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에 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도시를 등지고 시선은 안개 낀 바다를 향합니다. 그 안개를 헤치고, 한 배가 들어옵니다. 배가 안개를 열듯, 그를 보는 남자의 마음도 열립니다. 그 안에 잠자던 기쁨이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펼칩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알무스타파’ 신의 선택을 입은 자이자 신의 사랑을 받은 자. 그는 예언자입니다. 신의 사랑을 받아 모든 것을 알지만, 함부로 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아마도 이런 사람이 있다면, 예언자라는 말은 참 잘 어울립니다.


 배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입니다. 배가 왔으니 떠나야 합니다. 그가 있는 곳은 오팔리즈, 이곳에서 열두해를 있었습니다. 이곳에 있던 시간만큼 고향으로 가는 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언덕을 내려와 도시로 향하자 슬픔이 밀려옵니다. 기쁜 것은 고향으로 향하는 것이며 슬픈 것은 있던 곳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곳을 어찌 떠날 수 있을까요. 이 도시 거리마다 자신의 것을 쪼갠 영혼의 조각들을 뿌려놓았고, 간절한 바람이 퍼져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떠나는 것이 아픈 이유는 사랑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떠나야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남는다는 것은 가질 수 없는 것을 탐내는 것이며, 틀안에 자신을 가두어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도시로 퍼집니다. 집에서 집으로, 들판에서 들판으로 외침이 들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기에 말입니다. 그 외침은 필사적이었을수도 있겠습니다. 예언자는 중얼거립니다. 이별의 날이 만남의 날이 되어야 하는가. 이별은 만남으로 완성됩니다. 이별 또한, 관계의 한 형태이기에.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이 만약 수확의 날이라면, 내가 뿌린것은 무엇이었을까. 예언자는 결심합니다. 나의 등불을 높이 들어야 할 때이구나. 하지만, 내가 든 등불은 공허하고 또 어둡다. 등은 나의 것일지언정, 그 안에 불타는 것은 밤의 수호자가 기름을 채우고 불을 켜야 한다. 등을 든 나의 손이 공허하지 않도록.


 예언자는 도시 안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모여 있었습니다. 마치, 신약성서에서 오병이어 사건이라 기록되는 그때처럼 말입니다. 예수가 그 자리에 도달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갈망함으로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목자 잃은 양같으니 가엽다고 하였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사랑이라고 부를수 있음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의 영과 육은 채움받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목소리를 냅니다. 사랑과 아쉬움의 언어였습니다. 목소리는 다르지만 마음은 같았겠지요. 그때 성스러운 사원에서 한 선지자가 걸어 나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알미트라입니다.

 알미트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말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과 소망은 당신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요. 당신이 기억하는 나라와 고향에 있는 소망이 얼마나 간절하며 그리운 것인지를요. 허나, 마지막 부탁이 있습니다. 진리를 전해 주십시오. 우리는 그것을 또 전할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그 아이들은 다시 다음 세대에게 말입니다. 그대는 우리를 알지 않습니까. 우리의 눈물을 보았고, 우리의 웃음을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삶을 또 죽음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 사이에서 당신이 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알기를 원합니다.


 예언자는 말합니다. 오팔리즈 시민들이여, 내가 무슨 말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지금 그대들의 영혼 속에 살아 움직이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


 그렇게, 이별을 위한 만남이 시작됩니다.

선지자 알미트라는 사랑을 묻습니다.

알미트라는 다시 결혼을 묻습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이 아이들에 대해 묻습니다.

부유한 자가 주는 것을 묻습니다.

여관을 꾸리는 노인이 먹고 마심을 묻습니다.

농사꾼이 일에 대하여 묻습니다.

여인이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묻습니다.

석공이 집에 대하여 묻습니다.

베 짜는 직공이 옷에 대하여 묻습니다.

상인이 사고파는 일에 대하여 묻습니다.

도시의 재판관이 죄와 벌에 대하여 묻습니다.

법률가가 우리네 법에 대하여 묻습니다.

웅변가가 자유에 대하여 묻습니다.

여사제가 다시 이성과 열정에 대하여 묻습니다.

여인이 고통에 대하여 묻습니다.

남자가 자아를 아는 것에 대해 묻습니다.

교사가 가르치는 것에 대해 묻습니다.

젊은이가 우정에 대하여 묻습니다.

학자가 말하는 것에 대해 묻습니다.

천문학자가 시간에 대하여 묻습니다.

도시 원로들 가운데 한명이 선과 악에 대하여 묻습니다.

여사제가 기도에 대하여 묻습니다.

해마다 한 번씩 도시를 찾는 은자가 나와 즐거움에 대하여 묻습니다.

시인이 아름다움에 대해 묻습니다.

나이든 사제가 종교에 대해 묻습니다.

알미트라가 죽음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저녁이 되고, 이별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선지자 알미트라가 말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지금껏 말씀하신 그대의 영혼에 축복이 있기를. 이에 예언자는 답합니다. 내가 과연 말하는 자였을까. 나 또한 여러분과 함께 듣는 자가 아니었나. 예언자는 질문하는 자들이 이미 생각으로 아는 것을 말로 옮기기만 했을지 모릅니다.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배와 선장은 말이 없었습니다. 돛은 팔락이고 닻은 올라올 준비를 마쳤습니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모든 것들이 예언자가 침묵에 이르기를 각자의 묵묵함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말합니다. 작별의 날조차 지나갔다고 말입니다. 정말 떠나야할 때가 왔습니다.


 배가 동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울음은 마치 한 가슴에서 나오는듯 했습니다. 울음이 그치고, 사람들이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을 때까지 한 사람이 남아있었습니다. 알미트라였습니다. 알미트라는 홀로 방파제 위에서 그가 남긴 말 중, 그저 한 마디를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잠시만 있으면 바람결에 한숨을 돌리다가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을 것입니다.





 고통이란 깨달음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이 부서지는 것과 같으며, 즐거움은 자유의 노래이나 자유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어찌 다른 말로 풀어놓을 수 있을까요. 책을 한번 읽고나서 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다시 한번 읽는것 뿐이었습니다.


 하루 남짓한 이 이야기는, 마치 예언자의 일생을 본듯합니다. 도착하여 사명을 다하고 떠나는 이야기. 태어나고 살며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사람들이 한 질문과, 그 사람들의 관계가 묘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에 대해, 교사가 가르치는 것에 대해, 법률가가 법에 대해 묻습니다. 가장 잘 답할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묻습니다. 아마도, 질문을 할 수 있을때까지는 언제까지라도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질것 같습니다. 답은 각자 안에 있었겠지요. 다만 흩어져 모호했을 뿐, 예언자가 언어의 틀로 잠시 형체를 갖춰놓았지만 시간이 다시 형체를 흩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질문을 해야할 때가 오겠지요.다르지만 틀리지 않은 답을 다시 얻을 수 있을것만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문득 썼습니다. 하루의 시작에 예언자의 마지막을 다시 보았습니다. 허나 예언자가 그랬듯 이 마지막으로 시작할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답보다는 질문을 찾아야겠습니다. 묻고싶은 것을 찾았을 때, 이미 답은 제 안에 있겠지요. 물론, 그 답을 찾아가는데에는 적지 않는 시간이 들겠지만. 혹시 압니까. 잠시만 있으면 바람결에 한숨을 돌리다가 또 다른 여인이 그 답을 낳을지요.




동기

고영성씨가 쓰신 ‘어떻게 읽을 것인가’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요즈음은 책을 어떻게 읽을까에 대해 고민을 하는 시기입니다. 책에 대한 리뷰를 본격적으로 써보려 합니다. 된다면 영상 콘텐츠도 새로 만들까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평소에 책을 좋아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읽었고,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자주 많이 책을 보는 편입니다. 주변의 인식도 그러했습니다. 책 선물도 많이 하는 편이구요. 그런데, 막상 책을 주제로 하는 콘텐츠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니 막막함이 들었습니다. 사실, 체계적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혼자만의 만족만으로 책을 읽고 있던 것이지요.

내가 무얼 느끼고 있던 것일까. 나는 왜 감동을 받았을까.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할 가치나 있는 내용이 내게 있던 것일까 하는 반성들이 들게 되었습니다. 동네에 있는 도서관에 갔습니다. 대학 도서관이 아니니 책의 종류는 많지 않았지만, 제목이 눈에 익은 책들이 몇권 있었습니다. 고영성씨의 책은 그중 하나였습니다. 책을 어떻게 읽을까. 내가 제대로 읽어왔던 것인가? 하는 질문을 품어왔던 저에게,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책일까? 하는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책 한권을 볼 때에 어떻게 봐야 할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원했습니다. 그 답을 열어보기 위해 책을 집게 되었습니다.




내용

책에는 총 10가지의 독법을 말합니다. 독법이라 말하면 정확치 않은데, ‘읽는 형태’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읽음의 대상은 꼭 책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독아 : 나를 읽다.

먼저, 나를 읽는 ‘독아’를 이야기합니다. 내가 책을 읽어서 뭐 변화라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답입니다. 우리 뇌는 성장하고, 독서를 통해서 변화할 수 있다. 라는 말을 여러 과학적 근거를 들어 설명합니다.


(2)다독 : 많이 읽다.

다음은 다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뇌는 많이 읽는 것에 적응할 수 있다. 다독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을텐데 그 중 하나로 계독이 있다. 계독이란, 한 분야를 가지고 여러 책을 두루 읽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학부 졸업논문을 쓸 때에 한 인물에 대해 언급이라도 된 책은 모조리 옆에 쌓아놓고 읽으면 정보를 모았던 기억이 납니다. 뿐만 아니라,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그 자리에 가면 해당분야 책이 모여있지요. 그러면 원래 빌리려고 했던 책 외에도 끌리는 책들을 여러권 쓸어서 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면, 내가 원하는 정보들을 더 입체적으로 얻기가 용이하지요. 단어를 알지는 못했지만, 내가 하던 것이 ‘계독’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하고 이해했습니다.


(3)남독 : 다양하게 읽다.

다독의 다른 한 갈래는 남독입니다. 남독은 계독과 달리 한 분야가 아닌 여러 분야의 책을 읽는 것입니다. 남독을 하면 비판력과 창의력 그리고 관대함(이해력)이 길러진다고 합니다. 남독은 여러 아이디어와 개념을 알고 이으며 사고할 수 있게 하는데 그로부터 바로 창의성이 나오고, 누군가의 의견의 옳고 그름 혹은 넓이와 깊이를 재어가며 읽을 수 있으니 비판력이 길러지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내가 얼마나 편협하고 잘 모르고 있었는지를 알게되니 관대함(이해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바꿔 말하면, 좁은 범위만 많이 읽는 편독은 오히려 오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계독을 잘못하면 편독이겠지요?)


(4)만독 : 느리게 읽다.

다음은 느리게 읽기를 뜻하는 만독입니다. 단순히 물리적 시간을 늘여 천천히 읽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책 한권의 내용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읽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한권을 가지고 반년을 읽는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책 한권에 있는 단어, 사건, 배경 등등에 대해서 그냥 지나가지 않고 하나씩 공부해가며 읽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근대 소설을 한편 읽는다면, 그 소설 주인공과 주변인물의 직업, 말투, 살던곳에 대해서 공부를 해가며 읽는다면 소설 한권으로 한국 근대를 꿰뚫을 수 있겠지요?

고등학생 시절을 생각해봐도 적용이 될듯 합니다. 여러 문제집을 풀지 말고, 한 문제집을 반복해서 풀라는 말이 기억납니다. 문제를 암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문제집에 있는 개념들만 잘 정리하면 다량을 푸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된다는 맥락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동의가 되는 말입니다.


(5) 관독 : 관점을 갖고 읽다.

다음은 관독입니다. 관점을 가지고 읽는다는 뜻입니다. 책을 쓰는 사람의 관점을 받아들여 읽기도 하는 것이고, 내가 특정 관점을 가지고 읽기도 하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예를들어.. 나는 진화론에 반대하지만, 일단 찰스다윈의 진화론적 관점을 받아들이고 읽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오히려 진화론을 한번 까보려는 관점을 가지고 그 책을 읽을 수도 있겠지요. 저자님의 경우에는 그냥 책을 읽을 때보다 서평을 쓸 목적으로 책을 읽으면, 책의 구조가 더 잘 보인다고 말하며 관독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주의해야할 점은 특정 관점에만 집중해서 보고싶은것만 보게 되는 터널링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단어로 이해하면 ‘확증편향’된 관점으로 책을 읽게 된다고 할 수 있을듯 합니다.


(6) 재독 : 다시 읽다.

다음은 재독입니다. 말 그대로 다시 읽는 것입니다. 

재독이 가지는 기능으로 크게 두가지를 말합니다. 그 첫번째는 옛 추억으로 우리를 돌려놓는 것인데요.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안정감에 들게 하지요. 옛 친구들을 만나는 것 처럼요. 이는 ‘건강한 방어기제’를 형성해준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방어기제라 하면 부정적인 단어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맞딱뜨리면 동굴에 숨어버리는 것처럼 현실을 피하려는 어떠한 시도를 다 방어기제라고 하며, '안좋은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독이 ‘건강한 방어기제’를 형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려움에 맞딱뜨렸을 때에 중요한 것은 그 어려움의 크기보다 어떻게 대처하는냐가 중요하다고 하는데요. 재독이 바로 그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함으로 건강한 방어기제를 만들어준다는 것이지요. 어렵고 힘들 때 읽고싶은 책이 있지요. 꼭 희망을 주는 내용의 책이 아니더라도 읽고 싶어지는 책이 가끔 있습니다.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건강한 방어기제를 저도 모르게 찾고있던 것이네요.

한가지 다른 기능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재독이란 다시 읽는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하는 생각과 내일의 내가 하는 생각이 정확히 같지는 않습니다.  책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겠지요. 예전에는 명저라 느꼈던 것이 다시보니 졸작인 것이 있을테구요. 예전에는 별뜻 모르고 읽었는데, 다시읽고 또 읽을수록 깨달음이 생기는 책이 있을 수 있겠지요. 단순히 책에 대한 깨달음을 넘어, 작가님이 주목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책을 읽는 ‘나’의 변화라고 하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다시읽기 : 재독이 주는 효용이라고 합니다. 


(7) 필독 : 쓰면서 읽다.

다음은 필독입니다. 필독은 말 그대로 쓰면서 읽는 것입니다. 밑줄을 긋고, 그은 밑줄에 대한 생각과 감상을 남기고, 더 나아가서는 읽은 부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남기면서 읽는 것을 말합니다. 작가님은 이 단계가 단순히 독서가에서 필사가로 나아가 작가가 되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책 읽기는 확실히 매력이 있습니다. 읽다가 깨닫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이 나를 변화시킬 것이라 믿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막상 책을 덮고 나면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는듯도 합니다. 아련한 옛사랑의 추억인양.. 어느 부분에서 감명깊었고, 그 부분에 대해 조금 더 묵상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간혹 듭니다. 그런데, 그런 깨달음이 들 때에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그때 그때 글로 적어놓으면 기억에 남을 뿐더러 깨달음의 내용이 더 구체적이게 됩니다. 물론, 독서의 흐름이 끊길 수 있으며 읽는 속도는 느려지지요. 일장일단이 있지만, 책 한권을 잘 씹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독법이 아닐까 합니다.


(8) 낭독 : 소리 내어 읽다.

이어서 낭독을 말합니다. 낭독은 말 그대로 말로 읽는 것입니다. 구술문화와 언어문화를 비교하며 낭독의 효용성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또한, 낭독을 통해 독서모임과 같이 사회적으로 함께 독서를 하는 효용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9) 난독 : 어렵게 읽다. 

작가가 다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난독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단순히 머리 싸매고 끙끙대며 읽는 어렵게 읽기가 아닙니다. 작가님이 말하는 난독은 사실 읽기 방법이라기보다는 극복해야할 독서의 유형입니다. 난독은 말 그대로 읽기가 어렵다 라는 뜻입니다. 인터넷 시대, 동영상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실  ‘읽기’라는 것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인터넷 기사로 몇페이지를 읽었어도 그 내용을 나중에 확인해 보았을 때에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상이나 감상을 남길 수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 글의 내용으로 들어갔을 때에 대화가 어렵다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까지 가지 않더라도 저의 경우도 해당이 됩니다. 인터넷으로 무언가를 읽을 때에 무언가 어려움 없이 슥슥 읽힌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할 때면 컽만 알고 있고 알맹이에 대해서는 무지한 경우가 많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난독 또한 쉽지 않지만 극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여러 과학적 근거들을 책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0) 엄독 : 책을 덮으며 읽다.

마지막,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독서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바로 엄독입니다. 엄독은 책을 덮는 것입니다. 책에서 느낀것들 생각한 것들을 가지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책을 읽은 후에, 잠을 자기도 하고, 산책을 하기도 하며 내용을 소화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 꿈을 꾸기도 하고 미래를 그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바로 작가가 말하는 ‘어떻게 읽을까?’에 대한 나름의 답입니다.



감상 & 아쉬운 점

책을 읽으면서, 사실 갸우뚱 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책 내용이 이상하다거나 내용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책을 읽기 전 기대한 내용과는 살짝 다른 방향성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말 그대로 책을 읽을 때에 어떻게 읽을까에 대한 의문과 답을 기대하며 책을 읽었습니다. 예를들어, 작가의 배경에 대해 알아봐라. 책은 작가의 생각과 사상 환경이 만들어낸 고민의 결론이다. 그리고 목차를 봐라. 이런 식으로 '책'에 집중된 내용을 기대했습니다.(뻔히 아는 내용이더라도) 그런데 작가님의 내용은 사실 책보다 '사람'에 무게를 두고 있었습니다. 책의 내용을 취하고 더 느끼는 방법이라기보다는, 그 책을 읽는 사람이 취하는 방식에 대한 분류와 분석을 해놓으셨습니다.


책 제목을 섹시하지는 않지만 알아듣기 쉽게 다시 써보면... 
"독서 유형의 분류와 분석 ; 그렇다면 '너'는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라고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저는, 부족해서인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창의력을 기르기 위해서 남독을 한다든가, 갑자기 독서클럽에 들어가 낭독을(의미적으로)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오히려 기대하지 않은 부분에서 배운 것들이 많았습니다. 이 책, 저 책을 읽다가 또 보기도 하고, 천천히 보기도 하고, 다른 분야를 읽었다가, 관심있는 분야를 갑자기 파기도 하는 것이 제 독서라이프(?)였습니다. 잘 모르고 그렇게 했는데, 이제는 그 행동과 습관들이 가지는 각각의 의미들을 조금 더 알고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어려운데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사람입니다. 아마 이 글을 읽고있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시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람인 것은 알지만 '사람'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참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역사, 정치, 경제, 생물, 화학 등등을 배우며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이지요.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파진다는 것은 알았지만, 배움으로써 그 이유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됩니다. 맞으면 왜 아픈지,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구하고 싶긴 했는데 그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여러 실마리를 배우기도 합니다. 그렇게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데요. 이 책이 마치 '독서'라는 존재에 대해서 대답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형식으로든 책을 읽고, 즐거움과 유익을 얻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어떻게 읽을 때에 어떤 유익을 얻는지는 경험적으로만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애소설을 읽으면 기분이 좋다든가, 판타지를 읽으면 짜릿해지고, 시를 읽으면 차분해지고, 혹은 읽고나서 기억에 남는 책들을 나도 모르게 펴게 된다든가 하며 말입니다. 이 책은 그 독서법(?)을 분류하고 분석하여 내가 여태껏 어떤 독서습관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효과를 받았겠구나, 그러면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도 읽어봐야겠다 하는 가이드 역할을 하는 책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책 마지막에 소개된 버지니아 울프가 꿨던 꿈을 적으며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나는 간혹 이런 꿈을 꿀 때가 있다. 최후의 심판일이 동터 오고 위대한 정복자들과 변호사들과 정치인들이 각자의 대가 - 불멸의 대리석에 지워지지 않게 새겨진 그들의 왕관과 월계수와 이름 - 를 받게 된다. 하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오는 모습을 지켜볼 때, 그는 베드로 쪽으로 몸을 돌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봐, 이들에게는 포상이 필요 없어. 그들에게는 줄 것이 없어. 그들은 책 읽기를 사랑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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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타 사야카 씨의 ‘멀리 갈 수 있는 배’를 읽었다.

​동기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두 가지였다. 그 첫번째는 경험, 이라기보다는 호기심이다. 어떤 호기심이냐 하면 이 작가의 책인 ‘편의점 인간’을 읽어서 든 작가와 그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두번째는 신문 광고였다. 이 작가의 문제작이라는 자극적인 문구와 함께 책의 표지가 실려 있었다. 별 망설임 없이 도서관에 검색을 하고, 예약을 하여 이 책을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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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세 여자의 이야기이다. 여자라고 하기가 조심스럽다. 주인공들은 그 경계에 서있기도 한 사람들이니까. 아니, 경계 위에 둥둥 떠다닌다고 하는게 조금 더 맞겠다.
한 사람인 ‘리호’는 남자처럼 행동하는 여자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궁금해하며, 방황한다. 아니 어쩌면 답을 찾아가려는 시도를 한다.
둘째는 ‘치카코’이다. 치카코는 자신과 자신 주변의 모든 것이 바로 별의 조각이며 자신도 그의 일부라 여긴다. 치카코의 사랑의 대상은 과연 사람이라는 대상에 국한될 수 있을까. 여성으로 태어났으면 꼭 남성을 사랑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이 아닌, 별을 사랑할 수는 없는가.
셋째는 ‘츠바키’이다. 츠바키는 밤에도 자외선이 있다며 선크림을 바르는 여성이다. 여자, 혹은 여성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찾고 그 예시를 찾는다면 마치 츠바키가 뿅 하고 검색될 것만 같다. 전형적인 커리어 우먼같은 모습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보통의 경우 혹은 소설에서 이런 설정의 캐릭터는 무언가에 얽매어 있을것만 같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유하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확고해보이며 다른 이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담이 없다. 방황하는 리호와 치카코 곁에 어쩐지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있다.
그래서일까, 소설의 목차는 리호와 치카코의 이름으로만 되어있다. 두 사람에 무게를 옮겨가며 소설은 진행되고, 치카코는 그 무게중심에 있다. 이 소설은 이 세명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대화와 사건의 흐름이다. 이 세명은, 혹은 셋중 둘은 자신을 알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실험하고 의심하며 자신과 남을 설득하려 한다.

메모1. “자신의 성을 찾아가는 리호의 모습이 마치 ‘아버지’에 대한 다큐를 찍던 나의 모습인 듯 하다. 나는 이상한 존재일까. 아버지가 있었는데, 있다가 없다는 것이, 지금은 없다느 것이 큰 차이를 가져오는 것일까.
마치 전등빛 같은 것일까. 환히 나를 비추다가도 그 빛을 다하면 거짓말처럼 나도 빛 가운데에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
언제쯤 정상이 아니라는 불안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보고 또 본것들을, 찾아보고 또 찾아본 것들을 뒤적이지만 답은 없고.
위안을 받는 것은 내 주변의 것을 보니 내 윤곽이 어렴풋이 보이므로 나를 알았다고, 그래도 요만큼은 알았다고 자위해본다”



벌써 몇년전의 이야기지만, 학부 졸업작품으로 아버지에 대한 다큐를 찍었다. 제목은 “당신이 있던 자리”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결국 하고싶었던 것은 아버지가 아닌 내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남들보다 조금 일찍 돌아가셨다. ‘아버지 뭐 하시니?’, ‘너희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치디?’라는 영화같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움츠려들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중적이다. 나는 아버지가 있으면서 없었다. 그러면 나는 아버지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있던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정상 범주 내에 없어 보이지만, 나 또한 정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상하지 않고,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다.
다큐를 찍는 내 과정이, 리호와 같다고 생각했다. 겉보기에는 남들과 다를 바 없다. 자신도 분명 어느 성에 속한다는 확신이 있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개념과 사고로는 증명해낼 수가 없다.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리호가 참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메모2. “아주 작지만 확실한 한가지를 확인했을 때의 기쁨”


리호는 끊임없는 실험을 한다. 그러다, 작고 확실한 한가지를 확인하며 기쁨을 느낀다. 아이러니하다. 남들과 다른데 정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기쁨이 든 때는 다른 이들과 나의 공통점을 발견했을 때이다. 이것봐, 나도 그렇다고, 나도 그러니까 정상이라고, 내가 누군지는 헷갈리지만, 이것만은 절대 부정할 수가 없어. 하고 말이다. 그렇게 자신과 타인에게 당당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한가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기쁨을 느낀다.


메모3. “당연한 것을 실험까지 해가며 나 자신에게 설명해야 하는 헛헛함. 그 결과를 확인했을 때에 찾아오는 거부할 수 없는 안도감.”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것.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프다는 것,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마르다는 것. 다섯시간쯤 멈추지 않고 운동하면 힘들다는 것. 이런 것들을 실험까지 해가며 나를 설득해야 한다. 애써 정상이라고 말이다. 더 서글픈 것은, 그 당연한 결과를 확인했을 때에 참으로 거부하기 힘든 안도감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다름의 증거를 찾고 싶었지만, 그들과의 교집합을 확인한다. 결국, 하고싶었던 것은 다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안도가 아니었을까.

메모4. “그때 치카코는 이것이 바로 섹스가 아닐까 생각했다.” ‘S가 갖는 의미, 행위와 그를 받치는 정서적 공감. 둘 중 하나라도 부재하다면 그것은 과연 ‘S’일까?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들은 ‘S’가 아닐지도... 그런데 문득, 그 단어의 의미를 깨닫는다. 우주의 한 조각이 나이며 내가 별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치카코의 마음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위와 같지 않았을까. 남들이 그러하다고 하는 것에 끼워맞추면, 나는 해당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혼란보다는 궁금해하는 그때에, 내가 그 행위에 대해 갖는 의미를 깨닫고, 그것은 순간이라도 내게는 진리가 된다.

메모5. “사람의 삶의 모양은 선도 점도 아닌 입체에 시간이라는 변수가 계속 적용되는 식이다. 마치, 누군가가 내 생 몇개의 점만 보고 이어 나를 판단하듯이.
내가 ‘. . .’ 이런 점을 말하면. 사람들은 ‘.___.___.’점을 이어 ‘나’라고 하겠지. 혹시 아니? ‘.+||._~.’내가 이럴지.
그런 면에서, 리호는 부자연스럽다. 타인이 점을 보고 나를 판단하듯, 리호도 점으로 자신을 증명하게 한다.”


맞다. 리호는 부자연스럽다. 보이지 않는 어떤 형체에 자신을 끼워 맞춰간다. 점과 점 사이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무엇들이 있다. 내 삶은 어느 시점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흐름, 누적, 변화 그리고 지금. 아무리 단어들을 나열해도 나를 어찌 설명할까. 설명했다 라고 인정할 뿐. 다른이에게 나를 설명할 때에 어려운 점(.)이다. 한정된 시간과 단어와 표현으로는 나는 시간의 축에 나라는 점을 점.점. 찍을 수 밖에 없다. 소통의 어려움이 있는 것은 점과 점 사이에 생략된 과정들을 다 보일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리호는 마치 자신이 찍어놓은 점을 타인처럼 바라본다. 답답하지만, 그 부자연스러움이 어찌 보면 이해가 간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이해 선상에 놓지 못했을테니...

정리 : 감상
단순히 성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성이라는 것을 두고 일어나는 일이지만, 남성과 여성의 대립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보이는 것은 존재의 대립이며, 증명의 치열함이다. 등장인물들이 어찌보면 조금 답답하고,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다. 설정을 유지하려다보니 로봇처럼 캐릭터가 딱딱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내가 보였다. 싫어도 보였다. 남들이 그렇다고 하는 것과 내가 그렇다고 하는것, 실제로 그런것과 그렇다고 믿고싶은 것. 그 안개를 걷어내지는 못했지만, 잠시 고개를 들이밀고 그 안을 훑은 느낌이다. 아마, 작가 안에 있는 여러 고민들이 누군가가 볼 때에는 ‘자극적이고’, ‘미친(크레이지 사야카 라는 별명처럼)’듯이 보이는 자연스러움으로 써낸듯하다. 완벽하지 않고 미완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더 친근감이 든다. 그 또한 나의 모습과 닮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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