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의 세례 - 이익상 저


100인의 배우, 우리 문학을 읽다. 그중 '흙의 세례'를 들었다.

이 소설은 엄효섭 배우님이 읽으셨다. 사실, 이름만 들어서는 누군지 알기가 힘들어서 검색을 해보았다. 얼굴을 보니, 드라마에 자주 나오시는 분이었다. 얼굴을 보니, 이 분과 마주앉아 읽어주는 느낌이 든다.

1925년 문예지 개벽에 발표된 단편소설이며, 낙향한 지식인 부부의 이야기이다. 지식인의 자기모순과 한계를 나타냈고, 귀농후 아무일도 하지 않는 남편 명호와 열심히 해보려는 아내 혜정의 작은 갈등 이야기를 그린다.

위 간단한 설명은 오디오북에서 엄효섭 배우님이 읽어주신 것을 참고했다.

듣던중 집중하게 되는 인상적인 부분들이 있었다. 주로 남편 명호의 생각을 독백처럼 읽어주는 부분이었다.

1

명호는 항상 자기가 자신의 행동을 조종할 만한 의지의 힘이 박약하여 필경은 아무 긴장한 맛이 없는 생활조차 마음대로 얻을 수 없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의지가 박약한 것만이 원인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일과 또는 귀와 눈에 활동이 있는 이상에는 반드시 아니 보이고, 아니 들리면 아니 될 여러 가지 사상이 도리어 자기라는 육(肉)과 영(靈)의 화합이 아니오, 혼합인 덩어리를 절망의 구렁으로 떠미는 것이 생에 대한 권태를 일으키고, 이 권태가 다시 얼마 남아있지 못한 기력을 소모함인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다른 소위 승리자와 같이 무엇이든지 이기고 나아가지 못하는 이 섬약한 의욕에는 증오를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이러한 증오를 느끼게 됨도 그가 어떠한 동기로든지 무슨 충동을 받을 때의 일이오, 평상시에는 염두에 올리지도 않은 것처럼 태연해 보였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흐리멍덩한 것은 결코 그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떠한 때에 냉정히 자신을 비판할 때에는 자신에 반드시 두 가지의 다른 형식으로 표현된 이중성격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결국은 자기 자신의 불순을 느끼는 동시에, 다른 모든 것이 불순하여 보였다.

따라서 모든 것을 부정하는 처지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그에게는 제왕도 없었다. 모든 권력도 없었다. 이상도 없었다. 있다 하면 그것은 자기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생활의 힘이었다. 날카로운 비수를 가슴에 댄다 하여도 그의 전 인격이 그것을 두려워함이 아니요, 다만 생활하겠다는 본능이 그것의 위혁(威嚇)에 전율할 뿐이었다. 이렇게 대담하면서도 어떠한 때에 곁에서 보는 사람이 웃을 만큼 쉽게 그는 희로의 감정을 나타내었다. 또는 자기와 친한 친구나 친척이 죽었다는 말을 들을 때에 오히려 눈썹 하나를 까딱하지 않고 “사람이란 죽는 것이니 할 수 없지. 언제든지 반드시 죽을 터이니까…… 그가 사람인 이상에는…….”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저 사람에게는 뜨거운 피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의심할 만큼 냉혹해 보였다. 그러한 대신에 어떠한 때이면, 소설 같은 것을 보다가도 눈물을 흘리게 되어 보드라운 감정을 가진 것도 보였다.


나는 무엇일까? 지금, 이순간까지 나를 형성해오고 나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철학이, 누군가는 종교가, 누군가는 함께한 사람에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모든 것에 영향을 받았다.
그런 앎과 깨달음이 지금 내 삶의 모습과 나아가는 방향에 일치된다면 어찌나 좋을까. 명호는 지금 그게 안되나보다. 

"여러 가지 사상이 도리어 자기라는 육(肉)과 영(靈)의 화합이 아니오, 혼합인 덩어리를 절망의 구렁으로 떠미는 것이 생에 대한 권태를 일으키고, 이 권태가 다시 얼마 남아있지 못한 기력을 소모함인 것"

하..! 하고 감탄한 부분은 '화합이 아니오, 혼합인 덩어리'라는 것이다. 부품들의 합과 완성품은 다르다.
모인 부품들을 보는 것만으로는 완성품이 될지 알기 어렵다. 복잡한 물건일수록 그러한데, 한 사람의 생각과 마음은 어떠할까.
화합되지 않은 사상들은, 기대와는 달리 그저 혼합된 덩어리와 같다.
자동으로 어떠한 형체를 갖춰주면 좋으련만, 덩어리에 불과하다. 노력이 부족한 탓일까.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을 보니 그러한 것이다. 현실은 이상에서 참 멀다.


2

그러면요 "지금 하는 일은 장래에 생활을 얻으려고 미리부터 준비하여 두는 노동의 연습이라 하면 어떠할까요. 그러면 우리의 지금 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일평생 사업으로 여기고 노력하는 사업의 신성을 더럽히는 일이 없게 되겠지요. 그리고 자기가 생활에 대한 어떠한 기능을 얻게 되는 셈이겠지요.”

명호의 말이 끝나매 혜정은 빙그레 웃으며,

“그러면 다른 사람들의 신성한 직업을 유희로 아는 것과 같은 모독은 없겠지요. 우리의 태도를 변호하는 말만이 물론 아니겠지요.”하였다.

명호도 따라 웃었다.

명호는 농촌으로 돌아오던 날부터 마음속에 여러 가지 갈등과 모순을 느끼었다. 이것은 자기의 일한 보수가 넉넉히 생활을 지탱치 못하고, 다만 부모의 약간 유산으로 그날을 지낸다 하면, 도리어 다른 사람의 생존을 위하여 일하는 직업의 신성한 것을 모독함이 아닌가 생각함이었다. 처음에는 자기가 농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 하였다. 농촌에 파묻히는 그것 보다도 자기에게는 적당한 다른 무엇이 반드시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핼쑥한 살 밑에서 새파란 심줄이 줄기줄기 비치는 손을 들여다볼 때에 또는 아내의 고운 얼굴빛과 연약한 태도를 바라볼 때에, 그러한 느낌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리고 또 그 사상으로써 톨스토이의 참회 생활 가운데에 농부 노릇한 것과 또는 일본의 어떠한 장군이 농부를 모방하여 똥통을 매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의 직업을 유희시한 것이라 하여 위선이라 단정을 내린 자신으로, 이러한 모독을 다시 하게 된 것을 인생의 어떠한 보복이라 하였다.

그런데 자신의 이 사회에 대한 조그만 불평, 또는 여러 사람 가운데에 뜻을 얻지 못하였다는 실망 그것만으로 온 인생에 대한 자기의 인생관이 변하여, 이러한 농촌을 찾게 된 것은 냉정한 생각이 그를 에워쌀 때에는, 그러한 소극적인 행위를 그의 양심은 부인하였다. 그리고 또는 자신으로 ─ 어떠한 개념 생활에 열중하였던 그로서, 한편 호주머니에 폭탄을 넣고 다니는 테러리스트가 되지 못한 것은 큰 유감이었다. 그의 천연의 유나(柔懦)한 성격이 그것을 허락지 아니하였다. 그는 항상 혼돈한 사회에서 몹시 자극받을 때에는 어떠한 테러리스트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극단이라 할 만한 은둔적 생활을 하는 것이 자신에 배태(胚胎)한 생명력을 신장시킴이라 하였다.

명호는 이 두 가지를 두고 오랫동안 생각한 결과, 그는 T라는 남쪽 나라의 따뜻한 지방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의견에 대하여는 처도 찬성하였었다. 이와 같이 테냐 퇴(退)냐 하는 갈림길에서 퇴를 취한 그로서도 오히려 다른 사람의 직업 모독함이라 하는 데에서 그동안 오래괭이 잡기를 주저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 하는 일은 장래에 생활을 얻으려고 미리부터 준비하여 두는 노동의 연습이라 하면 어떠할까요.
그러면 우리의 지금 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일평생 사업으로 여기고 노력하는 사업의 신성을 더럽히는 일이 없게 되겠지요. 그리고 자기가 생활에 대한 어떠한 기능을 얻게 되는 셈이겠지요.”

어떠한 동기 혹은 인과에 의해 지금 나를 설명해야할 때가 있다.
그 원인이 의지와 능력이 부족해서일 경우 나도 모르게 핑계를 대고 만다.
내가 선택했지만 선택지가 하나뿐이었다면 강제와 무엇이 다를까.
그 강제되는 상황이 '나'라면 속이 터질 것이고, 세상이라면 억울하겠지만 어려움은 혼자만 오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적어도 나는 핑계를 댄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이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있을꺼야! 하고.


농촌에 파묻히는 그것 보다도 자기에게는 적당한 다른 무엇이 반드시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핼쑥한 살 밑에서 새파란 심줄이 줄기줄기 비치는 손을 들여다볼 때에 또는 아내의 고운 얼굴빛과 연약한 태도를 바라볼 때에, 그러한 느낌이 더욱 간절하였다.


원하지 않았던 선택에는 항상 뒤에 숨어있을것만 같은 다른 의미가 담긴다. 막연한 믿음일지도 모른다. 그 믿음으로 살아가지만, 때때로 믿음에 의심이 생긴다. 내 손에 있는 새파란 심줄이나, 아내의 연약함을 내가 보아버렸을 때처럼.


3

“나는 테러리스트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한 모험할 성격이 없는 것은 큰 유감이다. 명예와 공리만을 위하여 인간의 참생활에서 거리가 너무나 먼 단적 문제에만 구니(拘泥) 하는 이매망량(魑魅魍魎) 과는 언제까지든지 길을 같이할 수 없다. 나는 그러한 비열한 생활 수단을 취하여 사회적으로 성공자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야심을 속이지 않고 진실한 내면의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실패자가 됨을 도리어 기뻐한다.

나는 이 첫 시험을 다른 사람의 직업의 신성을 더럽혔다. 그러나 나는 내의 생을 개척하는 길은 다만 여기에 있음을 믿은 까닭에, 때의 늦음을 돌아보지 않고 살아가는 첫 연습을 하였다. 첫걸음을 배웠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 영원히 우리의 시달린 영(靈)을 잠재워줄 것으로 믿을 수는 없다. 나는 이 세상에 믿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 생활을 다시 핍박하는 그때가 오면, 나는 다시 이곳에 불을 놓고 밭을 헤뒤치고 논을 내버리고 표랑의 길을 떠나자! 그러할 때에 같이 갈 이 없으면, 나는 혼자 가자!

끝없는 곳으로. 그러다가 들 가운데에 거꾸러져 죽어도 좋고, 바다에 빠져도 좋다! 나는 그때를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그때를 도리어 반겨 맞이하자!

그때야말로 내외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줄 터이니까……. 그러나, 그러나 오늘의 흙냄새는 사향(麝香)보다도 더 향기로웠다. 나는 언제든지 그러한 흙냄새를 맡고 싶다……. 나는 비로소 흙의 세례를 받았다. 흙의 세례를 받았다.”


"나는 그러한 비열한 생활 수단을 취하여 사회적으로 성공자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야심을 속이지 않고 진실한 내면의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실패자가 됨을 도리어 기뻐한다."

희망과 믿음이 아닌 집착과 아쉬움으로 그 자리에 머무는 사람들이 있다.
자리는 좁아지지만, 다음 걸음을 도무지 내딛지 않고 눌러앉는 이들이 있다.
명호는 사회적 실패자가 됨을 기뻐했다. 적어도, 이 부부의 입장에서는 농촌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 더 삶에 진실된 행동이었기에.


"끝없는 곳으로. 그러다가 들 가운데에 거꾸러져 죽어도 좋고, 바다에 빠져도 좋다! 나는 그때를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그때를 도리어 반겨 맞이하자!

그때야말로 내외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줄 터이니까……. 그러나, 그러나 오늘의 흙냄새는 사향(麝香)보다도 더 향기로웠다. 나는 언제든지 그러한 흙냄새를 맡고 싶다……. 나는 비로소 흙의 세례를 받았다. 흙의 세례를 받았다.”

그 때를 기다린다. 그 때가 올 것이라는 소망이 생겼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 때에 대한 기대감도 생겼다.
오늘 내가 밟는 향기로운 흙이 그 때까지 나를 기다리게 할 수 있을까.
명호는 흙의 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구원의 순간을 맞이했다.


Fin

혜정은 신문을 한참 아무 말 없이 굽어보다가 남편을 불렀다.
이것 보세요 정숙이가 “ . 벌써 시집을 가서 훌륭한 가정의 주부가 될 모양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혜정은 신문을 자기 남편 앞으로 내놓았다. 명호는 아내가 가리키는 곳을 내려다보았다.
S신문의 가정란에 서양식으로 꿈인 서재를 배경으로 삼고 박은 정의 부처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기사에는 두 사람이 다 사회적으로 의의 있는 사업을 한다는 것이 조금 과장적으로 쓰였었다. 그리고 특별이 정숙은 여류 문학가라는 것을 기재하였다.
“벌써 정숙이가 사회에 명망 있는 여류 작가가 되었어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근본이 다른 것이에요!”
“왜요?”
“정숙이는 저보다 나이도 어리지마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사람의 참속은 모르고 지내왔어요. 졸업한 뒤에는 물론 서로 그뿐이었지요.”
명호는 이와 같은 처의 말에는 어떠한 의욕이 이것을 말하게 한 것을 알았다. 그의 마음에도 아직도 자기 명망이란 것을 무엇보다도 좀 더 날리어 보자는 본능이 대단 굳센 것을 짐작하였다. 이것을 상상할 때에 명호의 마음을 점령한 고적은 그 두 동갑 되는 힘으로 그를 괴롭게 하였다. 명호는 다시 눈을 감았다.
혜정은 가만히 앉아 신문을 보다가,
“우리가 이대로 여기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아무 알 사람이 없겠지요. 이 동리 사람 외에는, 그리고 하려고 하는 사람도 없겠지요? 그저 어떠한 늙은이와 늙은이가 살다가 죽었다고 하겠지요? 혹 자손이 생긴다면 그것들이 조금 섭섭한 생각을 하다가 얼마 지내면 그대로 잊어버리겠지요, 네?”
명호는 아무 말 없이 있었다.

그들은 정신이나 육체에 한가지로 피로를 느끼었다. 어둠의 장막이 고적과 싸우는 두 혼을 덮었다.


흙의 세례로 구원을 받았다 생각했건만, 새로운 상황은 다시 이 부부를 흔든다. 나와 같은 위치에 있던 누군가가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말이다.


"그들은 정신이나 육체에 한가지로 피로를 느끼었다. 어둠의 장막이 고적과 싸우는 두 혼을 덮었다."


구원은 받았으나, 그 구원을 끝까지 이뤄내기는 이토록 어렵다. 기쁨과 깨달음의 뒤에는 항상 실망과 아픔이 기다리고 있다. 진리를 알아도, 진리대로 살아가기는 참 어려운 것처럼.

부부는 무얼 깨달았을까, 마지막으로 보인 모습은 어둠이다. 어둠 안에 두 혼이 갖혀버렸다.

아마 다시 빛이 어둠을 가를 것이고, 어둠은 다시 찾아올 것이다.

기대하는 바는, 이 흔들리는 과정마저 그 때를 위한 준비였으면 한다.

그래서, 그 때를 보았으면 좋겠다. 이 날을 위한 준비였구나. 하며 슬며시 미소지을 수 있도록.



100인의 배우, 우리 문학을 읽다. 오디오북을 구매한 후, 7권 정도를 들었다.

느낀점이 몇가지 있다.


1. 배우마다 편차가 있다.

편견일지 모르지만, 유명한 배우가 읽어주는 소설은 대부분 듣기에 더 좋았다.

텍스트와 내용, 대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읽는 것이 아니라, 읽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2. 1인칭 소설일수록 듣기에 편하다.

3인칭 소설에 여러 등장인물에, 대화가 많으면, 한명이 나레이션에 여러 역할을 혼자 소화해야 한다.

물론, 일일이 역을 맡아 목소리를 다르게 할 것인가 까지도 배우의 몫일 것이다.(기획 단계에서 이 부분은 연출자가 도움을 주지 않을까)

그런데, 아무래도 1인칭, 독백이 주로 된 소설일수록 듣기에 그리고 느끼기에 좋았다.


3. 텍스트가 없어서 아쉽다.

소설에 가슴을 때리는 부분이 있다. 한글자 한글자를 기억하고 싶은데, 듣고 적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보면서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래 가삿말처럼 파일에 넣어주면 좋지 않을까. 어렵지는 않을 듯 하다.


전반적으로 만족이다. 우리나라 소설이 이처럼 훌륭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작품 하나 하나를 듣는다기보다, 근대를 살아간 여러 옛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나씩 들어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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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아,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읽으려는(들으려는) 마음과 집중력이 있으면 좋다. 라디오 틀어놓듯이, 아무생각 없이 흘려보내기엔 '글', 그리고 그를 읽는 '목소리'가 너무 귀하다. 

"아냐, 제롬. 이젠 늦었어.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를 위해 사랑보다 더 훌륭한 것을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늦었던 거야.

제롬, 네 덕택에 내 꿈은 인간적인 만족이 전락시킬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라갔어."


앙드레 지드가 쓴 좁은 문을 읽었다.

사실, 이 책은 중학교 때 이미 읽어보았지만 서른이 넘은 지금 다시 손에 쥐었다.


이미 유명한 명작을 보거나, 어릴적 보았던 작품을 다시 보았을 때(그것이 영화이든 책이든) 깜짝 놀라곤 한다. 이런 의미였던가, 이런 책이었던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이다.

좁은 문도 마찬가지이다. 대체 내가 중학교 때 이 책을 이해나 하며 읽어내려갔을까 하는 것이었다.


제롬과 알리사는 서로 사랑한다. 그리고, 신에 대한 사랑이 있다. 이 두가지가 둘에게 다 있지만, 제롬은 인간적 사랑에 알리사는 신에 대한 사랑에 무게를 둔다.

제롬은 알리사를 사랑하기 위해,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알리사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제롬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에 방해물이 된다고 생각한다.


기억나는 한 문장은 알리사의 대사이다.


"아냐, 제롬. 이젠 늦었어.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를 위해 사랑보다 더 훌륭한 것을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늦었던 거야.

제롬, 네 덕택에 내 꿈은 인간적인 만족이 전락시킬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라갔어."


맞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위해, 제롬과 알리사는 각자가 그 사랑 보다 더 훌륭한 것을 추구한다. 결국, 때는 늦고 사랑은 성취되지 못한다.

제롬과 알리사 중 누가 옳았을까. 신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 책에 있는 맥락 안에서는 제롬에게 손을 조금 더 들어주고 싶다.

사랑이, 신적 사랑과 인간적 사랑이라는 것으로 이원화될 수 있을까. 이미 그렇게 인식한 순간 그것은 사랑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사랑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늦었을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하는 것 그 자체이다.



소설을 한동안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다시 읽어야겠다.

오디오북 '100인의 배우 우리 문학을 읽다'를 큰맘먹고 구매했다.

말그대로, 우리 문학을 100인의 배우분들이 하나씩 잡고 읽어준 오디오북이다.


책은 당연히 종이책이라고 생각했다. 질감, 냄새, 어쩌구 등등 책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적 단어들이 그 이유이다.

자유도가 높았던 어릴 때에는 종이책만으로 독서가 가능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유마저도 내것이 아니게 되었다. 뭔가 쓰다보니 슬픈데...ㅋ 구속은 책임을 의미한다.

혼자 좋을대로 살아가는 삶보다도, 함께 의미있게 살아가는 삶에 나는 더 가치를 둔다. 그러니 괜찮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유의 구속은 실물책을 항상 소지할 수 없게하고,

책을 읽고자 하는 시간에 갑자기 다른 일을 해야 하며,

빈손으로 있을 때에 갑자기 시간이 남는 등의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전자책으로 잠시 이동한 적이 있었다. 이미 유명한 '리디북스'를 이용해서 말이다.


나는 아직도 리디북스의 팬이다ㅋ 책을 살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넘어가고만 싶은 상술은 정말 박수를 쳐주고 싶다. 상술이라 표현해 미안하다. 

건강한 욕구를 잘 생겨나게 해서 충족시키는 긍정적 상술이라 생각한다. 한때는 정기결재까지 해가며 책을 모았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내가 읽는 것보다 사는 것에 집중한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는 정기결재는 멈춘 상태이다.


전자책으로 옮겼는데... 조금 더 어른이 되었는지, 이제는 전자책 조차도 손에 잡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옮겨간 것이 오디오북이다. 옮겼다기보다는 리디북스 책들을 음성으로 '들을' 수 있었다.

대신 철수와 영희라는 남자 혹은 여자의 목소리로, 기계음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를 체험하며 이또한 신세계라 생각했다.

운전하면서 또한 단순작업을 하며 책을 읽을(들을) 수 있었으니.


그러다, '100인의 배우 우리 문학을 읽다'를 알게 되었다.

카카오 메이커스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알라딘을 통해 구매했다.

(난 알라딘도 좋아한다. 작가를 존중하는 건강한 유통망을 가진 책 회사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언젠가 쓸일이 있을까...)

언젠가 불법유통망에 퍼질 것 같다. 하지만, 하늘과 나 자신에 당당하도록 구매를 했다ㅋ


처음 배송받았을 때는 아래와 같다.


비닐포장을 벗겨내면, usb메모리가 꽃혀있는 아크릴판과 얇은 책자로 나뉘어진다.

책자에는 각 작품과 그를 읽은 배우의 사진과 설명이 간단히 되어 있다.

usb에는 mp3형태로 오디오북들이 한 파일씩 들어있다.

받자마다 아이폰에 옮겨넣었다. 음악 넣듯이 넣으면 된다.

이런 식으로, 온 가족에게 이 책을 공유하는것도 가능하겠다.


시험삼아 하나를 틀어보았다.

1. 배우의 인사

2. 작품의 시대적, 문학적 설명

3. 소설 읽기

요렇게 세 단계로 이뤄진다.


아직 진득하게 들어보지는 않았다.

장거리 운전을 해야할 때, 단순작업을 해야할 때, 도저히 아무것도 능동적으로 하고 싶지 않은 정신상태일 때, 들을 생각이다.

그런 때를 일부러 만들어야지 보다는, 이미 평소에 오디오북 형태를 많이 들어온 시점과 타이밍이 있다.

항상 그랬듯, 들을 생각이다.

다음주에 홀로 부산을 왕복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그 때 들어봐야지..ㅋ


하지만..!

샘플로 풀려있는 최민식씨가 읽은 오발탄은 이미 들어보았다. 그를 통한 느낀점을 설명할까 한다.

배우가 읽는다. 이미 유명한, 혹은 얼굴을 보면 어떤 작품에 나왔는지는 알 정도의 인지도가 있는 배우들이 읽어준다.

그 배우들이 작품을 읽어준다. 긴장감을 유지하며, 목소리도 흉내내며 말이다.

결국, 한 소설도 다른 배우가 읽는다면 그 결과물은 (당연한 소리를 또 하고 있다.)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ㅇㅇㅇ가 읽은 ㅇㅇㅇ의 ㅇㅇㅇ'가 제목이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나와 같이 시간과 공간과 자유가 조금씩 좀먹어들어가고 있다면:)

그만큼 책임과 역할이 더해지는 삶이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책을 다시 잡아보고 싶다면,

조금은 편한 방법으로 그 시작에 들어가고 싶다면,


오디오북을 추천하고 싶다:)

책을 보게된 동기


인도인에게 힌두란 어떤 의미인지를 정리해야할 일이 있었습니다. 포스팅 할 예정인데, 포스팅이 되면 아래에 남길 예정입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힌두는 인도인에게 민족 정체성과 같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민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알고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한국 땅에서만 살면 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가. 북한과는 왜 우리가 한 민족인 것인가.

해외에 사는 교포들도 한 민족일까.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외국 국적을 취득한 이들은 우리 민족이라 할 수 있을까.

새터민 혹은 다문화 가정은 우리 민족일까.


물론, 한 민족이라 생각합니다. 그 생각에는 남들이 그렇다니까, 여태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아니면 안될것 같으니까 하는 마음도 들어가 있음을 조심스레 고백합니다. 사실 별로 생각해보지를 못했습니다.

올림픽에서 남북이 공동입장 하는 것을 보며 울컥 하면서도, 무엇이 내 마음을 그렇게 건드리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민족이란 정말 무엇인가? 이 궁금증에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목차

제 1장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

제 2장 민족이란 무엇인가


내용

이 책은 1882년에 르낭이 소르본 대학에서 <민족이란 무엇인가> 라는 이름으로 한 강연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내용은 목차와 같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래서 민족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합니다. 먼저 이 책이 쓰인 의도 를 보아야 합니다.

'알자스 로렌'이라는 지명은 한번정도 들어보았을 것 같습니다.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에서 배경이 되는 지명입니다. 과거 프랑스와 독일이 벌인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하게 되고, 그 결과 알자스 로렌 지방은 독일에 넘어가게 됩니다. 학교에서는 프랑스어가 아닌 독일어를 배우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을 하는 내용이 바로 '마지막 수업'의 내용입니다.

'마지막 수업'과 같은 역사적 배경에서 르낭은 이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민족이란 무엇인가?

르낭은 민족 개념에 대해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로 민족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논의입니다. 인종적 공동체가 가지는 항구적 특징이 민족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종족이고, 조상이 같으며, 종교가 같고, 언어나 문화가 같고, 같은 영토에서 살고 있다면 한 민족인 것입니다. 공통된 역사적 사회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면 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민족을 근대화의 부산물로 간주하는 논의입니다. 민족은 ‘계약적 형태’이고, 정치적 실재라는 것입니다. 민족주의는 영원하지 않으며 근대화와 도시화라는 조건 속에서 발현한 이데올로기일 뿐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민족 성원의 의지,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르낭이 하고싶은 말은 두번째 논의입니다. 알자스 로렌 지방이 독일에 넘어갔지만, 그 땅에 사는 이들은 의지적으로 프랑스인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알자스 로렌 지방이 독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그 과정에서 민족에 대한 논의를 펴 강연과 이 책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결국,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민족에 대해 이야기함으로 알자스 로렌 지방이 프랑스에 돌아와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 이 책 내용입니다.


느낀점

그래서, 민족이란 무엇인가? 나는 민족을 무어라 생각하고 있었는가?

두 논의에 다 찬성합니다. 기본적으로 첫째 논의를 배경에 깔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허나, 세계가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봐도 새터민에 다문화 가정 아이들, 국제결혼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적은 한국인이 맞습니다. 한 민족이냐는 질문에는 '되어가는 중이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달랐던 점보다 앞으로 공유하게 될 것들이 더 많으니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족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더 고민해야할 문제입니다. 르낭은 프랑스인의 입장에서 민족을 이야기했습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꼭 들어맞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는 좋은 소스인 것 같습니다.

르낭이라는 사람은 저 시대에 저런 상황에서 이런 이유로 민족에 대한 고민과 주장을 펼쳤구나 하구요.


그래서, 책의 제목을 다시 지어본다면 아래와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민족이란 이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에 유시민씨가 2013년 시점에서 답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씨가 쓴 책중 세번째로 읽은 책이다.

유시민씨가 이 책을 쓴 동기는 간단하다. 정치계를 떠나고 비정규직 프리랜서(?)가 되며, 출판사로부터 책 의뢰를 받았다고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을 안고 책을 써달라는 의뢰였다고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누구나 할 수 있을법한 질문이지만, 시원하게 답할수 있는 이가 누구일까. 처음 이 책을 손에 잡은 것도 그 이유였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을까. 좋을까. 바람직할까. 삶이라는 것에 옳음이 있는 것일까. 어떤 가치에 무게를 두어야 하는가. 등등. 어떤때는 알겠다가도, 나이를 먹고 새로운 관계와 상황이 설정될때마다 다시 고민하게 되는 것이 바로 ‘삶’이다. 궁금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책의 제목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였다면 아마 이 책에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작가가 스스로에 대해 질문을 하고, 지금도 그를 더듬고 찾아가며 확정하고 흔들려가는 과정 가운데에 쓴 책이겠다 싶었다. 그래서 책을 펼쳤다.

도 삶에 대한 엄청난 진리를 담고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책을 보지는 않았다. 단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유시민이라는 사람이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하고 생각하는지를 읽었다. 그로 족했다. 맞다, 맞어 하며 동의로 고개를 끄덕이는 부분있었고, 동의되지 않아 갸우뚱 하는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참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책을 읽으면서 유시민씨는 참 폭이 넓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삶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배는 왜 고픈지, 결혼은 왜 하는지, 죽음이란 무엇인지. 이런 류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는 사람들은 많다. 문제는 이상한 개똥철학만 늘어놓다가 끝난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너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맞는거니까. 내 경험으로는 이랬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일관성이 없고, 묘하게 설득력은 있는데 인정은 안된다.

확증편향이라는 단어가 있다. 사람들은 여러 상황에 놓이지만, 그 경험들이 자신이 해석하고 싶은 하나의 확증을 설명하는 편향된 근거로 자리잡는다. 50살이 될때까지 100번정도 나쁜남자를 만나 차였다면, ‘남자는 다 쓰레기다.’라는 확증에 근거1, 근거2....근거100이 자리잡았을 것이다. 이해는 가지만 매우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랄까. 소위 인생선배들이 하는 말중 많은 경우가 그렇다. 나는 이랬고, 내 상황은 이랬어. 그러니까 너는 이렇게 해야해. 당장은 고개를 끄덕여도 나중에는 의문이 생긴다. 왜일까.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우리 부모님은 당신의 부모님과 같지 않으니까. 환경이 다르고 시대가 다르니까. 결국 조언받은대로 살아가려면 뭐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젠가 결국 그렇게 된다. 물론, 배울점만 심플하게 참고해서 나에게 적용하면 상관이 없다.

앞에서 유시민씨가 폭이 넓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유시민씨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이렇다. 왜냐하면 이렇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점에서는 다를 수 있다.’ 내가 어떠한지와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를 잘 설명한다. 일반적 시대적 상황과 자신의 특수 상황을 잘 설명한다. 설득하거나 우기지 않는다. 홍세화씨의 ‘생각의 좌표’에서 읽은 아이디어를 빌리면, 지금 나에게 형성되어있는 생각은 대체 어디로부터 근거되어 왔는가를 알고있는 것이다. 

유시민씨는 그것이 절대적 진리라고 우기지 않는다. 나다움과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생각의 근거가 단단히 서있다. 그러면서도, 고집하지 않으니 유연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 생각을 설명하는 근거에는 임상과 경험도 있지만, 생물학적 근거들도 적지 않게 보인다.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현재까지는 제3자 사이에서도 객관적으로 맞다라고 인정되는 사실들을 잘 조직하여 설명한다. 설명했다기 보다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런 점에서 폭이 참 넓어. 보인다.


책에서는 삶에 대해 생각하기 이전에, 나답게 산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 먼저 짚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삶의 시작과 마지막 가운데를 어떻게 가치있게 살아야할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가치없는 것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말한다. 마지막은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 삶의 마무리로 글을 마친다.


유시민씨는 사상가가 아니다.(사상이 없다거나 부족하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스스로를 작가라 했다.) 사상을 정리하여 책으로 낸 것도 아니다. 위에 말한것처럼 ‘어떻게 살 것인가’에 유시민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답했구나 라는 것으로 족할 듯하다. 십년 후에 다시 이 질문을 받으면 조금 예시나 답변들이 더 날카로운 방향을 잡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책 제목을 조금 더 유치하게 지어보면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에 유시민씨가 2013년 시점에서 답하다.’ 정도 되지 않을까. 물론 제목이 맘에 들지는 않는다.


나는 유시민씨가 아니고, 유시민씨가 가치있다고 한 모든것들이 내게 해당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삶이라는 질문에 담담히 답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 족했다. 이제 나도 그 질문에 답할 차례인듯 하다. 내 스스로에게.


목차는 아래와 같다.

프롤로그|나답게살기

제1장|어떻게 살 것인가

제2장|어떻게 죽을 것인가

제3장|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제4장|삶을 망치는 헛된 생각들

에필로그|현명하게 지구를 떠나는 방법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던 한 부분을 적음으로 글을 마친다.


그대는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는가? 그대는 그 신념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아니라고 말하면 조금 비겁한 것 같고 그렇다고 하자니 감당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질문 형식을 바꾸어 보자. 신념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런 삶이 훌륭하다면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가?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신념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이 훌륭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그것은 훌륭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또 훌륭한 신념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그 신념을 위해 살고 죽어야 하는 것 역시 아니다. 신념을 위해 살고 죽는 것도 훌륭한 인생일 수 있지만, 그것과 다른 인생 역시 얼마든지 훌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 유시민

막상 블로그를 쓰려니, 찍어놓은 사진이 한장 뿐이다.


책은 연남동에 있는 서점리스본에서 구매했다.

친구가 근처에서 찻집을 하는데, 문이 닫아 근처를 돌다가 우연히 발견하여 들어갔다.

이에 대한 포스팅은 나중에...


사실, 베스트셀러(?)류의 책은 좀 지난 다음에 읽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라틴어 수업이라는 책에 대해서는 익히 호평을 듣고 있었는데, 장모님이 사주셔서 읽게 되었다.


저자인 한동일 선생님이 서강대학교에서 라틴어에 대해 강의한 수업을 모은 책이라고 한다.

책 제목 답게 1강, 2강, 3강 이런 식으로 구분되어 있다.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한 강씩 끊어서 읽어도 괜찮을 듯 싶다.


말 그대로 라틴어 수업에 관한 책이지만, 라틴어 문법이나 단어를 구구절절이 적어놓거나 설명해 놓지는 않았다.

라틴어를 통한 사유, 인문학 서적에 가깝다고 할까.

우리가 몇번 들어봤거나, 혹은 생소한 사자성어 및 한자로 인사이트를 풀어놓은 책이나 글은 흔히 생각할 수 있다.

이 책은, 저자가 라틴어에 대해 수업을 하며 그 의미를 조금씩 편안하게 풀어놓는 책이다.

외울 부담 없이, 한강 한강 느끼며 편안히 듣는 수업이다.

단, 다음 수업이 궁금해지는 좋은 수업이다. 심지어 첫강은 휴강이다.


모든 언어가 통하지만, 라틴어는 여러 언어의 뿌리가 되는 언어이다. 그래서 더 생각하고 깨달을 것이 많은 것일지도.

캄보디아 출장 길 비행기에서 다 읽어버렸다. 쭉 편하게 읽으니 네시간 정도면 읽을 정도로 잘 읽히는 글이다.


책의 머릿말과 후반에 서강대학교에서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이 쓴 편지들이 있는데, 그 중 한명이 아는 사람이어서 깜짝 놀란 책이기도 하다.(이건 개인적으로)


결론을 말하면, 라틴어 수업이다. 라틴어와 그에서 나오는 저자의 인사이트를 공감되게 편안히 풀어놓은 책이다.

옆에 놓고 생각날때마다 아무 곳이나 부담없이 펼쳐서 또 보고 싶은 책이다.

라틴어가 아니더라도, 다른 언어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게 한 책이다.


인상 깊었던 한 구절을 적음으로 맺는다.

"진리는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지, 외부의 힘에 의해 고개를 숙이는 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강압에 못 이겨 순종하는 진리는 이미 진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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