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봉사활동에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여기저기에 봉사를 다니기도 했지만, 의미있는 봉사활동 콘텐츠를 준비하는 일에도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연평도에 들어가 벽화를 그렸던 활동이었습니다. 제 아이디어라든가 제가 다 준비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준비와 진행 작은 구석까지도 제 기억속에 남아 있습니다. 섬에 미리 들어가 면장님과 군 담당자 주민 대표분과 만나 일정과 과정을 논의하고, 대학생들이 섬에 들어왔을 때 어디에서 잘 수 있는지, 식사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를 하나하나 뛰어다니며 고민했습니다. 결국, 시설이 잘 갖춰진 방공호에서 잠을 해결했고 성당 식당을 빌려 조리와 식사를 했습니다. 연평도 어디에 어떤 벽화를 그리면 좋을지, 특히 벽화가 필요한 어두운 곳은 어디가 있는지, 정말 그곳에 살다시피하며 구석구석 돌아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저도 대학생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준비과정 가운데에 참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페인트를 후원받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여러 페인트 회사에 전화를 겁니다. 담당자와 바로 연결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사회공헌팀 혹은 홍보팀 그마저도 없으면 대외협력 업무를 맞는 담당자를 묻고 사정하여 통화를 연결합니다. 우리가 무얼 하려는지 설명하고, 벽화에 사용할 페인트를 후원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묻습니다. 당연히, 바로 답을 받지 못합니다. 메일로 자료를 보내달라는 말을 듣고 전화를 끊습니다. 나름 상세하게 내용을 정리해서 메일을 보내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참 힘듭니다. 과연 메일은 읽었을까, 어디까지 이야기가 되었을까, 혹시나 안되도 전화는 주기는 할까, 연락오기 전에 먼저 전화하면 실례겠지. 여러 생각이 들어 더 힘들기도 했습니다. 거절 메일은 익숙했습니다. 거절 전화도 익숙했습니다. 나름 사회인이 된 지금에야 ‘후원’이라는 것이 기업 입장에서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조금은 더 공감하게 됩니다.

참 마음이 어렵던 중에, 굉장히 적극적이고 빠른 피드백을 주는 회사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조광페인트’라는 곳이었습니다. 다른 곳은 저의 전화를 받고 요청을 처리하는 것이 ‘업무’처럼 느껴졌는데, 이 회사는 좀 달랐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고 좋은 일이라면 돕고싶다는 말을 하고, 빨리 논의해서 알려주겠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물론, 메일로도 정리된 자료를 보냈구요. 며칠이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습니다. 후원해주겠다고 말입니다. 어떤 회사는 홍보효과까지 정리해서 보내달라는 곳도 있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 정말 당연한 요청입니다.(저라면 더한 요청도 했을것 같습니다.) 언론에 홍보되었던 사실과 어쩌면 거짓말이 될지 모르는 기대효과를 적으면서도 참 뭐하는것인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조광페인트에서는 그냥 사진만 몇장 잘 찍어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 피드백도 얼마나 고맙던지요. 날지 안날지도 모르는 기사가 날거라고 자료를 보내는 제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지요.

덕분에 연평도 벽화 봉사활동을 무사히 잘 마칠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페인트 뿐 아니라 보이고 보이지 않는 부분에 정말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페인트에 대한 기억만은 유독 저에게 진합니다. 이후에도, 조광페인트가 참 이곳저곳 사회공헌활동을 많이 하는 소식을 SNS를 통해 듣습니다. 그 때마다 고마움이 떠오르고, 저 소식들이 그저 홍보글은 아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듭니다.

SNS에 조광페인트가 72주년을 맞이했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어제의 일입니다. “ㅇㅇ회사가 ㅇㅇ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축하해주세요!”하는 상투적인 소식들은 너무 많지만, 조광페인트의 72주년은 정말 감사하고 축하해주고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소식이 올라올 때마다, 그때가 생각납니다. 참 감사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더라도, 이렇게나마 감사를 남깁니다.



도서관에 갔습니다. 석양이 비칠때쯤, 춥지만 아직은 빨간 시간이었습니다.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책을 5권 또 빌렸습니다. 대출권수가 5권으로 제한되어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욕심대로 책을 한움큼 빌려 왔겠지요. 마치 이정도는 다 읽어버릴듯이 말이지요. 허나, 언제나 그렇듯 빌린 책을 다 정독하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책을 만지고 머릿글이라도 읽고 내용을 훑는 재미와 기쁨이 항상 있습니다.

첫번쨰로 빌린 책은,
서영인씨의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입니다. 사야카의 ‘멀리 갈 수 있는 배’를 빌려 읽었습니다. 그런데, 책 사이에 작은 자료위치안내표(?)가 있었습니다. 그 표에 적힌 것이 이 책이었습니다. 나와 같은 책을 대여한 누군가가 찾아본 책. 한번 읽어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알까요. 취향에 맞을지요. 사실, 작가님의 성함도 책 제목도 처음 듣는 책입니다. 빌려서 잠시 안을 들여다보니, 망원동에 관한 내용입니다. 반년 전까지만해도 저 또한 망원동에 살았기에,(지금도 사실 그 옆동네에 삽니다.) 책에 나오는 지명들과 가게들은 저희집 앞마당과 같았습니다.

둘째와 셋째 책은
​​이어령 선생님의 ‘읽고 싶은 이어령’, ‘언어로 세운 집’ 입니다. 선생님의 ‘지의 최전선’, ‘지성에서 영성으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읽은적이 있습니다. 무슨 성(性) 이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성, 감성, 영성 등등입니다. 그러한 성들은 정말 굳게 닫힌 성(城)처럼 구분되는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서로 침범해서도 안되고, 그 순간 서로를 무너뜨린다거나 양쪽이 민망하게되지는 않을까 하는 개념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어령 선생님의 글을 읽고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날카로운 지성인듯 싶으나, 다시보니 세밀한 감성으로, 조금 더 고민하니 숭고한 영성으로 다가오는 글들이 많았습니다. ‘읽고 싶은 이어령’은 이어령 선생님을 읽어보고 싶어서 집었습니다. 그 앞의 부제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지성에게’ 저는 지성이 아니지만 지성이고 싶었나봅니다. ‘언어로 세운 집’은 한국시를 기호학으로 풀어낸 책입니다. 시를 읽고 싶었고, 해석의 도움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 도움주는 분이 이어령 선생님이라니요.

넷째는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입니다. 이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신비하게 시청했던 기억이 납니다. 원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는 빌려보리라 마음 먹고 있던 책입니다. 도서관을 나가려다 우연히 ‘예언자’가 눈으로 꽂혀 집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다섯째는
​​유발 하라리의 ‘대담한 작전’입니다. 사피엔스 혹은 호모데우스 등등 그 유명한 책들을 사실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유명한 책들은 누가 선물해주지 않는 이상 급하게 보지 않는 편입니다.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는 책 중, 유발하라리 것은 이 책이 유일했습니다. 그 대단한 책들도 이 작가가 쓴 것이지요. 작가의 맛을 볼 수 있을것이라 생각하여 빌렸습니다.

모두 리뷰를 쓸 수 있을까는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손에 잡히는 대로 보이는대로 읽어봐야겠습니다:)



동기

고영성씨가 쓰신 ‘어떻게 읽을 것인가’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요즈음은 책을 어떻게 읽을까에 대해 고민을 하는 시기입니다. 책에 대한 리뷰를 본격적으로 써보려 합니다. 된다면 영상 콘텐츠도 새로 만들까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평소에 책을 좋아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읽었고,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자주 많이 책을 보는 편입니다. 주변의 인식도 그러했습니다. 책 선물도 많이 하는 편이구요. 그런데, 막상 책을 주제로 하는 콘텐츠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니 막막함이 들었습니다. 사실, 체계적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혼자만의 만족만으로 책을 읽고 있던 것이지요.

내가 무얼 느끼고 있던 것일까. 나는 왜 감동을 받았을까.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할 가치나 있는 내용이 내게 있던 것일까 하는 반성들이 들게 되었습니다. 동네에 있는 도서관에 갔습니다. 대학 도서관이 아니니 책의 종류는 많지 않았지만, 제목이 눈에 익은 책들이 몇권 있었습니다. 고영성씨의 책은 그중 하나였습니다. 책을 어떻게 읽을까. 내가 제대로 읽어왔던 것인가? 하는 질문을 품어왔던 저에게,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책일까? 하는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책 한권을 볼 때에 어떻게 봐야 할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원했습니다. 그 답을 열어보기 위해 책을 집게 되었습니다.




내용

책에는 총 10가지의 독법을 말합니다. 독법이라 말하면 정확치 않은데, ‘읽는 형태’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읽음의 대상은 꼭 책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독아 : 나를 읽다.

먼저, 나를 읽는 ‘독아’를 이야기합니다. 내가 책을 읽어서 뭐 변화라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답입니다. 우리 뇌는 성장하고, 독서를 통해서 변화할 수 있다. 라는 말을 여러 과학적 근거를 들어 설명합니다.


(2)다독 : 많이 읽다.

다음은 다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뇌는 많이 읽는 것에 적응할 수 있다. 다독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을텐데 그 중 하나로 계독이 있다. 계독이란, 한 분야를 가지고 여러 책을 두루 읽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학부 졸업논문을 쓸 때에 한 인물에 대해 언급이라도 된 책은 모조리 옆에 쌓아놓고 읽으면 정보를 모았던 기억이 납니다. 뿐만 아니라,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그 자리에 가면 해당분야 책이 모여있지요. 그러면 원래 빌리려고 했던 책 외에도 끌리는 책들을 여러권 쓸어서 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면, 내가 원하는 정보들을 더 입체적으로 얻기가 용이하지요. 단어를 알지는 못했지만, 내가 하던 것이 ‘계독’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하고 이해했습니다.


(3)남독 : 다양하게 읽다.

다독의 다른 한 갈래는 남독입니다. 남독은 계독과 달리 한 분야가 아닌 여러 분야의 책을 읽는 것입니다. 남독을 하면 비판력과 창의력 그리고 관대함(이해력)이 길러진다고 합니다. 남독은 여러 아이디어와 개념을 알고 이으며 사고할 수 있게 하는데 그로부터 바로 창의성이 나오고, 누군가의 의견의 옳고 그름 혹은 넓이와 깊이를 재어가며 읽을 수 있으니 비판력이 길러지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내가 얼마나 편협하고 잘 모르고 있었는지를 알게되니 관대함(이해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바꿔 말하면, 좁은 범위만 많이 읽는 편독은 오히려 오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계독을 잘못하면 편독이겠지요?)


(4)만독 : 느리게 읽다.

다음은 느리게 읽기를 뜻하는 만독입니다. 단순히 물리적 시간을 늘여 천천히 읽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책 한권의 내용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읽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한권을 가지고 반년을 읽는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책 한권에 있는 단어, 사건, 배경 등등에 대해서 그냥 지나가지 않고 하나씩 공부해가며 읽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근대 소설을 한편 읽는다면, 그 소설 주인공과 주변인물의 직업, 말투, 살던곳에 대해서 공부를 해가며 읽는다면 소설 한권으로 한국 근대를 꿰뚫을 수 있겠지요?

고등학생 시절을 생각해봐도 적용이 될듯 합니다. 여러 문제집을 풀지 말고, 한 문제집을 반복해서 풀라는 말이 기억납니다. 문제를 암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문제집에 있는 개념들만 잘 정리하면 다량을 푸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된다는 맥락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동의가 되는 말입니다.


(5) 관독 : 관점을 갖고 읽다.

다음은 관독입니다. 관점을 가지고 읽는다는 뜻입니다. 책을 쓰는 사람의 관점을 받아들여 읽기도 하는 것이고, 내가 특정 관점을 가지고 읽기도 하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예를들어.. 나는 진화론에 반대하지만, 일단 찰스다윈의 진화론적 관점을 받아들이고 읽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오히려 진화론을 한번 까보려는 관점을 가지고 그 책을 읽을 수도 있겠지요. 저자님의 경우에는 그냥 책을 읽을 때보다 서평을 쓸 목적으로 책을 읽으면, 책의 구조가 더 잘 보인다고 말하며 관독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주의해야할 점은 특정 관점에만 집중해서 보고싶은것만 보게 되는 터널링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단어로 이해하면 ‘확증편향’된 관점으로 책을 읽게 된다고 할 수 있을듯 합니다.


(6) 재독 : 다시 읽다.

다음은 재독입니다. 말 그대로 다시 읽는 것입니다. 

재독이 가지는 기능으로 크게 두가지를 말합니다. 그 첫번째는 옛 추억으로 우리를 돌려놓는 것인데요.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안정감에 들게 하지요. 옛 친구들을 만나는 것 처럼요. 이는 ‘건강한 방어기제’를 형성해준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방어기제라 하면 부정적인 단어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맞딱뜨리면 동굴에 숨어버리는 것처럼 현실을 피하려는 어떠한 시도를 다 방어기제라고 하며, '안좋은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독이 ‘건강한 방어기제’를 형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려움에 맞딱뜨렸을 때에 중요한 것은 그 어려움의 크기보다 어떻게 대처하는냐가 중요하다고 하는데요. 재독이 바로 그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함으로 건강한 방어기제를 만들어준다는 것이지요. 어렵고 힘들 때 읽고싶은 책이 있지요. 꼭 희망을 주는 내용의 책이 아니더라도 읽고 싶어지는 책이 가끔 있습니다.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건강한 방어기제를 저도 모르게 찾고있던 것이네요.

한가지 다른 기능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재독이란 다시 읽는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하는 생각과 내일의 내가 하는 생각이 정확히 같지는 않습니다.  책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겠지요. 예전에는 명저라 느꼈던 것이 다시보니 졸작인 것이 있을테구요. 예전에는 별뜻 모르고 읽었는데, 다시읽고 또 읽을수록 깨달음이 생기는 책이 있을 수 있겠지요. 단순히 책에 대한 깨달음을 넘어, 작가님이 주목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책을 읽는 ‘나’의 변화라고 하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다시읽기 : 재독이 주는 효용이라고 합니다. 


(7) 필독 : 쓰면서 읽다.

다음은 필독입니다. 필독은 말 그대로 쓰면서 읽는 것입니다. 밑줄을 긋고, 그은 밑줄에 대한 생각과 감상을 남기고, 더 나아가서는 읽은 부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남기면서 읽는 것을 말합니다. 작가님은 이 단계가 단순히 독서가에서 필사가로 나아가 작가가 되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책 읽기는 확실히 매력이 있습니다. 읽다가 깨닫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이 나를 변화시킬 것이라 믿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막상 책을 덮고 나면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는듯도 합니다. 아련한 옛사랑의 추억인양.. 어느 부분에서 감명깊었고, 그 부분에 대해 조금 더 묵상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간혹 듭니다. 그런데, 그런 깨달음이 들 때에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그때 그때 글로 적어놓으면 기억에 남을 뿐더러 깨달음의 내용이 더 구체적이게 됩니다. 물론, 독서의 흐름이 끊길 수 있으며 읽는 속도는 느려지지요. 일장일단이 있지만, 책 한권을 잘 씹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독법이 아닐까 합니다.


(8) 낭독 : 소리 내어 읽다.

이어서 낭독을 말합니다. 낭독은 말 그대로 말로 읽는 것입니다. 구술문화와 언어문화를 비교하며 낭독의 효용성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또한, 낭독을 통해 독서모임과 같이 사회적으로 함께 독서를 하는 효용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9) 난독 : 어렵게 읽다. 

작가가 다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난독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단순히 머리 싸매고 끙끙대며 읽는 어렵게 읽기가 아닙니다. 작가님이 말하는 난독은 사실 읽기 방법이라기보다는 극복해야할 독서의 유형입니다. 난독은 말 그대로 읽기가 어렵다 라는 뜻입니다. 인터넷 시대, 동영상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실  ‘읽기’라는 것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인터넷 기사로 몇페이지를 읽었어도 그 내용을 나중에 확인해 보았을 때에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상이나 감상을 남길 수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 글의 내용으로 들어갔을 때에 대화가 어렵다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까지 가지 않더라도 저의 경우도 해당이 됩니다. 인터넷으로 무언가를 읽을 때에 무언가 어려움 없이 슥슥 읽힌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할 때면 컽만 알고 있고 알맹이에 대해서는 무지한 경우가 많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난독 또한 쉽지 않지만 극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여러 과학적 근거들을 책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0) 엄독 : 책을 덮으며 읽다.

마지막,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독서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바로 엄독입니다. 엄독은 책을 덮는 것입니다. 책에서 느낀것들 생각한 것들을 가지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책을 읽은 후에, 잠을 자기도 하고, 산책을 하기도 하며 내용을 소화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 꿈을 꾸기도 하고 미래를 그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바로 작가가 말하는 ‘어떻게 읽을까?’에 대한 나름의 답입니다.



감상 & 아쉬운 점

책을 읽으면서, 사실 갸우뚱 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책 내용이 이상하다거나 내용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책을 읽기 전 기대한 내용과는 살짝 다른 방향성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말 그대로 책을 읽을 때에 어떻게 읽을까에 대한 의문과 답을 기대하며 책을 읽었습니다. 예를들어, 작가의 배경에 대해 알아봐라. 책은 작가의 생각과 사상 환경이 만들어낸 고민의 결론이다. 그리고 목차를 봐라. 이런 식으로 '책'에 집중된 내용을 기대했습니다.(뻔히 아는 내용이더라도) 그런데 작가님의 내용은 사실 책보다 '사람'에 무게를 두고 있었습니다. 책의 내용을 취하고 더 느끼는 방법이라기보다는, 그 책을 읽는 사람이 취하는 방식에 대한 분류와 분석을 해놓으셨습니다.


책 제목을 섹시하지는 않지만 알아듣기 쉽게 다시 써보면... 
"독서 유형의 분류와 분석 ; 그렇다면 '너'는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라고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저는, 부족해서인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창의력을 기르기 위해서 남독을 한다든가, 갑자기 독서클럽에 들어가 낭독을(의미적으로)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오히려 기대하지 않은 부분에서 배운 것들이 많았습니다. 이 책, 저 책을 읽다가 또 보기도 하고, 천천히 보기도 하고, 다른 분야를 읽었다가, 관심있는 분야를 갑자기 파기도 하는 것이 제 독서라이프(?)였습니다. 잘 모르고 그렇게 했는데, 이제는 그 행동과 습관들이 가지는 각각의 의미들을 조금 더 알고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어려운데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사람입니다. 아마 이 글을 읽고있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시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람인 것은 알지만 '사람'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참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역사, 정치, 경제, 생물, 화학 등등을 배우며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이지요.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파진다는 것은 알았지만, 배움으로써 그 이유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됩니다. 맞으면 왜 아픈지,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구하고 싶긴 했는데 그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여러 실마리를 배우기도 합니다. 그렇게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데요. 이 책이 마치 '독서'라는 존재에 대해서 대답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형식으로든 책을 읽고, 즐거움과 유익을 얻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어떻게 읽을 때에 어떤 유익을 얻는지는 경험적으로만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애소설을 읽으면 기분이 좋다든가, 판타지를 읽으면 짜릿해지고, 시를 읽으면 차분해지고, 혹은 읽고나서 기억에 남는 책들을 나도 모르게 펴게 된다든가 하며 말입니다. 이 책은 그 독서법(?)을 분류하고 분석하여 내가 여태껏 어떤 독서습관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효과를 받았겠구나, 그러면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도 읽어봐야겠다 하는 가이드 역할을 하는 책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책 마지막에 소개된 버지니아 울프가 꿨던 꿈을 적으며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나는 간혹 이런 꿈을 꿀 때가 있다. 최후의 심판일이 동터 오고 위대한 정복자들과 변호사들과 정치인들이 각자의 대가 - 불멸의 대리석에 지워지지 않게 새겨진 그들의 왕관과 월계수와 이름 - 를 받게 된다. 하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오는 모습을 지켜볼 때, 그는 베드로 쪽으로 몸을 돌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봐, 이들에게는 포상이 필요 없어. 그들에게는 줄 것이 없어. 그들은 책 읽기를 사랑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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