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에 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도시를 등지고 시선은 안개 낀 바다를 향합니다. 그 안개를 헤치고, 한 배가 들어옵니다. 배가 안개를 열듯, 그를 보는 남자의 마음도 열립니다. 그 안에 잠자던 기쁨이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펼칩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알무스타파’ 신의 선택을 입은 자이자 신의 사랑을 받은 자. 그는 예언자입니다. 신의 사랑을 받아 모든 것을 알지만, 함부로 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아마도 이런 사람이 있다면, 예언자라는 말은 참 잘 어울립니다.


 배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입니다. 배가 왔으니 떠나야 합니다. 그가 있는 곳은 오팔리즈, 이곳에서 열두해를 있었습니다. 이곳에 있던 시간만큼 고향으로 가는 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언덕을 내려와 도시로 향하자 슬픔이 밀려옵니다. 기쁜 것은 고향으로 향하는 것이며 슬픈 것은 있던 곳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곳을 어찌 떠날 수 있을까요. 이 도시 거리마다 자신의 것을 쪼갠 영혼의 조각들을 뿌려놓았고, 간절한 바람이 퍼져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떠나는 것이 아픈 이유는 사랑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떠나야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남는다는 것은 가질 수 없는 것을 탐내는 것이며, 틀안에 자신을 가두어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도시로 퍼집니다. 집에서 집으로, 들판에서 들판으로 외침이 들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기에 말입니다. 그 외침은 필사적이었을수도 있겠습니다. 예언자는 중얼거립니다. 이별의 날이 만남의 날이 되어야 하는가. 이별은 만남으로 완성됩니다. 이별 또한, 관계의 한 형태이기에.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이 만약 수확의 날이라면, 내가 뿌린것은 무엇이었을까. 예언자는 결심합니다. 나의 등불을 높이 들어야 할 때이구나. 하지만, 내가 든 등불은 공허하고 또 어둡다. 등은 나의 것일지언정, 그 안에 불타는 것은 밤의 수호자가 기름을 채우고 불을 켜야 한다. 등을 든 나의 손이 공허하지 않도록.


 예언자는 도시 안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모여 있었습니다. 마치, 신약성서에서 오병이어 사건이라 기록되는 그때처럼 말입니다. 예수가 그 자리에 도달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갈망함으로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목자 잃은 양같으니 가엽다고 하였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사랑이라고 부를수 있음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의 영과 육은 채움받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목소리를 냅니다. 사랑과 아쉬움의 언어였습니다. 목소리는 다르지만 마음은 같았겠지요. 그때 성스러운 사원에서 한 선지자가 걸어 나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알미트라입니다.

 알미트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말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과 소망은 당신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요. 당신이 기억하는 나라와 고향에 있는 소망이 얼마나 간절하며 그리운 것인지를요. 허나, 마지막 부탁이 있습니다. 진리를 전해 주십시오. 우리는 그것을 또 전할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그 아이들은 다시 다음 세대에게 말입니다. 그대는 우리를 알지 않습니까. 우리의 눈물을 보았고, 우리의 웃음을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삶을 또 죽음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 사이에서 당신이 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알기를 원합니다.


 예언자는 말합니다. 오팔리즈 시민들이여, 내가 무슨 말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지금 그대들의 영혼 속에 살아 움직이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


 그렇게, 이별을 위한 만남이 시작됩니다.

선지자 알미트라는 사랑을 묻습니다.

알미트라는 다시 결혼을 묻습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이 아이들에 대해 묻습니다.

부유한 자가 주는 것을 묻습니다.

여관을 꾸리는 노인이 먹고 마심을 묻습니다.

농사꾼이 일에 대하여 묻습니다.

여인이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묻습니다.

석공이 집에 대하여 묻습니다.

베 짜는 직공이 옷에 대하여 묻습니다.

상인이 사고파는 일에 대하여 묻습니다.

도시의 재판관이 죄와 벌에 대하여 묻습니다.

법률가가 우리네 법에 대하여 묻습니다.

웅변가가 자유에 대하여 묻습니다.

여사제가 다시 이성과 열정에 대하여 묻습니다.

여인이 고통에 대하여 묻습니다.

남자가 자아를 아는 것에 대해 묻습니다.

교사가 가르치는 것에 대해 묻습니다.

젊은이가 우정에 대하여 묻습니다.

학자가 말하는 것에 대해 묻습니다.

천문학자가 시간에 대하여 묻습니다.

도시 원로들 가운데 한명이 선과 악에 대하여 묻습니다.

여사제가 기도에 대하여 묻습니다.

해마다 한 번씩 도시를 찾는 은자가 나와 즐거움에 대하여 묻습니다.

시인이 아름다움에 대해 묻습니다.

나이든 사제가 종교에 대해 묻습니다.

알미트라가 죽음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저녁이 되고, 이별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선지자 알미트라가 말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지금껏 말씀하신 그대의 영혼에 축복이 있기를. 이에 예언자는 답합니다. 내가 과연 말하는 자였을까. 나 또한 여러분과 함께 듣는 자가 아니었나. 예언자는 질문하는 자들이 이미 생각으로 아는 것을 말로 옮기기만 했을지 모릅니다.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배와 선장은 말이 없었습니다. 돛은 팔락이고 닻은 올라올 준비를 마쳤습니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모든 것들이 예언자가 침묵에 이르기를 각자의 묵묵함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말합니다. 작별의 날조차 지나갔다고 말입니다. 정말 떠나야할 때가 왔습니다.


 배가 동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울음은 마치 한 가슴에서 나오는듯 했습니다. 울음이 그치고, 사람들이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을 때까지 한 사람이 남아있었습니다. 알미트라였습니다. 알미트라는 홀로 방파제 위에서 그가 남긴 말 중, 그저 한 마디를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잠시만 있으면 바람결에 한숨을 돌리다가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을 것입니다.





 고통이란 깨달음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이 부서지는 것과 같으며, 즐거움은 자유의 노래이나 자유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어찌 다른 말로 풀어놓을 수 있을까요. 책을 한번 읽고나서 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다시 한번 읽는것 뿐이었습니다.


 하루 남짓한 이 이야기는, 마치 예언자의 일생을 본듯합니다. 도착하여 사명을 다하고 떠나는 이야기. 태어나고 살며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사람들이 한 질문과, 그 사람들의 관계가 묘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에 대해, 교사가 가르치는 것에 대해, 법률가가 법에 대해 묻습니다. 가장 잘 답할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묻습니다. 아마도, 질문을 할 수 있을때까지는 언제까지라도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질것 같습니다. 답은 각자 안에 있었겠지요. 다만 흩어져 모호했을 뿐, 예언자가 언어의 틀로 잠시 형체를 갖춰놓았지만 시간이 다시 형체를 흩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질문을 해야할 때가 오겠지요.다르지만 틀리지 않은 답을 다시 얻을 수 있을것만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문득 썼습니다. 하루의 시작에 예언자의 마지막을 다시 보았습니다. 허나 예언자가 그랬듯 이 마지막으로 시작할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답보다는 질문을 찾아야겠습니다. 묻고싶은 것을 찾았을 때, 이미 답은 제 안에 있겠지요. 물론, 그 답을 찾아가는데에는 적지 않는 시간이 들겠지만. 혹시 압니까. 잠시만 있으면 바람결에 한숨을 돌리다가 또 다른 여인이 그 답을 낳을지요.




도서관에 갔습니다. 석양이 비칠때쯤, 춥지만 아직은 빨간 시간이었습니다.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책을 5권 또 빌렸습니다. 대출권수가 5권으로 제한되어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욕심대로 책을 한움큼 빌려 왔겠지요. 마치 이정도는 다 읽어버릴듯이 말이지요. 허나, 언제나 그렇듯 빌린 책을 다 정독하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책을 만지고 머릿글이라도 읽고 내용을 훑는 재미와 기쁨이 항상 있습니다.

첫번쨰로 빌린 책은,
서영인씨의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입니다. 사야카의 ‘멀리 갈 수 있는 배’를 빌려 읽었습니다. 그런데, 책 사이에 작은 자료위치안내표(?)가 있었습니다. 그 표에 적힌 것이 이 책이었습니다. 나와 같은 책을 대여한 누군가가 찾아본 책. 한번 읽어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알까요. 취향에 맞을지요. 사실, 작가님의 성함도 책 제목도 처음 듣는 책입니다. 빌려서 잠시 안을 들여다보니, 망원동에 관한 내용입니다. 반년 전까지만해도 저 또한 망원동에 살았기에,(지금도 사실 그 옆동네에 삽니다.) 책에 나오는 지명들과 가게들은 저희집 앞마당과 같았습니다.

둘째와 셋째 책은
​​이어령 선생님의 ‘읽고 싶은 이어령’, ‘언어로 세운 집’ 입니다. 선생님의 ‘지의 최전선’, ‘지성에서 영성으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읽은적이 있습니다. 무슨 성(性) 이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성, 감성, 영성 등등입니다. 그러한 성들은 정말 굳게 닫힌 성(城)처럼 구분되는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서로 침범해서도 안되고, 그 순간 서로를 무너뜨린다거나 양쪽이 민망하게되지는 않을까 하는 개념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어령 선생님의 글을 읽고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날카로운 지성인듯 싶으나, 다시보니 세밀한 감성으로, 조금 더 고민하니 숭고한 영성으로 다가오는 글들이 많았습니다. ‘읽고 싶은 이어령’은 이어령 선생님을 읽어보고 싶어서 집었습니다. 그 앞의 부제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지성에게’ 저는 지성이 아니지만 지성이고 싶었나봅니다. ‘언어로 세운 집’은 한국시를 기호학으로 풀어낸 책입니다. 시를 읽고 싶었고, 해석의 도움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 도움주는 분이 이어령 선생님이라니요.

넷째는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입니다. 이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신비하게 시청했던 기억이 납니다. 원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는 빌려보리라 마음 먹고 있던 책입니다. 도서관을 나가려다 우연히 ‘예언자’가 눈으로 꽂혀 집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다섯째는
​​유발 하라리의 ‘대담한 작전’입니다. 사피엔스 혹은 호모데우스 등등 그 유명한 책들을 사실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유명한 책들은 누가 선물해주지 않는 이상 급하게 보지 않는 편입니다.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는 책 중, 유발하라리 것은 이 책이 유일했습니다. 그 대단한 책들도 이 작가가 쓴 것이지요. 작가의 맛을 볼 수 있을것이라 생각하여 빌렸습니다.

모두 리뷰를 쓸 수 있을까는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손에 잡히는 대로 보이는대로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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