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테레즈 라캥


동기

에밀 졸라의 소설, 동명의 영화작품을 기억한다. '테레즈 라캥' 프랑스에 대해 묘한 호감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저게 무슨 뜻일까... 궁금하기도 했다.(사람 이름이었다.) 결국, 고전이어서 선택했다.



내용

1860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펼쳐진 이야기이다. 어린시절 아버지에 의해 고모에게 맞겨진 테레즈, 테레즈의 사촌이자 그녀와 결혼하게 되는 병약한 카미유, 결혼 후 만나게 되는 새로운 남자 로랑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숨은 주인공을 한명 더 이야기하자면 카미유의 엄마인 라캥 부인이다.

사랑에 빠진 테레즈와 로랑은 계획을 꾸며 카미유를 죽인다. 그리고는 죄책감이 불러운 카미유의 유령에 괴로워하다 종국에는 함께 자살을 택한다.


테레즈의 변화

테레즈는 바라는 것도 없는, 무엇을 바라야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여자였다. 모든 일에 수동적으로, 심지어는 결혼조차도 의지없이, 사랑하지도 않는 사촌과 하게 된다. 그런 테레즈가 로랑을 만나 변화를 보인다. 말을 하기 시작하고, 의지를 내비치고, 욕망을 보였다.


숨은 주인공 라캥 부인

마지막에, 라캥 부인은 중풍(?)에 걸린다. 말도, 표현도 못하고 눈뜨고 볼수밖에 없는 몸 상태이다. 그 상태에서 함께 살고 있던 테레즈가 자신의 아들인 카미유를 죽이고, 함께 가담한 로랑과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찌나 충격이었을까. 그 사실을 알리려 모든 노력을 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 테레즈와 로랑의 파국을 보는 것이 삶의 유일한 소망이 되어 결국, 그 소망에 다다른다.

마지막 한 페이지

책의 마지막 한 페이지에서 그 둘은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한다. 그리고 라캥 부인은 그것을 보고 있다. 원래는 서로를 죽이려 했다. 한명은 칼을, 한명은 독약으로 말이다. 그런데, 서로의 무기를 확인한 순간 그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독약을 나눠마셔 함께 죽는다.

아이러니하다. 이 둘은 사랑했다. 첫눈에 반했고, 뜨거웠다. 결혼 후에는 죄책감에 서로를 미워하고 괴롭힌다. 살인을 통해서 이뤄진, 비극을 배태한 결혼이었다. 결국, 그 둘은 마지막 페이지에서야 죽음을 앞두고서야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지체없이 실행한다.



결론

각자의 욕망만을 보고 나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라캥 부인은 자신의 아들만을 위해서 테레즈를 희생시켰다.

카미유는 그런 부인 아래에서 그저 당연히 받으며 자랐고, 그렇게 살고자 했다.

테레즈는 나중에서야 찾은 성적 욕망을 따랐다.

로랑은, 친구의 여자 그리고 재산을 탐했다.

다들, 가엾다. 조금이라도 주변을 돌아봤으면 어땠을까. 나의 결정과 선택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어떠한 영향을 받을지 조금만 고려했다면 어땠을까. 허나, 이런 생각은 싸구려 감상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말이 없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는 가정은 힘이 없다. 이런 세상이다. 이를 인정한 상황에서 나아갈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각자의 저지른 상황을 인정한 다음 걸음은 무엇이었을까. 어디서부터 풀어나갈 수 있었을까. 알 수는 없다.

100인의 배우, 우리 문학을 읽다. 오디오북을 구매한 후, 7권 정도를 들었다.

느낀점이 몇가지 있다.


1. 배우마다 편차가 있다.

편견일지 모르지만, 유명한 배우가 읽어주는 소설은 대부분 듣기에 더 좋았다.

텍스트와 내용, 대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읽는 것이 아니라, 읽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2. 1인칭 소설일수록 듣기에 편하다.

3인칭 소설에 여러 등장인물에, 대화가 많으면, 한명이 나레이션에 여러 역할을 혼자 소화해야 한다.

물론, 일일이 역을 맡아 목소리를 다르게 할 것인가 까지도 배우의 몫일 것이다.(기획 단계에서 이 부분은 연출자가 도움을 주지 않을까)

그런데, 아무래도 1인칭, 독백이 주로 된 소설일수록 듣기에 그리고 느끼기에 좋았다.


3. 텍스트가 없어서 아쉽다.

소설에 가슴을 때리는 부분이 있다. 한글자 한글자를 기억하고 싶은데, 듣고 적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보면서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래 가삿말처럼 파일에 넣어주면 좋지 않을까. 어렵지는 않을 듯 하다.


전반적으로 만족이다. 우리나라 소설이 이처럼 훌륭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작품 하나 하나를 듣는다기보다, 근대를 살아간 여러 옛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나씩 들어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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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아,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읽으려는(들으려는) 마음과 집중력이 있으면 좋다. 라디오 틀어놓듯이, 아무생각 없이 흘려보내기엔 '글', 그리고 그를 읽는 '목소리'가 너무 귀하다. 

"아냐, 제롬. 이젠 늦었어.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를 위해 사랑보다 더 훌륭한 것을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늦었던 거야.

제롬, 네 덕택에 내 꿈은 인간적인 만족이 전락시킬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라갔어."


앙드레 지드가 쓴 좁은 문을 읽었다.

사실, 이 책은 중학교 때 이미 읽어보았지만 서른이 넘은 지금 다시 손에 쥐었다.


이미 유명한 명작을 보거나, 어릴적 보았던 작품을 다시 보았을 때(그것이 영화이든 책이든) 깜짝 놀라곤 한다. 이런 의미였던가, 이런 책이었던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이다.

좁은 문도 마찬가지이다. 대체 내가 중학교 때 이 책을 이해나 하며 읽어내려갔을까 하는 것이었다.


제롬과 알리사는 서로 사랑한다. 그리고, 신에 대한 사랑이 있다. 이 두가지가 둘에게 다 있지만, 제롬은 인간적 사랑에 알리사는 신에 대한 사랑에 무게를 둔다.

제롬은 알리사를 사랑하기 위해,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알리사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제롬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에 방해물이 된다고 생각한다.


기억나는 한 문장은 알리사의 대사이다.


"아냐, 제롬. 이젠 늦었어.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를 위해 사랑보다 더 훌륭한 것을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늦었던 거야.

제롬, 네 덕택에 내 꿈은 인간적인 만족이 전락시킬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라갔어."


맞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위해, 제롬과 알리사는 각자가 그 사랑 보다 더 훌륭한 것을 추구한다. 결국, 때는 늦고 사랑은 성취되지 못한다.

제롬과 알리사 중 누가 옳았을까. 신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 책에 있는 맥락 안에서는 제롬에게 손을 조금 더 들어주고 싶다.

사랑이, 신적 사랑과 인간적 사랑이라는 것으로 이원화될 수 있을까. 이미 그렇게 인식한 순간 그것은 사랑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사랑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늦었을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하는 것 그 자체이다.



소설을 한동안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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