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 50, 어제 맞춰놓았던 알람인 것도 잊고 인상을 찌뿌렸다. 맞다. 일어나야 한다. 꿈에서 현실로 얼떨결에 돌아온 나는 불을 켜고 샤워실 들어가 다시 그 뜨겁고 떨어지는 안으로 들어갔다. 샴푸와 바디워시는 한두번 쓸 양 만큼만 비치되어 있었다. 혹여나 내 몸에 조금의 더러운 것이 남아 있을까봐,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샴푸와 바디워시를 필요 이상으로 짜내 사용한다.

 

 씻으니 정신이 들어, 어제 미처 싸지 못한 짐을 싸기 시작한다. 짐은 때로 사람같다. 반가울 때가 있지만, 성가실 때가 있다. 가족과 나를 위한 짐은 가벼워도, 누군가가 맡긴 짐은 무겁다. 댓가없는 책임의 무게일 것이다. 아는 사람의 지인의 짐을 다시 또 그 지인의 아는 사람의 관계자에게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부탁이지만 거절하기는 어렵다. 불편한 마음이 든 것은 사실이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단지, 불편할 뿐이다. 번뜩, 국내에 밀수되는 마약의 루트중 하나가 지인의 짐을 대신 운반하는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기사가 머리에 스친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라고 되뇌어보았다. 입국서류에서 본듯한 질문이 사진처럼 머리에 떠올랐다. “ 3자의 짐을 대신 운반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가져온 짐이 있습니까?” 필연적으로 나는 이 질문에 ‘Yes or No’로 대답해야 한다. No라고 하고싶지만 마음에 걸린다. 첫째는 거짓말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안에 정말 마약이 들어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채 무언가를 운반하는 사람들, 그 중 공항에서 잡혀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나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순간, 불평하는 마음이 들었다. “ 3자의 짐을 대신 운반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가져온 짐이 있습니까?” 이 질문이 너무 불친절하고 교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무엇도 모르고 저 질문에 아래, 그리고 ‘No’ 왼쪽에 있을 빈칸에 체크를 하는 순간 모든 책임은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Yes’에 체크를 하자니 무런가 성가신 일이 생길것만 같다. 결국에는 도박을 해야 한다. 귀찮음과 마음의 평안, 혹은 정직함과 거짓을 걸고 말이다. 질문 아래에 부가 설명을 적어놓았으면 어땠을까이 질문은 당신의 짐에서 문제될만한 것들이 발견되었을 때에만 유효합니다. Yes라고 해서 특별히 더 검사를 하지 않습니다. 안심하고 사실대로 답변해주세요.”

 

 공항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했다. 저울에 짐과 걱정을 올리니 23.1kg이 나온다. 재보지도 않았는데 딱 허용되는 무게를 맞췄다. 묘한 쾌감과 함께 안도감이 돌았다. 걱정한 것은 마약만이 아니었나보다. 괜히 남의 짐을 더했다가 무게가 초과하면 어쩌나, 초과하면 돈이 들텐데 그 돈은 누가 내나, 내가 내겠지만 그 돈이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을것이니 말이다. 적어도 사소한 한가지 걱정은 덜었다.

 

 얇은 책을 한권 들고 비행기에 탔다. 내가 가지고 온 책은 세권이다. 한권은 수화물에, 한권은 내 머리위 짐칸에 있는 캐리에 속에, 제일 얇고 이미 반을 읽어내려간 한권은 내 앞에 놓여있다. 비행기는 이제 막 이륙했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의 장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책이 더 얇아 보였다. 시간대비 넘긴 책장수에 대한 경제적인 관념과 정서적인 아쉬움이 묘하게 결합되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자 기체가 안정되었다. 저 멀리 앞 뒤에서 카트가 오고 있었다. 당분간 내 곁은 누구도 지나가지 못할 것이었다. 편한 마음으로, 그리고 여유 있게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를 내려 책을 꺼낸 뒤 다시 올렸다. 옆에 놓인 여분의 책 한권이 묘한 안정감을 가져왔다. 내 방에 꽃힌 책들, 그들이 그 자리에 있는 이유는 어쩌면 나의 안정을 위해서 일지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이제서야 문득 들었다. 비행기가 떨어질 때쯤, 나는 고작 새 책의 첫장을 열었다. 그리스린 조르바가 누군지 알고 싶었지만, 확실히 알게된 것은 책 두께와 표지가 노란색과 흰색의 조합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누군가는 배신하지 않는다는 돈을 주고 구매했어도, 믿음만큼이나 지켜지지 않는 착륙시간이 다가온다. 기대에 부흥하는 듯, 익숙한 땅이 보인다. 고도는 점점 낮아지고, 속도는 줄지만 여전히 나아간다. 태어나고 자란 땅, 내가 자란 문화권과 편하지는 않아도 익숙한 언어를 사용하는 곳. 내가 왜 입국하려 하는지 특별히 묻지 않고 나를 받아주는 곳. 그 땅의 국민이라는 사실과 보이지 않는 주권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땅을 밟자 이곳은 형식적으로 온전한 국가가 되었다.

 

 기다리다가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들어와서 기다리게 되었다. 컨베이어 벨트에는 주인없는 짐들이 쌓여간다. 주인들은 아직 나라 밖에 있다. 나는 짐을 찾을 자격을 가졌지만, 정작 짐이 도착하지 않았다. 저 안에서 누군가가 내 가방에 자격을 부여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저 때로는 지켜지지 않는 정의, 선착순 원칙에 입각하여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것일까. 찔리는 것이 있어서 생기는 조마조마한 마음과 조금의 운이 더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토해지는 가방들을 쳐다본다.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인 것을 보니 내가 아닌 짐을 기다리는 번호였다. 전화를 받으니 짐 갖고오신 분이냐는 질문이 들어온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이다. 아는 사람의 지인의 다시 아는 사람의 관계자에게 짐을 전달하는 그 연결과 과정에 무게를 두고 있었지만, 나는 어느새 짐의 운송수단이라는 목적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짐 갖고온 사람이 한 생각이다. 붙일 곳 없는 생각을 떨쳐버리고서는 전화에 그렇다, 내가 바로 짐 갖고온 사람이라고 답했다. 어눌한 한국말로 미안하다고 한다. 본인이 나오지 못해 다른 사람이 대신 나간다고 한다. 그러다가 대화를 이어가기 힘든지 그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을 다시 바꿔준다. 이제는 누구의 지인인지 무슨 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검은 바지, 흰색 운동화, 회색 점퍼를 입은 누군가가 서 있을 것이라 했다.

 

 짐을 찾고 두리번 거리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11 출구에 서있는 사람이었다. 검은 바지, 흰색 운동화, 회색 점퍼. 내가 들은 정보와 일치한 누군가였다. 내가 본것은 한가지 있었다. 눈빛.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서로가 바로 각자가 찾던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몇초 지나지 않아 있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다. 눈을 맞추며 거리가 좁혀질수록 앎은 더해져 확신이 되었다.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당신이 그사람이고 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것도 당신 것도 아니지만 손에서 당신 손으로 무언가를 전달했다.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은 목적을 잃은 것과도 같다. 서로의 존재가치를 다한 우리는 잠시동안 어색하게 있었다. 고맙다고 말해야 할까. 우리가 표해야 고마움, 주체와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같은 처지였다.

 

 "...마씀미다."

 무심히 돌아서려 했을 , 들린 마디였다.

 ", 저도 고맙습니다."

 고맙다고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뒤로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래도 나와줘서 고맙다. 늦지 않아줘서 고맙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봐줘서 고맙다. 적어도 나에게 주어진 대가 없는 미션을 피해 없이 마치게 해줘서 고맙다. 서로를 향해 고개를 숙였을 때에, 우리는 아마 같은 생각을 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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