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함께 느낀다는 뜻이다. 이 단어가 바르게 쓰이면 서로를 이해하고 벽을 허무는 데에 요긴하다.
잘못쓰인다면 너를 소외시키는 우리를 따로 만들어버릴 뿐이다.

우리와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본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공동체의 결정이야’ 라는 말을 들으면 의문이 든다. 나 빼고 우리 혹은 공동체인가. 마치, 나도 공동체인듯 하면서, 당신네들과 다른 생각을 가졌으면 공동체가 아니라는 묘한 어감, 사실은 압박이 든다.

아프리카 대륙의 한 나라인 마다가스카르는 말라가시어를 사용한다. 말라가시어에는 ‘우리’라는 단어가 두 개이다. Isika(이시꺄)와 izahai(이자하이) 이 둘이다.
차이는 ‘우리’를 나타내는 범주에 있다. ‘우리’에 청자가 포함된다면 isika, 포함되지 않는다면 izahai이다.
예를 들어보면, ‘우리는 하나다.’ 할때는 isika이다. 반면에, ‘우리 생각은 다르다.’하고 상대방과 구분지을 때는 izahai를 사용한다.

한국말에서의 ‘우리’는 아마도 isika에 가까울 것 같다. 물론 구분짓는 순간 izahai가 되어 버린다.

미투와 위드유가 유행처럼 번졌다. 분명, 사회에 공감을 만들어냈다. 더 나아가(후퇴일수도)아이콘이 되고, 트렌드가 되고, 상품이 되어간다.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생겼다. 이슈의 중심에 있지만 철저한 소외이다. 잘못을 했든 안했든 소외는 맞다.

유명 배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아야 한다. 용서를 구하고 사죄도 해야한다. 우리(Isika)일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죄인으로 의심받는 이일지라도, 죄인이라도, 심한 말로 나쁜 놈이라도, 그들도 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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