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일까. 역사란 대체 무엇인가. 사학을 전공했지만, 그와는 전혀 무관하게도 여전히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왜냐하면 정해진 답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는 질문할 수 있겠다. 나는 역사를 무엇이라 생각할까? 아니, 인식할까?

역사는 발전하는 것인가 아니면 넓어지는 것인가. 사람, 대상, 혹은 단체는 발전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비정상인 것인가?


밀란 쿤데라의 '커튼'을 읽고 있다.

박웅현씨의 '다시, 책은 도끼다.'를 읽고서 손에 잡은 책이다.

'다시, 책은 도끼다.' 리뷰 링크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대출기한을 연장했다. 천천히 읽고, 또 읽고싶어지는 책이다. 결국, 나는 이 책을 사게될 것 같다. 곁에 두고 계속 꺼내보고 싶은 책이 이미 되었으니 말이다.

책 전체에 대한 리뷰는 아직 멀었지만, 그중 기억해놓고 싶은 부분이 있어 적고 생각을 남기려 한다.


'1부 연속성의 의식 중, ['역사'라는 단어의 다양한 의미들]

"위대한 의사 A는 어떤 병을 고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잇는 치료법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십 년 후 의사 B가 더 효과적인 치료법을 만들어 내고, 그리하여 이전(그러나 천재적인) 치료법은 폐기되고 망각된다. 과학의 역사는 진보의 특성을 지닌다.

 역사의 개념이 예술에 적용되면 진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완성, 개선, 향상을 함축하지 않으며, 미지의 땅을 탐험하고 그것을 지도에 글여 넣으려고 시도하는 어떤 여행에 가깝다."


우리는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낼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자기를 소개할 때, 한 단체가 지나온 길을 설명할 때가 그 때이다. 지금의 '나', 현 상태의 '나'가 있다. 나의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것도 있지만, 선택이 아닌 어떠한 환경들도 지금의 '나'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나는 '진보'하였는가? 실제로 그리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는 믿음이 있다. 그러하다고 믿고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 실제에 조금은 더 근접한 말일까.

자기소개서 쓰기가 왜 어려울까. 대상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이 왜 어려울까. 밀란 쿤데라의 단어를 빌리면 '커튼'을 잔뜩 쳐놓아서이다. 지금의 나는, 도덕적으로 훌륭할까. 낭비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가. 누군가에게 정말 떳떳한 삶을 살고 있을까. 문제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렇다'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모순에 있다. 내가 인생을 똑바로 살아왔다면 나는 발전하고 진보했어야 맞는 말이니까. 그래야 남이 좋아하고, 그것이 '정상'이니까. 하나를 숨기면, 다른 하나를 다시 숨겨야 한다. 숨긴다 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지금의 나로부터 시작해 과거를 더듬으며 사실아닌 과정을 적어내려갈 때에 완성된 것은 역사일지 소설일지 알기 어렵다.


돈키호테가 왜 그리 유명한 소설일까. 현실에 맞서 꿈을 좇은 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여서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은 줄 알았다. '라만차의 돈키호테' 그 이름도 멋지다. 돈키호테는 괴물과 맞서 싸웠다. 충성스러운 하인인 산초가 있다. 사랑하는 공주님을 위해 순정을 바칠 줄도 아는 남자이고, 자신의 신념을 지킬 줄 아는 멋진 사나이로 여행중이다. 똑같은 말이지만 다시 이야기해볼까. 알폰소 키하다라는 정신병자가 소설을 하도 많이 읽어서 스스로를 돈키호테라 이름짓고, 조금 더 정신병자같은 바보인 산초라는 사람을 데리고 다닌다. 풍차를 괴물이라 부르며 달려든다. 옆동네 이쁘지도 않은 한 여인을 공주라고 부르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한번도 본 적도 없고 실재하지도 않는 이를 '사랑'한다라고 한다면 과연 사랑이란 무엇일까. 착한 사람들을 악당이라고 외치며 공격하고, 무전취식하고 때로는 돈도 뜯기며 지금도 계속 돌아다니는 중이다.

돈키호테의 주인공은 하나이지만, 이야기는 두개이다. 우리는 이 두개의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읽을수 밖에 없다. 커튼, 역사, 돈키호테까지 왔다. 지금의 나는 알폰소 키하다이지만, 돈키호테로 남들에게는 소개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렇게 강렬히 믿는다는 것이다. 상황은 꼬이고 악화된다. 내가 아닌 나를 '자신'이라고 믿으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까.

사실 아닌 역사를 나도 모르게 만들어놓고, 마치 나는 진보해야 하는 것처럼 만들어진 나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존재대로 살아라. 자신을 사랑해라. 현재가 너에게 가장 큰 선물(PRESENT)이라는 등의 우리를 위로하는 말들이 있다. 이 말들이 정말 전하고픈 메시지는 커튼을 걷으라는 소리 아닐까. 진보하고 싶다면, 나아지고 싶다면, 조금 더 넓어지고 싶다면, 당신 자신을 똑바로 봐라. 돈키호테로 포장된 누군가가 아니라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자신을 먼저 바라보고 직면해라. 그래야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첫 단추를 끼는 것이 아닐까. 아직도 첫 단추를 끼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인정한 다음에야 우리는 스스로에게 맞는 옷을 고를 자격이 주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아래 내용은 (사)위드에서 각 나라의 기본 정보를 공부하는 

'라마나욧 스터디'를 위해 직접 제작한 자료입니다.

이 글에서 다룰 국가는 캄보디아 입니다.



그 중에서도 역사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후난(Funan) 왕국 86~550년

인도로부터 종교와 정치제도를 들여와 1세기경 캄보디아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후난 왕국이 건립되었다. 3세기 초 왕국의 전성기를 맞아 남쪽으로는 말레이시아, 서쪽으로는 미얀마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며 중상주의 정책을 펼쳐 인도 등의 주변국들과의 무역이 성행했다.

 

첸라 왕국 550~802년

 후난왕국으로부터 독립해 세워진 첸라 왕국은 점차 영토를 확장시켜 7세기에는 후난 왕국을 완전히 정복했다. 이후 8세기에는 육첸라(land Chenla)와 수첸라(water Chenla)로 양분되었다.

 

앙코르 왕국 802~1431년(크메르 제국이라고도 한다.)

 크메르 문명의 황금기라 불리는 앙코르 왕국은 9~13세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캄보디아라는 이름의 유래이기도 하다. 캄보디아의 대표적 유적 앙코르왓(Angkor Wat)이나 앙코르 톰(Angkor Thom)도 앙코르 왕국의 건축물이며, 강력한 정권 하에서 문화적 독창성에 있어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14세기부터 점차 몰락해 1431년 태국에 정복당했다.



*앙코르왓

앙코르왓은 힌두 사원입니다.(wat은 사원이라는 뜻입니다.) 인간과 코끼리의 힘으로만 지었다고 합니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어 대단한 건축기술을 자랑합니다. 역사에서 잊혀져 있다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한 탐험가로부터 발견이 되었습니다. 혹시 ‘화양연화’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이 앙코르왓입니다. 화양연화는 ‘인생에 가장 찬란한 순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처럼 캄보디아 역사에서 가장 빛나게 기억되는 순간인것 같습니다. 캄보디아가 되기까지 많은 국기가 있었는데, 전부 이 앙코르왓이 국기에 새겨져 있습니다.



캄보디아의 암흑기 1431~1863년

15~19세기는 계속적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영토가 축소되어 캄보디아의 암흑기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잦은 침략과 정복을 당했으며, 중국과 일본으로부터도 잦은 외침을 겪었다.

프랑스 식민지배기 1863~1953년

1863년 노르돔 왕이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다는 조약에 서명하고 단계적으로 식민지배를 받았다. 식민지가 되었지만, 이 선택이 없었다면 아마도 캄보디아는 다른 나라에 정복되어 지금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1941년 프랑스 식민정부에 의해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가 왕으로 즉위했다.

크메르 공화국

1954년 프랑스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한 이후, 세계 흐름에 따라 공산주의 자본주의 등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1966년 총선에서 승리한 ‘론 놀’이라는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켜 우익정부를 수립하였고 ‘크메르 공화국’을 만들게 된다. 여기서 우익이란, 긍정적 의미의 민주주의가 아닌 당시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 민주주의를 말한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역사를 이어 보려면, 베트남전을 살펴봐야 한다.

1955년 베트남공화국이 성립했다.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나, 토지개혁도 실패하고 정부는 부패하여 치안이 약화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주의 세력 중심으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만들어졌다.(한국에 있었던 남민전은 배트남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홍세화씨가 대표적 인물이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하에 있던 무장단체가 바로 베트콩이다. 베트콩이 남베트남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정부를 상대로 승리해갔고, 미국이 개입하는데 이것이 베트남전의 시작이다. 



미국의 참전한 이유는 남베트남이 공산화 되도록 놔두면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에서 같은 편인 자본주의 국가들이 하나 둘씩 공산주의화 되고 말 것이라 예상(도미노 이론)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에 미국이 관여한 이유와 비슷하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불리했다. 미국군은 전차와 비행기를 이용하는 구식 전쟁에 익숙했는데, 베트남전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전투는 정글에서 펼쳐졌는데 미국이 자랑하는 중장비를 활용할 수 없었다. 베트콩은 지형에 있숙했고, 유리할 때 싸우고 불리하면 숨는 전략을 펼쳤다. (이 때, 정글숲 풀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고엽제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남베트남은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아 군사연합작전을 수행하기도 어려웠다. 남베트남에 무기를 공급하면, 그 무기들이 북베트남이 약탈해 쓰는 정도였다. 중국이나 주변국 눈치때문에 더 큰 개입도 어려웠다. 전쟁비용도 낭비가 심했다.(100명 상대로 20억 달러 정도를 사용했는데, 1명을 잡은 꼴이었다고 한다.)



베트콩이 유리한 이유 한 가지가 더 있는데, 호치민 루트이다. 호치민 루트는 북베트남에서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거쳐 남베트남 전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루트이다. 이 루트로 물자보급, 군 재정비, 휴식 등이 이뤄졌다. 캄보디아나 라오스 입장에서는 이를 막을 능력도 없었고, 특별히 피해를 주지도 않았으니 별 대처를 하지 않았다. 미국은 호치민 루트를 막기 위해, 캄보디아와 라오스 전역을 폭격하는데 이가 비밀전쟁이다. 



미국은 성과없는 소모전을 이어갔다. 남베트남은 의지를 잃었고, 도와줄 명목도 사라진 전쟁이었다. 1973년, 미국과 북베트남은 파리에서 ‘베트남 평화협정’을 맺고 미군은 철수한다. (미국은 이 의미없는 전쟁을 빠져나오기 위해 여러 고민을 했는데, 이 때 나온 단어가 지금까지도 쓰이는 출구전략(Exit Strategy)이다.) 결국 미군은 철수했고, 베트남은 공산화가 되었다. 단순하게 이야기한다면, 마치 한국전쟁 때에 북한이 승리해서 지금 남한도 공산화가 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크메르 루즈는 1976년 ‘민주 캄푸치아’로 국명을 개칭한다.

크메르 루즈는 극단적 공산체제를 추구하고, 당시 크메르 루즈 리더였던 폴 포츠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흉내내는데, 이 때 일어난 사건이 ‘킬링필드’이다. 

처음에는 지식인들(안경을 쓰거나, 똑똑해 보이거나, 손이 곱거나, 영어를 알아듣거나)을 잡아 처형했고, 가진자들, 비협조적인 자들 등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단순히 처형 뿐 아니라, 강제노동으로 인한 과로사, 굶주림과 질병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뿐만 아니라, 보복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처형당한 사람들의 가족들, 갓난 아이까지 죽였다. 독일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처럼 소수민족도 처형했는데, 그 중에는 베트남계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150만명이 사망하였고, 극단적 농본주의 정책으로 비효율적인 농업이 이뤄졌다. 이에 가뭄이 더해져서 출생률이 떨어지고 기아 상황이 심각했다.

캄보디아에 살고있던 베트남계 사람들과 친 베트남인들은 베트남으로 다수가 난민으로 건너간다. 베트남은 난민인 ‘삼린’을 내세워, 크메르루즈를 누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민주 캄푸치아)를 세운다.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은 베트남 괴뢰 정권이라는 이유로 세계 각국에게 정당한 나라로 승인을 받지 못했다. 이후, 크메르루즈 리더인  폴포트를 포함하여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에 대항하는 ‘캄푸치아 연합정부’를 설립하고 이렇게 캄보디아 내전이 시작된다. 웃긴 상황은, 베트남전에 패한 미군이 크메르루즈를 지원하여 베트남에 대항한 것이다. 
이 양쪽 모두 이기기 위해, 민간인을 징집하고 소년병을 동원하고, 군비를 대기 위해 마약을 팔고, 전국에 지뢰를 깔았다. 사상자가 속출한건 물론이고, 농업도 복구되지 않았으며 기아와 역병도 창궐했다. 킬링필드 이후에, 이 내전시기에도 수십만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된다.


1991년, 캄보디아 계파들과 세계각국이 참여한 파리평화협정으로 내전이 끝났다. 

1993년 입헌군주제로 캄보디아 왕국이 설립되어 현재까지의 역사가 이어진다. 



아직도 캄보디아는 전쟁에 의한 피해를 복구중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킬링필드와 내전으로 인해 지식층이 단절되었고, 전쟁과 살육에 대한 사회적 트라우마가 아직 사람들에 있다. 

몇년 전, 캄보디아 기획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킬링필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쟁시절 개들이 사람 팔을 물고 돌아다닌 장면을 흔하게 보아서이다.

그리고, 2016년 캄보디아 킬링필드 핵심전범 중 2명이 종신형이 확정되었다.



이번 글은 캄보디아의 '역사'에 대해 다뤄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캄보디아의 종교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를 클릭하여 캄보디아에 대한 다른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캄보디아_1.기본정보(나라이름, 지리, 기후, 인구, 언어, 역사)

캄보디아_3. 종교(구성, 정령신앙, 기독교)

캄보디아_4. 이슈 및 보건영양

캄보디아_5. 정리


여러 지도나 문서를 찾아보면, 미얀마는 버마라고도 불리며 두 이름이 같이 쓰인다. 버마는 브라만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했다. 이 글에서는 편의를 위해 이하 미얀마로 통칭하겠다.
대한민국은 1991년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가 내린 결정에 따라 미얀마라고 부르고 있다. 외국에서는 미얀마 보다는 버마라는 이름을 주로 쓴다. Myanmar known as burmese 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왜 한 나라에 다른 두 이름이 공존하는 것일까. 먼저 미얀마의 역사를 봐야 한다.




대한민국 이전에 조선왕조가 있었던 것처럼, 버마 왕조가 있었다. 버마 왕조의 역사는 영국에 의해 1885년 끝이나고, 1886년에 영국령 인도에 속한 한 주로 존재했다. 1937년에는 버마가 인도로부터 분리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1942년 아웅산과 일본군이 미얀마에 들어와 일본 식민지가 시작된다. 아웅산은 미얀마의 독립운동 혁명가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현 미얀마를 이끄는 아웅산 수찌가 아웅산의 딸이다. 아웅산은 미얀마 독립을 목적으로 일본군과 함께 미얀마에 들어왔으나, 영국보다 잔인한 일본군의 통치를 보고 생각을 바꾼다. 1945년, 일본군이 패망하고 아웅산은 영국 정부와 담판을 지어 독립을 이끌어냈다. 아웅산은 미얀마에서 ‘민족의 영웅’, ‘국부’로 불린다.


독립 후, 버마연방이 설립되었다. 민주적 정치가 행해졌으나, 1962년 네윈 장군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군부독재가 시작되었다. 이후 군부를 향한 계속된 민중 저항이 있었다.
2010년에는 길었던 군부독재가 끝나고, 민주적 투표가 이뤄졌다. 이 투표에서 승리한 당은 바로 군사정권의 지원을 받는 당이었다. 형식적 민주화는 되었으나 군사정권만 연장된 꼴이었다. 이후 2015년에 개최된 총선에서 야당인 국민민주연맹이 상하원·지역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며 정권교체를 확정했다. 국민민주연맹을 이끄는 당수가 바로 아웅산 수찌이다. 이렇게 2015년에야 군사정권에서 벗어나 실질적 민주화를 이루었다.



미얀마 이름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버마와 미얀마, 이 둘로 국호가 병용되고 있었다. 앞에 언어에서 구어와 문어가 다르다고 했는데, 구어로는 버마, 문어로는 미얀마였다.
1989년, 군부에서 미얀마의 공식 명칭을 미얀마로 변경했다. 버마라는 이름이 영국 식민지시대의 잔재라는 이유와 주류 민족인 버마족 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포괄하겠다는 의미에서였다. 현재 두 개 이름이 혼용되는 것은 이에 대한 반발이다. 군부를 향한 저항은 국민 정서를 대변한다. 국민들은 군부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외국 언론사 및 시민단체, 정부 등도 마찬가지였다. 미얀마는 정통성도 정당성도 없는 군부가 지은 이름이다. 군부를 인정치 않는 사람들은 미얀마 대신 버마라는 단어를 쓴다. 외국에서는 ‘버마라고 알려진 미얀마’라는 표현을 쓴다. 한국 일부 언론사도 미얀마 군부를 인정치 않는다는 의미로 버마라는 표현을 쓴다. 물론, 공식 명칭은 미얀마이다.
이렇게, 미얀마는 민주화 역사가 짧다. 군부 잔재도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위 정보들은 서적과 인터넷 검색, 저자의 기본상식을 토대로 쓰여졌습니다.

한 나라에 대해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텐데, 크게는 직접 살아보는 방법과 자료 및 문헌조사로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조사도 하고 살아도 보면 좋겠지만, 외부에서 검색할 수 있는 자료는 이정도구나 하는 수준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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