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비행기는 매력이 있다. 불빛이 있는 도시 위를 날기 때문이다. 마치 별이 총총 떠있는 밤하늘이 내 아래에 펼쳐진 기분이다.

나에게는 새롭고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기도. 하다.
섬나라와 유사한 우리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꼭 바다를 건너야 한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대륙 내에서 국가를 이동하다보니 바다가 아닌 대륙이 아래에 있었다. 빛나는 밤대륙을 오래간. 보고있었다. 한국 하늘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한국이 참 작다.

가끔 알라딘 중고서점에 간다.

사고싶은 책이 있을 때도 가지만, 사람들이 판매한 책 제목들을 보러도 간다.

책 제목들을 훑던 중, 한 젊은 친구 둘의 대화를 들었다. 페이퍼백 재질로 된 외국서적을 들고 하는 말이었다.
“우리나라 책도 이렇게 가볍게 만들면 좋겠다. 우리나라 책은 무거워서 자기 전에 읽기가 힘들다.”
자기 전에 항상 책을 읽을만큼 독서에 열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자책도 종이책도 좋아한다. 질감과 경험은 종이책이 좋지만, 많은 곳을 돌아다니는 데에는 무게 제약이 있으니 전자책을 선호한다. 전자책을 우선으로 하되, 구할수 없는 것은 종이책으로 산다. 전자책을 선호하는 필수요인중 하나는 값이 더 저렴해서이다.

이야기가 샜지만, 결국 사용자 경험 문제이다. 편리한가 아니한가. 그런데, 사용자 경험이 어쨋고 저쨋고를 떠나서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읽는 것’이다. 무게와 형태를 떠나, 읽을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결국 읽는 것이 중요하다.

교육에서 가르침이 아닌 배움에 무게를 두어야 하는 것과 같다. 책의 본질은 무엇보다 읽는 것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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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고다니는 에코백에는 날짜 지난 신문이 몇 부 있다. 잊고싶지 않은 문장이 담긴날의 신문들, 그래서 차마 버리지 못한 신문들이다.

신문의 쓰임을 단순화하여 생각하면, 그저 하루하루 소비할 수 있는 기삿거리 혹은 글들이다. 하지만, 맛난 음식처럼 그냥 먹어버릴 수는 없기에 음미하며 먹고싶고, 편안한 순간에 먹고싶고, 두고두고 먹고싶은 글들은 소화했든 안했든 가방에 넣어놓는다.

이를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는 행위에 비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놓치고 싶지 않은 장면이, 기억이, 감정이 있다. 그때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 항상 그렇지는 않다. 게으름이 우선하여 마음만 있고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때가 더 많다. Seize the day라는 말처럼, 하루를 붙잡아놓고 싶은 마음이지만 잡히지 않는다.

신문을 가방에 담아다니는 행위는, 그 글을 보관하며 언제라도 다시 꺼내보고싶다는 의미이다. 물론 가방은 무거워진다.

내가 욕구불만이나 만족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을 시기면 가방은 더 무거워지고, 반대면 가벼워진다. 행복할 때, 만족감이 내게 가득할 때, 가방에 있는 신문을 죄다 꺼내어 한번 읽고는 떠나보낸다. 이때 미련은 없다. 하루가 내맘대로 되지 않는 날, 하루 대신 신문을 내 가방속에 잡아 넣는다.

그날 읽지 않으면 쌓여가는 신문과는 달리, 잡지 않은 하루는 날아가버린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좋아하지 않는 유형이 있다.

과거의 경험과 경력만을 앞세워 말하는 사람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누군가를 보면, 대략 알 수 있는 성향과 능력들이 있다.
매우 추상적으로 생각했을 때, 현재는 과거의 결과인데 대화하다보면 과거가 궁금해지는 사람이 있고, 과거가 별로 궁금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매력적이거나 존경할만 하거나 호감이 가는 사람이 전자이다. 그 사람이 가진 객관적 모습과 내가 가진 감이 더해져 나오는 판단이다. 여기서의 ‘판단’은 정죄와는 다르다.

대화중 불쑥, 자신의 경험 그리고 경력을 꺼내어 놓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과거를 나의 현재와 비교하며, 그 둘이 같이 않음을 틀림으로 결론지으며 대화를 이끌어나간다. 스스로는 옳다는 전제이다.

대중을 상대로 한 강의라면 적절할 수 있다. 메시지는 흩어지고, 청중들에게 해석의 자유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허나, 사람대 사람으로 이뤄지는 대화에서는 매우 폭력적인 행위이다. 한국 정서에서 선생과 제자, 선배와 후배 같이, 서로가 그런 상하관계임(나는 앞 예시가 상하관계라고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이해하고 인정한다.)을 인정하고 듣는 설교라면 기분은 나쁠지언정 수용이 된다.

자리의 목적과 설정이 공유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은 자리에서 암묵적으로 상하관계를 설정하고 말하는 경우,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경력과 경험이다. 그저 숨쉬면 붙고 불어 따라오는 양적 경험 말이다.

과거 없이 현재와 미래만 말하는 사람은 사기꾼일 수 있다. 현재와 미래는 납득이 가야한다. 그를 설명하는 근거는 견고히 쌓인 과거이며 어떻게 증거할지는 개인 능력에 달렸다. 물론, 진실된 이야기는 그 자체 만으로도 힘이 있다.

내가 주절거린 모든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닌 예의의 문제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써 내려왔다. 배운다는 것은 타인의 문화, 곧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배우지 않고 가르치기만 하려는 사람의 세계는 얼마나 좁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라는 상투적인 말로 끝나야 맞겠지만, 실상은 눈에 훤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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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우리동네 망원동.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곳 앞을 지난다.

오늘 아침에는 감기몸살로 휴업한다는 주인님(?)의
공지.

들어가보지는 않았지만, 이따금씩 붙는 공지가 주인님(?)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아주 조금은 알 수 있게 해준다.

​​상처주는 사람들이 있다.
말로 행동으로 상황으로 상처를 만들어내기도, 주기도 한다.

​모르고 상처주는 사람이 있다. 의도성이 없다. 악의는 없을 수도, 순수한 사람일 수도 있다. 경험적으로, 알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 경험과 앎이 옳거나 진리가 아닐 수 있다. 문제는 대부분이 그러하다는 것에서, 그를 스스로가 알지 못한다는 것에서 온다. 나는 그랬어. 쟤도 그렇잖아. 그러니까 너도 그래야지. 나는 당신도 쟤도 아니고 그때의 상황과 지금은 다르다. 텍스트도 콘텍스트도 다르다.

​​너에게 상처받았어.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면, 당황할지도 모른다. 몰랐다. 고의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의도가 없었어도,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다. 절차와 처벌에 차이가 있을뿐.
​​당황하지 않고 당당할 수도 있다. 그 상처는 나의 책임이 아니다. 당신이 감당할 일일 뿐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칼을 피하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일지 모르나, 피를 흘려 죽어가는 것까지도 내 책임은 아닐 것이다.

멀리서 보면 곧고 열정이 넘치지만, 가까이 가보면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그래서 항상 외롭다. 옳은 자와,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자의
​​공통점은 외로움이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상처주고 있을지 모른다.

요즘 세대의 특징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 참을성이 없고, 이기적이고 기타 등등 떠오르는 것들이다. 그것을 정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기성세대에 속할까. 난 아직은 기성세대가 아닌가보다.

그 특징이라는 것들을 들어보면, 동의가 가는 것도 사실이다. 정확히 맞지 않는다고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지만, 완전히 아니라고 말하기엔 당당하지 않다.

더운 것이 여름의 잘못일까, 아니면 추운 것이 겨울의 잘못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여름을 막지 못한 봄의 잘못이나 겨울을 내버려둔 가을의 잘못일까.

내가 맞이할 여름은 더워도 시원했으면. 겨울은 추워도 따뜻했으면. 아마도.

우리 목사님 설교 중, 주옥같은 이야기가 많다.

예화로 사용하신,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실화상봉수는 차나무를 말한다. 품명이라기보다는 별명이다.

그 중에서도 열매와 꽃이 함께 달린 나무를 뜻한다.

보통,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열린다. 열매는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떨어지며, 다시 꽃은 핀다.


차나무는 조금 특이하다. 맺힌 열매가 다음 꽃이 피기까지 떨어지지 않는다.

꽃과 열매가 한 나무에서 만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그래서 과실(實)과 꽃(花)이 상봉(相逢)하는 나무(樹)가 되는 것이다.

생김이 궁금하면 아래 링크를 들어가보면 된다.

https://www.google.co.kr/search?q=%EC%8B%A4%ED%99%94%EC%83%81%EB%B4%89%EC%88%98&source=lnms&tbm=isch&sa=X&ved=0ahUKEwiJ_8Oo8KbXAhWCbbwKHXo2C8EQ_AUICygC&biw=840&bih=874


나무가 얼마나 힘들까. 꽃과 열매를 같이 데리고 있으려면 말이다.

우리 삶이 마치 이 나무와 같다. 화려하게 꽃을 피워 보여줘야 하고, 누군가에게 전할 열매도 맺어야 한다.

꽃만 피우는 삶은 얼마나 허망할까. 계속 보이기 위해서 꽃은 피지만, 결국 꽃은 지고 없어진다.

열매를 달고 있는 삶은 얼마나 또 힘들까.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언제 주인이 올지 모른 채로 그 무거운 것을 매달고 있어야 한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지는 이상적인 사이클을 타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삶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꽃도 피워야 하고, 꽃이 채 지기 전에 열매도 맺어야 하며, 그 사이에 다시 꽃을 피워야 하는 일이 많다.


실화상봉수를 보며 그렇게 삶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본다.

지금은 이야기로만 사진으로만 그 나무를 알지만, 언젠가 한번 직접 보고싶다. 사진으로도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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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각에 낀 이층버스

http://www.ytn.co.kr/_ln/0103_201709272241436716


이층버스가 교각에 끼었다. 버스 운전기사가 실수로 교각 높이가 낮은 차선으로 진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 사진은 2016년 12월에 있었던 비슷한 사고의 사진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고가 났다.


교각을 처음 만들 때에는 이층 버스가 생길 줄 알았을까? 이층 버스가 처음 생길 때에도 버스 높이 규제 탓에 난항을 겪은 기사를 기억한다.

그런데, 어렵사리 버스가 생긴 다음에도, 법은 이렇게 웃을수만은 없는 사건을 만들어낸다.


신라시대에 최치원은 모자가 높아 문을 무너뜨렸는데, 우리나라의 교각은 버스도 못지나갈만큼 낮은 걸일까. 아직은 대국이 아닌 것일까.


요즘 법과 현실이 부딪히는 기사가 많이 보인다.

디지털 세상을 반영하지 못한 헌법이라든가. http://news.joins.com/article/21960669

빠리바게트 직접고용 사태(?)가 그것이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21/2017092102324.html

디지털 세상이 반영되지 않은 헌법은 궂이 설명이 없어도 될 듯하다.

빠리바게트 직접고용은 고용형태 문제이다. 대기업이 노동자를 고용하면, 간접고용하여 쉽게쓰고 쉽게 해고하니 직접고용해서 노동자를 보호하라.. 라는 정부의 지시가 있었던 것인데.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양상이 조금 다른가보다. 협력업체가 있었고, 단순히 비정규직과 같은 문제는 아니었다.

노동형태도 다양화 되고 있다. 부당한 열정페이도 있지만, 필요한 열정페이도 있다.

봉사자는 왜 돈을 받지 않는가. 재능기부는 열정페이가 아닌가. 돈 대신 경험을 쌓는다 해도 다르지는 않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법과 현실이 부딫힌다. 나라만 갖는 문제는 아니다.

나 개인에게도, 작은 단체에게도 있는 문제이다.


이미 알고 있는 문제이다. 다 잘 하고 있는건데... 하면서 상황 설명을 하면 결국 핑계일 뿐이다.

불법은 불법일 뿐이고, 법이 따라오지 못하는 것은 말 그대로이다.

과정 이해는 더 좋은 결론을 내기 위해 필요하지만, 현재를 변호하는 핑계는 되지 못한다.


법도 바뀌어야 하고, 그에 따라 혹은 그보다 먼저 우리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뻔한 이야기를 해본다.

내년 부터는 교각에 낀 이층버스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친구와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다.


친구는 흔히 말하는 클럽 DJ이다. 재미있는 컨셉으로 활동하여 검색하면 누군지 알 수 있을 정도이다.(사실, 뭐든 검색하면 나오는 시대이긴 하다.)

문제는 친구가 카톡방에 봉을 잡은 여성의 일러스트가 담긴 포스터를 올렸고, 내가 못참고 지적질을 하여 벌어졌다.


내가 쓴 단어는 '천박하다'라는 단어였다.

나는 절대, 봉이든 뭐든 잡고있는 여성의 일러스트가 천박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 여성이 천박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누드사진이 천박한가? 빨간 불 아래에 있는 누드사진은 천박한가? 무얼 들고 있느냐에 따라 천박하다고 할 수 있는가?

사진은 사진 그 자체일 뿐이다. 일러스트도 마찬가지이다.


천박한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다. 그 대상을 이용하는 '이용자'인 사람이 어떻게 대상을 사용했냐에 따라 '천박'해질 수 있다.

'천박'하게 대상을 사용한 사람 자체가 '천박하다'라고 할 수 는 없지만, '천박'하게 사용했다라고는 할 수 있다.

친한 친구여서 강한 단어가 나갔다. 만약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천박한 것인가?


의도성에 맞지 않게, 자극적인 사진이 쓰였다면 천박하다고 생각한다.

클럽 파티에 초대하는 포스터에 야한 사진이 들어갈 필요가 있었을까? 맥락과 상관없이 시선을 끄는데에는 성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친구의 퍼포먼스와는 별 상관이 없다. 그 친구가 가지는 격과 맞지도 않다.

그런 포스터로 홍보한 행사는 가고싶지 않다. 라는 개인적 취향도 있다. 


그 친구가 유명해졌으면 좋겠다. 나중에 메인 스테이지로 나왔으면 좋겠다. 보통 인식되는 양지에도 음지에도 나와 즐거운 퍼포먼스를 펼치는 존재가 되었음 좋겠다.

그런데, 내가 담당자라면 그런 포스터를 쓴 사람을 우리 행사에 부르고 싶지는 않다.


마광수씨의 이야기까지 갈 것도 없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어려운 단어를 쓸 것도 없다.

내 아이와 부모와 친구와 아내가 보았을 때 당당한가? 당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면 문제가 없다.


대화를 지켜보는 친구들은 쓸데없이 예민하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지금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의지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하기 어렵다. 나이가 어려서이기도 하다. 누구는 때가 되지 않았다고 표현한다.

좋든 싫든, 세대는 바뀌고 내 세대가 설 때가 온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때이지만, 훗날을 위한 준비이며 과정이기도 하다. 내가 때라고 생각한 순간마저 과정일지 모른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그에 부끄럽지 않은 것인가.

숫자로 누군가를 누르는, '몇년짜리' 경력 덩어리가 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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