신문 광고였다. 이 작가의 문제작이라는 자극적인 문구와 함께 책의 표지가 실려 있었다. 별 망설임 없이 도서관에 검색을 하고, 예약을 하여 이 책을 읽게 되었다.

​​
내용
세 여자의 이야기이다. 여자라고 하기가 조심스럽다. 주인공들은 그 경계에 서있기도 한 사람들이니까. 아니, 경계 위에 둥둥 떠다닌다고 하는게 조금 더 맞겠다.
한 사람인 ‘리호’는 남자처럼 행동하는 여자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궁금해하며, 방황한다. 아니 어쩌면 답을 찾아가려는 시도를 한다.
둘째는 ‘치카코’이다. 치카코는 자신과 자신 주변의 모든 것이 바로 별의 조각이며 자신도 그의 일부라 여긴다. 치카코의 사랑의 대상은 과연 사람이라는 대상에 국한될 수 있을까. 여성으로 태어났으면 꼭 남성을 사랑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이 아닌, 별을 사랑할 수는 없는가.
셋째는 ‘츠바키’이다. 츠바키는 밤에도 자외선이 있다며 선크림을 바르는 여성이다. 여자, 혹은 여성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찾고 그 예시를 찾는다면 마치 츠바키가 뿅 하고 검색될 것만 같다. 전형적인 커리어 우먼같은 모습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보통의 경우 혹은 소설에서 이런 설정의 캐릭터는 무언가에 얽매어 있을것만 같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유하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확고해보이며 다른 이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담이 없다. 방황하는 리호와 치카코 곁에 어쩐지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있다.
그래서일까, 소설의 목차는 리호와 치카코의 이름으로만 되어있다. 두 사람에 무게를 옮겨가며 소설은 진행되고, 치카코는 그 무게중심에 있다. 이 소설은 이 세명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대화와 사건의 흐름이다. 이 세명은, 혹은 셋중 둘은 자신을 알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실험하고 의심하며 자신과 남을 설득하려 한다.

메모1. “자신의 성을 찾아가는 리호의 모습이 마치 ‘아버지’에 대한 다큐를 찍던 나의 모습인 듯 하다. 나는 이상한 존재일까. 아버지가 있었는데, 있다가 없다는 것이, 지금은 없다느 것이 큰 차이를 가져오는 것일까.
마치 전등빛 같은 것일까. 환히 나를 비추다가도 그 빛을 다하면 거짓말처럼 나도 빛 가운데에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
언제쯤 정상이 아니라는 불안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보고 또 본것들을, 찾아보고 또 찾아본 것들을 뒤적이지만 답은 없고.
위안을 받는 것은 내 주변의 것을 보니 내 윤곽이 어렴풋이 보이므로 나를 알았다고, 그래도 요만큼은 알았다고 자위해본다”



벌써 몇년전의 이야기지만, 학부 졸업작품으로 아버지에 대한 다큐를 찍었다. 제목은 “당신이 있던 자리”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결국 하고싶었던 것은 아버지가 아닌 내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남들보다 조금 일찍 돌아가셨다. ‘아버지 뭐 하시니?’, ‘너희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치디?’라는 영화같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움츠려들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중적이다. 나는 아버지가 있으면서 없었다. 그러면 나는 아버지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있던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정상 범주 내에 없어 보이지만, 나 또한 정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상하지 않고,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다.
다큐를 찍는 내 과정이, 리호와 같다고 생각했다. 겉보기에는 남들과 다를 바 없다. 자신도 분명 어느 성에 속한다는 확신이 있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개념과 사고로는 증명해낼 수가 없다.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리호가 참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메모2. “아주 작지만 확실한 한가지를 확인했을 때의 기쁨”


리호는 끊임없는 실험을 한다. 그러다, 작고 확실한 한가지를 확인하며 기쁨을 느낀다. 아이러니하다. 남들과 다른데 정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기쁨이 든 때는 다른 이들과 나의 공통점을 발견했을 때이다. 이것봐, 나도 그렇다고, 나도 그러니까 정상이라고, 내가 누군지는 헷갈리지만, 이것만은 절대 부정할 수가 없어. 하고 말이다. 그렇게 자신과 타인에게 당당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한가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기쁨을 느낀다.


메모3. “당연한 것을 실험까지 해가며 나 자신에게 설명해야 하는 헛헛함. 그 결과를 확인했을 때에 찾아오는 거부할 수 없는 안도감.”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것.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프다는 것,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마르다는 것. 다섯시간쯤 멈추지 않고 운동하면 힘들다는 것. 이런 것들을 실험까지 해가며 나를 설득해야 한다. 애써 정상이라고 말이다. 더 서글픈 것은, 그 당연한 결과를 확인했을 때에 참으로 거부하기 힘든 안도감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다름의 증거를 찾고 싶었지만, 그들과의 교집합을 확인한다. 결국, 하고싶었던 것은 다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안도가 아니었을까.

메모4. “그때 치카코는 이것이 바로 섹스가 아닐까 생각했다.” ‘S가 갖는 의미, 행위와 그를 받치는 정서적 공감. 둘 중 하나라도 부재하다면 그것은 과연 ‘S’일까?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들은 ‘S’가 아닐지도... 그런데 문득, 그 단어의 의미를 깨닫는다. 우주의 한 조각이 나이며 내가 별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치카코의 마음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위와 같지 않았을까. 남들이 그러하다고 하는 것에 끼워맞추면, 나는 해당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혼란보다는 궁금해하는 그때에, 내가 그 행위에 대해 갖는 의미를 깨닫고, 그것은 순간이라도 내게는 진리가 된다.

메모5. “사람의 삶의 모양은 선도 점도 아닌 입체에 시간이라는 변수가 계속 적용되는 식이다. 마치, 누군가가 내 생 몇개의 점만 보고 이어 나를 판단하듯이.
내가 ‘. . .’ 이런 점을 말하면. 사람들은 ‘.___.___.’점을 이어 ‘나’라고 하겠지. 혹시 아니? ‘.+||._~.’내가 이럴지.
그런 면에서, 리호는 부자연스럽다. 타인이 점을 보고 나를 판단하듯, 리호도 점으로 자신을 증명하게 한다.”


맞다. 리호는 부자연스럽다. 보이지 않는 어떤 형체에 자신을 끼워 맞춰간다. 점과 점 사이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무엇들이 있다. 내 삶은 어느 시점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흐름, 누적, 변화 그리고 지금. 아무리 단어들을 나열해도 나를 어찌 설명할까. 설명했다 라고 인정할 뿐. 다른이에게 나를 설명할 때에 어려운 점(.)이다. 한정된 시간과 단어와 표현으로는 나는 시간의 축에 나라는 점을 점.점. 찍을 수 밖에 없다. 소통의 어려움이 있는 것은 점과 점 사이에 생략된 과정들을 다 보일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리호는 마치 자신이 찍어놓은 점을 타인처럼 바라본다. 답답하지만, 그 부자연스러움이 어찌 보면 이해가 간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이해 선상에 놓지 못했을테니...

정리 : 감상
단순히 성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성이라는 것을 두고 일어나는 일이지만, 남성과 여성의 대립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보이는 것은 존재의 대립이며, 증명의 치열함이다. 등장인물들이 어찌보면 조금 답답하고,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다. 설정을 유지하려다보니 로봇처럼 캐릭터가 딱딱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내가 보였다. 싫어도 보였다. 남들이 그렇다고 하는 것과 내가 그렇다고 하는것, 실제로 그런것과 그렇다고 믿고싶은 것. 그 안개를 걷어내지는 못했지만, 잠시 고개를 들이밀고 그 안을 훑은 느낌이다. 아마, 작가 안에 있는 여러 고민들이 누군가가 볼 때에는 ‘자극적이고’, ‘미친(크레이지 사야카 라는 별명처럼)’듯이 보이는 자연스러움으로 써낸듯하다. 완벽하지 않고 미완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더 친근감이 든다. 그 또한 나의 모습과 닮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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