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봉사활동에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여기저기에 봉사를 다니기도 했지만, 의미있는 봉사활동 콘텐츠를 준비하는 일에도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연평도에 들어가 벽화를 그렸던 활동이었습니다. 제 아이디어라든가 제가 다 준비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준비와 진행 작은 구석까지도 제 기억속에 남아 있습니다. 섬에 미리 들어가 면장님과 군 담당자 주민 대표분과 만나 일정과 과정을 논의하고, 대학생들이 섬에 들어왔을 때 어디에서 잘 수 있는지, 식사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를 하나하나 뛰어다니며 고민했습니다. 결국, 시설이 잘 갖춰진 방공호에서 잠을 해결했고 성당 식당을 빌려 조리와 식사를 했습니다. 연평도 어디에 어떤 벽화를 그리면 좋을지, 특히 벽화가 필요한 어두운 곳은 어디가 있는지, 정말 그곳에 살다시피하며 구석구석 돌아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저도 대학생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준비과정 가운데에 참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페인트를 후원받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여러 페인트 회사에 전화를 겁니다. 담당자와 바로 연결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사회공헌팀 혹은 홍보팀 그마저도 없으면 대외협력 업무를 맞는 담당자를 묻고 사정하여 통화를 연결합니다. 우리가 무얼 하려는지 설명하고, 벽화에 사용할 페인트를 후원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묻습니다. 당연히, 바로 답을 받지 못합니다. 메일로 자료를 보내달라는 말을 듣고 전화를 끊습니다. 나름 상세하게 내용을 정리해서 메일을 보내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참 힘듭니다. 과연 메일은 읽었을까, 어디까지 이야기가 되었을까, 혹시나 안되도 전화는 주기는 할까, 연락오기 전에 먼저 전화하면 실례겠지. 여러 생각이 들어 더 힘들기도 했습니다. 거절 메일은 익숙했습니다. 거절 전화도 익숙했습니다. 나름 사회인이 된 지금에야 ‘후원’이라는 것이 기업 입장에서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조금은 더 공감하게 됩니다.

참 마음이 어렵던 중에, 굉장히 적극적이고 빠른 피드백을 주는 회사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조광페인트’라는 곳이었습니다. 다른 곳은 저의 전화를 받고 요청을 처리하는 것이 ‘업무’처럼 느껴졌는데, 이 회사는 좀 달랐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고 좋은 일이라면 돕고싶다는 말을 하고, 빨리 논의해서 알려주겠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물론, 메일로도 정리된 자료를 보냈구요. 며칠이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습니다. 후원해주겠다고 말입니다. 어떤 회사는 홍보효과까지 정리해서 보내달라는 곳도 있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 정말 당연한 요청입니다.(저라면 더한 요청도 했을것 같습니다.) 언론에 홍보되었던 사실과 어쩌면 거짓말이 될지 모르는 기대효과를 적으면서도 참 뭐하는것인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조광페인트에서는 그냥 사진만 몇장 잘 찍어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 피드백도 얼마나 고맙던지요. 날지 안날지도 모르는 기사가 날거라고 자료를 보내는 제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지요.

덕분에 연평도 벽화 봉사활동을 무사히 잘 마칠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페인트 뿐 아니라 보이고 보이지 않는 부분에 정말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페인트에 대한 기억만은 유독 저에게 진합니다. 이후에도, 조광페인트가 참 이곳저곳 사회공헌활동을 많이 하는 소식을 SNS를 통해 듣습니다. 그 때마다 고마움이 떠오르고, 저 소식들이 그저 홍보글은 아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듭니다.

SNS에 조광페인트가 72주년을 맞이했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어제의 일입니다. “ㅇㅇ회사가 ㅇㅇ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축하해주세요!”하는 상투적인 소식들은 너무 많지만, 조광페인트의 72주년은 정말 감사하고 축하해주고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소식이 올라올 때마다, 그때가 생각납니다. 참 감사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더라도, 이렇게나마 감사를 남깁니다.

 새벽 5 50, 어제 맞춰놓았던 알람인 것도 잊고 인상을 찌뿌렸다. 맞다. 일어나야 한다. 꿈에서 현실로 얼떨결에 돌아온 나는 불을 켜고 샤워실 들어가 다시 그 뜨겁고 떨어지는 안으로 들어갔다. 샴푸와 바디워시는 한두번 쓸 양 만큼만 비치되어 있었다. 혹여나 내 몸에 조금의 더러운 것이 남아 있을까봐,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샴푸와 바디워시를 필요 이상으로 짜내 사용한다.

 

 씻으니 정신이 들어, 어제 미처 싸지 못한 짐을 싸기 시작한다. 짐은 때로 사람같다. 반가울 때가 있지만, 성가실 때가 있다. 가족과 나를 위한 짐은 가벼워도, 누군가가 맡긴 짐은 무겁다. 댓가없는 책임의 무게일 것이다. 아는 사람의 지인의 짐을 다시 또 그 지인의 아는 사람의 관계자에게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부탁이지만 거절하기는 어렵다. 불편한 마음이 든 것은 사실이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단지, 불편할 뿐이다. 번뜩, 국내에 밀수되는 마약의 루트중 하나가 지인의 짐을 대신 운반하는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기사가 머리에 스친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라고 되뇌어보았다. 입국서류에서 본듯한 질문이 사진처럼 머리에 떠올랐다. “ 3자의 짐을 대신 운반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가져온 짐이 있습니까?” 필연적으로 나는 이 질문에 ‘Yes or No’로 대답해야 한다. No라고 하고싶지만 마음에 걸린다. 첫째는 거짓말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안에 정말 마약이 들어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채 무언가를 운반하는 사람들, 그 중 공항에서 잡혀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나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순간, 불평하는 마음이 들었다. “ 3자의 짐을 대신 운반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가져온 짐이 있습니까?” 이 질문이 너무 불친절하고 교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무엇도 모르고 저 질문에 아래, 그리고 ‘No’ 왼쪽에 있을 빈칸에 체크를 하는 순간 모든 책임은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Yes’에 체크를 하자니 무런가 성가신 일이 생길것만 같다. 결국에는 도박을 해야 한다. 귀찮음과 마음의 평안, 혹은 정직함과 거짓을 걸고 말이다. 질문 아래에 부가 설명을 적어놓았으면 어땠을까이 질문은 당신의 짐에서 문제될만한 것들이 발견되었을 때에만 유효합니다. Yes라고 해서 특별히 더 검사를 하지 않습니다. 안심하고 사실대로 답변해주세요.”

 

 공항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했다. 저울에 짐과 걱정을 올리니 23.1kg이 나온다. 재보지도 않았는데 딱 허용되는 무게를 맞췄다. 묘한 쾌감과 함께 안도감이 돌았다. 걱정한 것은 마약만이 아니었나보다. 괜히 남의 짐을 더했다가 무게가 초과하면 어쩌나, 초과하면 돈이 들텐데 그 돈은 누가 내나, 내가 내겠지만 그 돈이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을것이니 말이다. 적어도 사소한 한가지 걱정은 덜었다.

 

 얇은 책을 한권 들고 비행기에 탔다. 내가 가지고 온 책은 세권이다. 한권은 수화물에, 한권은 내 머리위 짐칸에 있는 캐리에 속에, 제일 얇고 이미 반을 읽어내려간 한권은 내 앞에 놓여있다. 비행기는 이제 막 이륙했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의 장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책이 더 얇아 보였다. 시간대비 넘긴 책장수에 대한 경제적인 관념과 정서적인 아쉬움이 묘하게 결합되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자 기체가 안정되었다. 저 멀리 앞 뒤에서 카트가 오고 있었다. 당분간 내 곁은 누구도 지나가지 못할 것이었다. 편한 마음으로, 그리고 여유 있게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를 내려 책을 꺼낸 뒤 다시 올렸다. 옆에 놓인 여분의 책 한권이 묘한 안정감을 가져왔다. 내 방에 꽃힌 책들, 그들이 그 자리에 있는 이유는 어쩌면 나의 안정을 위해서 일지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이제서야 문득 들었다. 비행기가 떨어질 때쯤, 나는 고작 새 책의 첫장을 열었다. 그리스린 조르바가 누군지 알고 싶었지만, 확실히 알게된 것은 책 두께와 표지가 노란색과 흰색의 조합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누군가는 배신하지 않는다는 돈을 주고 구매했어도, 믿음만큼이나 지켜지지 않는 착륙시간이 다가온다. 기대에 부흥하는 듯, 익숙한 땅이 보인다. 고도는 점점 낮아지고, 속도는 줄지만 여전히 나아간다. 태어나고 자란 땅, 내가 자란 문화권과 편하지는 않아도 익숙한 언어를 사용하는 곳. 내가 왜 입국하려 하는지 특별히 묻지 않고 나를 받아주는 곳. 그 땅의 국민이라는 사실과 보이지 않는 주권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땅을 밟자 이곳은 형식적으로 온전한 국가가 되었다.

 

 기다리다가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들어와서 기다리게 되었다. 컨베이어 벨트에는 주인없는 짐들이 쌓여간다. 주인들은 아직 나라 밖에 있다. 나는 짐을 찾을 자격을 가졌지만, 정작 짐이 도착하지 않았다. 저 안에서 누군가가 내 가방에 자격을 부여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저 때로는 지켜지지 않는 정의, 선착순 원칙에 입각하여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것일까. 찔리는 것이 있어서 생기는 조마조마한 마음과 조금의 운이 더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토해지는 가방들을 쳐다본다.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인 것을 보니 내가 아닌 짐을 기다리는 번호였다. 전화를 받으니 짐 갖고오신 분이냐는 질문이 들어온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이다. 아는 사람의 지인의 다시 아는 사람의 관계자에게 짐을 전달하는 그 연결과 과정에 무게를 두고 있었지만, 나는 어느새 짐의 운송수단이라는 목적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짐 갖고온 사람이 한 생각이다. 붙일 곳 없는 생각을 떨쳐버리고서는 전화에 그렇다, 내가 바로 짐 갖고온 사람이라고 답했다. 어눌한 한국말로 미안하다고 한다. 본인이 나오지 못해 다른 사람이 대신 나간다고 한다. 그러다가 대화를 이어가기 힘든지 그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을 다시 바꿔준다. 이제는 누구의 지인인지 무슨 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검은 바지, 흰색 운동화, 회색 점퍼를 입은 누군가가 서 있을 것이라 했다.

 

 짐을 찾고 두리번 거리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11 출구에 서있는 사람이었다. 검은 바지, 흰색 운동화, 회색 점퍼. 내가 들은 정보와 일치한 누군가였다. 내가 본것은 한가지 있었다. 눈빛.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서로가 바로 각자가 찾던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몇초 지나지 않아 있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다. 눈을 맞추며 거리가 좁혀질수록 앎은 더해져 확신이 되었다.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당신이 그사람이고 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것도 당신 것도 아니지만 손에서 당신 손으로 무언가를 전달했다.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은 목적을 잃은 것과도 같다. 서로의 존재가치를 다한 우리는 잠시동안 어색하게 있었다. 고맙다고 말해야 할까. 우리가 표해야 고마움, 주체와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같은 처지였다.

 

 "...마씀미다."

 무심히 돌아서려 했을 , 들린 마디였다.

 ", 저도 고맙습니다."

 고맙다고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뒤로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래도 나와줘서 고맙다. 늦지 않아줘서 고맙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봐줘서 고맙다. 적어도 나에게 주어진 대가 없는 미션을 피해 없이 마치게 해줘서 고맙다. 서로를 향해 고개를 숙였을 때에, 우리는 아마 같은 생각을 했지 않았을까.


"어른이 되면 알 수 있어."


어렸을 때 엄마한테 듣던 말인데, 아직까지도 듣고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두살난 딸에게도 그 소리를 한다.


맞다. 어른이 되면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아는 것이 많아지겠지.


그런데, 어른은 아이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한때 알았지만 지금은 모르는 것들.

나는 기억하지는 않으면서, 너는 알게 될거라는 그런 말들.

제법 무책임하지 않은가.


아이들은 언젠가 어른을 이해하겠지.

어른들은 결코 아이가 되어 그들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사로잡혀야 할 것은 과거의 망령뿐이 아니다.

한 때 우리가 보았던 순수했던 그 무엇일지도.

어른이 되며 체득한 공포와 아픔을 모르기 전 보았던 그 무엇일지도.


"너희 때만 볼 수 있는 것이 있어. 부럽다 나는 이제 보지 못해."

아마도,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하는 말.

 토요일 아침, 커피를 한잔 내려 들고 르디플로가 들어있는 흰색 포장봉투를 뜯었습니다. 무심하게 내용물을 꺼내자, 그 안에 숨어있던 종이 한장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존경하는 독자님께'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종이였습니다. 올 10월로 1년 정기구독이 만료된다는 소식을 전하는 편지 아닌 소식이었습니다. '아, 벌써 일년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다음장을 펼치자 편집자께서 쓰신 글이 있었습니다. 르디플로가 탄생한지 10년 하고 1개월이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생각지 않은 잽 한방, 그리고 카운터 한방을 연이어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고백하면, 사실 정기구독이 끝나면 연장은 하지 않아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홍세화 씨를 좋아합니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민망할만큼 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작년이었던가요. '홍세화의 공부'라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거의 출간되자마자 구매해서 단숨에 읽어내려간 기억이 납니다. 르디플로의 이름을 읽고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제 인식 가운데에서는 말입니다. 웃긴 일이지요. 홍세화씨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한 시간은 제법 되었는데, 르디플로의 이름을 이제서야 처음 들었다는 것이요.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다시 인증한 셈입니다.

 그 시점 이후로 르디플로 홈페이지에 하루에 몇번씩 들어가보며 구독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고민 가운데 다시 부끄럽게도 가장 먼저 손에 든 것은 계산기였습니다. 얼마를 내야 하는가가 저에게는 중요했습니다. 얼마를 내야 하는가 보다는 그 금액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고 이야기해야 조금 더 사실에 가까운 표현일 듯 하네요. 저는 한 작은 국제개발협력NGO에서 '개도국의 엄마와 아이들을 영양적으로 돕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 제가 한다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이기에 돕는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우리나라의 여러 가치있는 일들이 그렇듯 수입은 그에 반비례하는듯 합니다. 몇년전 기준으로 후하게 쳐도 최저임금을 채우지 못하는 돈으로 아내와 함께 한달을 생활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돈을 버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불편은 하지만 살아갈만 합니다. 르디플로를 구독하는데 감당해야 하는 금액은 그 불편함 중에 하나였지만, 불편을 감수하고 르디플로 정기구독을 시작했습니다. 불편을 감수했던 불순한 동기들중에 지적 허영심과 프랑스에 관련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호감이 가는 성향도 한몫 거들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나름 International한 직종에 종사함에도 불구하고 르디플로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가 참 많았습니다. 관심을 둘 시간과 노력이 부족하여 제목과 내용만 훑고 지나간 적도 있었습니다. 무지하여 읽기가 어려운 기사도 있었습니다. 내용과 표현에 조금 불편함을 느꼈던 기사도 있었지만, 또 어떤 기사에는 또 매료되어 사은품으로 받은 에코백에 한달 내내 들고다니며 꺼내들고 읽기도 했습니다. 바쁘고 또 정신이 없던 달에는 도착한지 한참을 지나서야 흰색 포장비닐을 벗긴 기억도 있습니다.

 일년이 지나면 다시 또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텐데, 조금은 편해도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선택에 순간에 빨리 섰고 서두에 말한 것처럼 잽과 카운터를 맞게 되었네요. 제가 받은 지난 정기구독의 마지막 호가 이번 10월호가 아니었다면, 별 고민 없이 구독을 중단했을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마지막에 또다른 10년을 준비하시는 편집자님의 꿈을 듣게 되었네요. 아마도 제가 믿는 하나님이 '구독연장해라.' 라고 말씀하시는 듯도 했습니다. 편집자님의 꿈꾸시는 미래의 지분에 조금 손을 얹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래서 기분좋게 불편을 한번 더 감수하게 되었습니다.

르디플로가 최고에요. 완전 팬이에요. 라는 식의 응원은 하고 싶지도 않고, 아마 어울리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종이마다 성향이 있지요. 저는 아마 르디플로 혹은 여기에 글을 담은 분들의 성향과는 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잘 보고 있습니다. 흔히 메이저 신문이라고 부르는 것들 중 하나를 구독하여 보고 있습니다. 검색만 해도 쉽게 볼 수 있는 기사들이지만 매일 아침 그 소식들을 모아서 볼 수 있기에, 종이가 더 좋기에 신문을 봅니다. 그 메이저 신문에 써있는 글은 잘 읽힙니다. 시간이 없을 때에는 슥슥 눈으로만 훑어도 어떤 일이 세상에 있었구나를 알 수 있습니다. 인스턴트 간편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요? 르디플로를 그에 비교한다면 조금 까다로운 음식이지 싶습니다.(아프리카 대륙 마다가스카르의 작은 섬 세인트마리에서 먹은 프랑스풍의 초록색 문어요리가 생각나네요. 아내는 입도 못댔지만 저는 맛있게 먹었습니다.) 맛을 음미하려면 자리에 딱 앉아서 꼭꼭 씹어야 맛도 알고 소화도 시킬 수 있는 음식들을 한달에 한번씩 배달받는 느낌이랄까요. 때로는 씹지 못하기도, 소화를 못 시키기도 하는 음식도 있지만 그 음식의 존재 자체가 참 좋습니다.

칼럼과 에세이에 글을 보내시는 분들이 자기를 소개하듯, 저 또한 글을 읽고 쓰며 살아가고 싶은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나와 세상에 대한 고민을 저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고민의 색은 르디플로와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그 방향은 아마 한 곳을 보고있지 않을까 합니다. 흔들리고, 어지럽고, 힘이 들 때 르디플로를 보며 내가 어디를 보고 있었나를 확인하고 조금 멀리 시선을 옮겨 보기도 합니다.

이 글이 방향을 더 잃기 전에 마무리해야겠습니다. 부담이 아닌 작은 응원이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에 글을 썼습니다. 또 다른 10년을 준비하신다는 2면의 글이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같아 답장을 하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구요. 우연과 과정이 묘하게 섞여 느끼게 된 오늘을 그냥 글로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고작 1년 연장하면서 생색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돈을 주고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이 아닌, 꿈꾸시는 미래의 작은 몫을 감당한다는 마음으로 구독을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응원합니다. 그리고 정말 잘 보고 있습니다.

10월의 토요일, 르디플로 독자중 한 사람 드림

매일밤 꿈을 꾼다. 기분이 좋지는 않으니 악몽이다. 다가오지만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되풀이된다. 노력하지 않아도 가능한 경우의 수가 시나리오로 바뀌어 계속 되풀이된다. 결과는 다 인상이 찌뿌려진다. 중간에 끊겨버린다. 불확실한 가정이니, 불확실한 결과들 뿐이다. 꿈은 낮에도 이어진다. 실수로 생각을 놓쳐버리면, 나는 또 꿈을 꾼다. 기분이 좋지는 않으니 악몽이다.

활발히는 아니지만, 간간하게 블로그를 유지하는 나에게도 한달에 약 10장 정도의 초대장이 발송된다.

초대장을 10명에게 나눌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한달에 한번 꼴로, 초대장을 나눈다는 글을 남긴다.

초대장 나눔에는 많지는 않아도 몇가지 조건을 단다.

내 포스팅 중 하나에 공감과 댓글을 달아달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만들 블로그에 대해 간단히 남겨달라는 것이다.

조회수를 늘린다거나 뭐 그런 목적은 아니다. 많지 않은 포스팅을 남기고, 글을 조금씩 쓰지만 어떻게 읽히는지 궁금해서이다. 억지로나마 평가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람들이 택한 것들과 그에 대한 조언(?)을 보면 재미도 있고 유익도 하다. 물론 나에게 말이다. 

자신이 만들 블로그에 대해 남기는 것도, 조금 고민해보라는 의미이지 고생시킬 의도는 없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글을 남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한 사람이 똑같은 글을 여러 블로그에 복사 붙여넣기 해서 초대장을 요청한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가며 달라는 초대장을 달라는 글을 심심찮게 보는 것으로 알 수 있고, 그럴 목적으로 쓴 글은 대략 보면 알 수 있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초대장을 못받을 경우를 대비해야 하니 말이다. 한 블로그에만 부탁하라는 법도 없고 말이다.

이리 보면, 경쟁이 치열해 보인다. 그런데, 막상 초대장을 나눠주려 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초대장 10장을 다 못쓴다.

이유는 몇가지가 있다. 첫째, 내가 초대장을 주고자 하는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초대장을 받은 상태이기에 내가 초대할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한 인사담당자의 말이 생각난다. 저 친구는 꼭 우리회사에 데려오고 싶어서 최고점을 주면, 그 친구는 더 좋은 회사에 가더라는 것이다. 사람 마음은 요 부분에서만큼은 같은듯 하다.

두번째는... 조건을 안지킨다...ㅋ 댓글과 공감을 남기지 않고, 그냥 초대장 달라는 말만 써 놓는다. 아마 초대장 달라는 댓글을 여기 저기에 달고 있는 사람들일 것 같다. 내가 써 놓은 조건들은 아마 읽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99%확신한다.


매달 지켜보는데 이 패턴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를 통해서 조금씩 알게되는 관찰사실(?)이 있다.

열심히 조건을 이수(?)해서 남긴 사람들은 초대 수락을 바로 하며, 비교적 블로그를 성실하게 한다. 반면에, 초대조건도 안읽고 그냥 초대해달라는 댓글만 단 사람은(이 사람들에게도 그냥 초대장을 발송하기도 한다.) 초대장 수락이 상당히 늦고, 비어있는 블로그를 만들어놓기만 하는 경우가 많다.


한달에 한번씩 겪으며, 조금씩 더 강해지고 있는 확신이다. 이번달도 어김없다.

고민이 있을 때, 누군가를 찾아가거나 책을 잡는다.

사람과 마주할 때는 두 경우가 있다. 답답하거나 시원하거나. 나를 읽고 명확한 답을 하거나, 자신도 무슨 소리를 하지 모른 채로 말을 끼워맞출 때이다.

책은 한 가지이다. 생각. 내 생각에 맞든 틀리든 생각하게 한다. 주장이 있고 근거가 있으면, 자신의 것을 이야기할 뿐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나를 생각하게 한다.

사람이 사람다워야 맞겠지만, 가끔은 책을 본받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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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를 들여서라도, 어떤 수고를 들여서라도 글쓰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

넓게 볼 수 있는 모니터라든가, 손이 편한 키보드라든가, 나에게 맞는 글쓰기 툴을 찾는다든가 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이 모든것이 갖춰진 나만의 방을 갖는 것까지도 해당된다.


그런데, 막상 그런 조건들을 갖추어가다 보니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풋 하고 웃음이 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바로 마음의 평안이다.

회사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든가, 아내와 말다툼을 했다든가, 내 마음이 막혀 안에 있는 것을 내놓지 못할 상태에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해소하거나, 다스리지 않는다면 아마도 안에 있는 것들을 건강하게 풀어낼 수 없을 것이다.


난 결국, 오늘 산책을 나갔다 왔다. 한시간 정도 걸으니 머리와 마음이 정리되드라.

차분하게 앉아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차분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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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통증  (0) 2018.06.26

요즘들어, 언젠가부터 몸이 좀 안좋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서 잠시 자다가 스멀스멀 일어나니 아내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놓아 잠시 몸을 담갔다. 몸이 따뜻해지니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목욕탕 같이 울림이 있는 공간에서 목소리를 내다 보면, 공간과 소리가 공명되는 지점이 있다. 어떤 지점일지 읽는이가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목욕탕에서 이런 저런 소리를 내 보는데, 맘에 드는 소리를 찾은 순간이다. 첫 소리부터 그 지점과 만나기는 어렵다. 이렇게도 내보고 저렇게도 내보고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가 구애받지 않고 목소리를 찾다보면 어느새 그 지점에 가 있다. 그럼에도, 비교적 쉽게 그 지점으로 다다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내가 나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혼자는 그렇다 치자. 만약, 누군가가 함께 이 울림이 있는 공간 안에 있다면 어떨까. 각자의 지점을 찾고, 다시 또 함께 할 지점을 따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소리내는 것이 좋아서 흥얼거리다가 문득, 내 목소리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목소리를 조금 더 키워내야 하지만,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옳은 소리일지, 맞는 소리일지, 아름다운 소리일지 자신이 없다. 이래저래 소리를 내보면 곧 찾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주변 큰 목소리에 묻혀 엄두도 내지 못한다. 내 목소리는 점점 묻혀지고, 잊혀진다.


나는 고삼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놀랍거나 심각한 고백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발생하는 일이 조금 일찍 발생한 것이니. 물론,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남들이 다 갖고 있는 수많은 아픔 중 하나이지만, 짐작하기 어려운 형태의 아픔이 있었다. 이 때도, 나는 내 목소리를 내고 싶었나보다. 누군가에게 솔직해질 때가 있었다. 그러면, 자연스레 나의 아픔을 이야기하게 되는데 반응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들어주는 사람, 듣지 않는 사람이다. 들어주는 사람은 말 그대로이다. 솔루션을 내지는 않는다. 고개를 끄덕이고, 빈잔을 채워준다. 공감에 공명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나는 그 순간만큼은 그 사람의 공간 안에서 평온하다. 듣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은 내 말을 끊고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 정도의 아픔은 뭔지 안다며, 듣지 않아도 뻔하다며, 자신이 아는 범주 안에 나를 우겨넣는다. 그리곤, 나의 약함에 대해 말한다. 아직 어리다. 연약하다. 강해져야 한다. 쓸데없는 감정이다. 나는 입을 닫는다.

나중에 알고보면, 듣지 않는 사람들은 놀라운 공통점이 있었다. 대부분이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아픔을 겪거나, 남을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산 사람들이 많았다. 항상 자신의 목소리를 내 왔기에, 내 목소리만 들렸기에, 그것이 옳은 목소리라고 생각하기에 다른 소리를 듣고싶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다시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크고 좋은 소리를 가졌다. 하지만, 그 사람과 함께 노래하고 싶지는 않다. 그 공간에는 들어가기도 싫다. 나도, 때로는 듣는 것을 넘어 함께 노래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저 좋은 소리를 가진 사람보다는, 내 목소리에 공명해주며 함께 소리를 내주는 사람이 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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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사랑받기보다
미움받지 않기를
소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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