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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 다룰 나라는 방글라데시 입니다.





전체 목차는 위와 같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과거(역사)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고대부터 현대의 방글라데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2세기 이전 방글라데시의 역사는 인도 뱅갈지방 역사와 겹친다. 문명이 존재했고, 마우리아, 굽타 등 제국 등 영향권에 들어갔다.

12세기 이후, 아랍 상인들에 의해 이슬람이 전파되었고, 이후 뱅골지방, 그중에서도 뱅골 동부는 무슬림이 다수를 이루게 되었다.


그 후, 벵갈 술탄국으로 벵골 국가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고, 이후 무굴제국에 정복당했다가 무굴제국이 쇠퇴하면서 벵골 나왑국이 독립되었다. 이후, 인도 마라타왕국에 정복되었다가 영국에 의해 인도령 내에 속한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영국은 식민지를 다스리는 입장에서, 인도령의 힘을 분리시킬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행정적 편의라고 말은 했지만 종교로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서뱅골(지금의 방글라데시 지역)을 분할하는 ‘뱅골 분할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대해 뱅골인들은 반발을 일으켰고, 이는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어 영국은 ‘뱅골 분할령’을 철회한다.

식민지 시절, 힌두는 영국에 호의적이었지만 무슬림은 그렇지 않았다.(한국으로 치면 일제시대 친일파나 군부시대 군인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까. 개인의 이야기로 들어가보면 사정은 다를 수 있지만, 추상적으로 설명을 위해 분류를 위와 같이 해볼 수는 있다.)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자라나고 있었다. 여기에서 힌두와 무슬림의 차이를 잠시 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인도를 실제로 방문했을 때에 힌두가 주로 사는 지역에 가면 외국인을 신기해 하기도 하고 눈을 마주치면 잘 웃어준다. 그런데, 무슬림이 사는 지역에 갔을 때에는 지나가든 말든 이상할 정도로 눈길한번 주지 않던 기억이 있다. 이 경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외부 세력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있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인도령 국민회의는 힌두교도가 주도하고 있었고, 무슬림은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고 무슬림은 이에 반발하여 전인도 무슬림 연맹을 창설한다.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 분열이 일어난 상황이다.



1947년, 인도령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이 때, 현재의 파키스탄과 동뱅갈이 종교적 이유로 인도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그리고, 동뱅갈은 파키스탄에 병합되어 동파키스탄이 된다. 떨어져 있는 두 땅이 한 나라가 된 것이다.



이렇게 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과 파키스탄에 편입된 동파키스탄으로 나눠졌다. 지리적으로도 떨어져 있고, 등가적 성립이 아닌 편입된 상황에서 두 땅의 관계가 좋을리 없었다. 종교적 문제, 그로 인한 차별 때문에 파키스탄이 인도로부터 분리되었지만 동서간에도 차별이 일어났다. 당시 파키스탄 정부 요직에는 서파키스탄 출신만 주로 임명되었다. 둘 사이는 언어도 달랐다. 동파키스탄은 뱅골어를 사용했는데 서파키탄은 우르드어를 사용하였다. 서파키스탄은 동 파키스탄에 뱅골어가 아닌 우르드어를 쓰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다카(현재 방글라데시 수도)에서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 시위를 군대로 진압하여서 뱅골인들을 자극하였고, 뱅골인들은 아와미 연맹을 결성하였다.

*참고로 시민을 군대로 진압한 것은 큰 문제이다. 군대의 존립목적은 외침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것이다. 시위진압을 경찰이 하고, 군인은 하지 않는 이유이다. 시민을 군대로 제압했다는 것은 이미 그 국가에 속한 사람으로서 인정을 하지 않는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 중에 광주민주화 항쟁이 지금까지도 유독 회자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광주에서도 경찰이 아닌 군대가 시민을 제압했다.



이 둘을 갈라놓는 사건은 하나 더 있었다. 1970년, 역사상 가장 큰 인명피해를 준 사이클론 ‘볼라’가 동파키스탄을 덮쳐 50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그런데, 파키스탄은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원조물을 불공평하게 분배하였고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분노하였다.



이 해 총선에서(1970년), 뱅골인들이 만든 아와미 연맹이 압승해서 과반의석을 확보했다. 당시는 동파키스탄 인구수가 서파키스탄 수보다 많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파키스탄은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총선 무효화를 선언했고, 동파키스탄에서는 다시 폭력시위가 일어났다. 이를 다시 서파키스탄이 군대로 진압한다. 



이 와중에 아와미 연맹 당수인 라흐만은 1971년에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하고 서파키스탄군이 라흐만을 체포하자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독립군을 결성해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을 일으킨다.



이때 파키스탄 군이 방글라데시로 들어와 사람들을 학살하고, 방글라데시 독립군은 인도 국경에서 게릴라 투쟁을 펼쳤다. 파키스탄은 인도 영토를 폭격하고, 힌두 뱅골인들 1000만명이 인도로 피난을 오자 이를 계기로 인도군도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몇번의 전쟁 끝에 결국 방글라데시는 독립한다.



독립 후, 독립을 선언했던 라흐만이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 정치적 혼란과 부정이 만연했다. 쿠데타가 4번 이상 일어났고, 지도자 2명이 암살되었다.

현재는 의원내각제를 취하고 있으며, 정부 거버넌스(통치력)이 낮다.


이번 글은 <방글라데시>의 '과거(역사)'에 대해 다뤄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미래(이슈)'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글을 클릭하여 <방글라데시>에 대한 다른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방글라데시_인트로(Intro)_개요

방글라데시_1. 현재(1)(나라 이름, 국기, 지리)

방글라데시_1.현재(2)(인구 및 경제, 언어, 종교)

방글라데시_3. 미래 그리고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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