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내용은 (사)위드에서 각 나라의 기본 정보를 공부하는 

'라마나욧 스터디'를 위해 직접 제작한 자료입니다.

저작권은 (사)위드 전략연구팀에 있습니다.

ⓒ 2018. WITH Research&Streatagy team all rights reserved. Produced by Kangcheol Kim




이번 글에서 다룰 나라는 방글라데시 입니다.





전체 목차는 위와 같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과거(역사)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고대부터 현대의 방글라데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2세기 이전 방글라데시의 역사는 인도 뱅갈지방 역사와 겹친다. 문명이 존재했고, 마우리아, 굽타 등 제국 등 영향권에 들어갔다.

12세기 이후, 아랍 상인들에 의해 이슬람이 전파되었고, 이후 뱅골지방, 그중에서도 뱅골 동부는 무슬림이 다수를 이루게 되었다.


그 후, 벵갈 술탄국으로 벵골 국가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고, 이후 무굴제국에 정복당했다가 무굴제국이 쇠퇴하면서 벵골 나왑국이 독립되었다. 이후, 인도 마라타왕국에 정복되었다가 영국에 의해 인도령 내에 속한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영국은 식민지를 다스리는 입장에서, 인도령의 힘을 분리시킬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행정적 편의라고 말은 했지만 종교로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서뱅골(지금의 방글라데시 지역)을 분할하는 ‘뱅골 분할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대해 뱅골인들은 반발을 일으켰고, 이는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어 영국은 ‘뱅골 분할령’을 철회한다.

식민지 시절, 힌두는 영국에 호의적이었지만 무슬림은 그렇지 않았다.(한국으로 치면 일제시대 친일파나 군부시대 군인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까. 개인의 이야기로 들어가보면 사정은 다를 수 있지만, 추상적으로 설명을 위해 분류를 위와 같이 해볼 수는 있다.)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자라나고 있었다. 여기에서 힌두와 무슬림의 차이를 잠시 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인도를 실제로 방문했을 때에 힌두가 주로 사는 지역에 가면 외국인을 신기해 하기도 하고 눈을 마주치면 잘 웃어준다. 그런데, 무슬림이 사는 지역에 갔을 때에는 지나가든 말든 이상할 정도로 눈길한번 주지 않던 기억이 있다. 이 경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외부 세력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있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인도령 국민회의는 힌두교도가 주도하고 있었고, 무슬림은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고 무슬림은 이에 반발하여 전인도 무슬림 연맹을 창설한다.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 분열이 일어난 상황이다.



1947년, 인도령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이 때, 현재의 파키스탄과 동뱅갈이 종교적 이유로 인도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그리고, 동뱅갈은 파키스탄에 병합되어 동파키스탄이 된다. 떨어져 있는 두 땅이 한 나라가 된 것이다.



이렇게 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과 파키스탄에 편입된 동파키스탄으로 나눠졌다. 지리적으로도 떨어져 있고, 등가적 성립이 아닌 편입된 상황에서 두 땅의 관계가 좋을리 없었다. 종교적 문제, 그로 인한 차별 때문에 파키스탄이 인도로부터 분리되었지만 동서간에도 차별이 일어났다. 당시 파키스탄 정부 요직에는 서파키스탄 출신만 주로 임명되었다. 둘 사이는 언어도 달랐다. 동파키스탄은 뱅골어를 사용했는데 서파키탄은 우르드어를 사용하였다. 서파키스탄은 동 파키스탄에 뱅골어가 아닌 우르드어를 쓰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다카(현재 방글라데시 수도)에서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 시위를 군대로 진압하여서 뱅골인들을 자극하였고, 뱅골인들은 아와미 연맹을 결성하였다.

*참고로 시민을 군대로 진압한 것은 큰 문제이다. 군대의 존립목적은 외침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것이다. 시위진압을 경찰이 하고, 군인은 하지 않는 이유이다. 시민을 군대로 제압했다는 것은 이미 그 국가에 속한 사람으로서 인정을 하지 않는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 중에 광주민주화 항쟁이 지금까지도 유독 회자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광주에서도 경찰이 아닌 군대가 시민을 제압했다.



이 둘을 갈라놓는 사건은 하나 더 있었다. 1970년, 역사상 가장 큰 인명피해를 준 사이클론 ‘볼라’가 동파키스탄을 덮쳐 50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그런데, 파키스탄은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원조물을 불공평하게 분배하였고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분노하였다.



이 해 총선에서(1970년), 뱅골인들이 만든 아와미 연맹이 압승해서 과반의석을 확보했다. 당시는 동파키스탄 인구수가 서파키스탄 수보다 많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파키스탄은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총선 무효화를 선언했고, 동파키스탄에서는 다시 폭력시위가 일어났다. 이를 다시 서파키스탄이 군대로 진압한다. 



이 와중에 아와미 연맹 당수인 라흐만은 1971년에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하고 서파키스탄군이 라흐만을 체포하자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독립군을 결성해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을 일으킨다.



이때 파키스탄 군이 방글라데시로 들어와 사람들을 학살하고, 방글라데시 독립군은 인도 국경에서 게릴라 투쟁을 펼쳤다. 파키스탄은 인도 영토를 폭격하고, 힌두 뱅골인들 1000만명이 인도로 피난을 오자 이를 계기로 인도군도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몇번의 전쟁 끝에 결국 방글라데시는 독립한다.



독립 후, 독립을 선언했던 라흐만이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 정치적 혼란과 부정이 만연했다. 쿠데타가 4번 이상 일어났고, 지도자 2명이 암살되었다.

현재는 의원내각제를 취하고 있으며, 정부 거버넌스(통치력)이 낮다.


이번 글은 <방글라데시>의 '과거(역사)'에 대해 다뤄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미래(이슈)'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글을 클릭하여 <방글라데시>에 대한 다른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방글라데시_인트로(Intro)_개요

방글라데시_1. 현재(1)(나라 이름, 국기, 지리)

방글라데시_1.현재(2)(인구 및 경제, 언어, 종교)

방글라데시_3. 미래 그리고 정리


아래 내용은 (사)위드에서 각 나라의 기본 정보를 공부하는 

'라마나욧 스터디'를 위해 직접 제작한 자료입니다.

이 글에서 다룰 국가는 캄보디아 입니다.



그 중에서도 역사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후난(Funan) 왕국 86~550년

인도로부터 종교와 정치제도를 들여와 1세기경 캄보디아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후난 왕국이 건립되었다. 3세기 초 왕국의 전성기를 맞아 남쪽으로는 말레이시아, 서쪽으로는 미얀마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며 중상주의 정책을 펼쳐 인도 등의 주변국들과의 무역이 성행했다.

 

첸라 왕국 550~802년

 후난왕국으로부터 독립해 세워진 첸라 왕국은 점차 영토를 확장시켜 7세기에는 후난 왕국을 완전히 정복했다. 이후 8세기에는 육첸라(land Chenla)와 수첸라(water Chenla)로 양분되었다.

 

앙코르 왕국 802~1431년(크메르 제국이라고도 한다.)

 크메르 문명의 황금기라 불리는 앙코르 왕국은 9~13세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캄보디아라는 이름의 유래이기도 하다. 캄보디아의 대표적 유적 앙코르왓(Angkor Wat)이나 앙코르 톰(Angkor Thom)도 앙코르 왕국의 건축물이며, 강력한 정권 하에서 문화적 독창성에 있어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14세기부터 점차 몰락해 1431년 태국에 정복당했다.



*앙코르왓

앙코르왓은 힌두 사원입니다.(wat은 사원이라는 뜻입니다.) 인간과 코끼리의 힘으로만 지었다고 합니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어 대단한 건축기술을 자랑합니다. 역사에서 잊혀져 있다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한 탐험가로부터 발견이 되었습니다. 혹시 ‘화양연화’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이 앙코르왓입니다. 화양연화는 ‘인생에 가장 찬란한 순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처럼 캄보디아 역사에서 가장 빛나게 기억되는 순간인것 같습니다. 캄보디아가 되기까지 많은 국기가 있었는데, 전부 이 앙코르왓이 국기에 새겨져 있습니다.



캄보디아의 암흑기 1431~1863년

15~19세기는 계속적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영토가 축소되어 캄보디아의 암흑기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잦은 침략과 정복을 당했으며, 중국과 일본으로부터도 잦은 외침을 겪었다.

프랑스 식민지배기 1863~1953년

1863년 노르돔 왕이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다는 조약에 서명하고 단계적으로 식민지배를 받았다. 식민지가 되었지만, 이 선택이 없었다면 아마도 캄보디아는 다른 나라에 정복되어 지금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1941년 프랑스 식민정부에 의해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가 왕으로 즉위했다.

크메르 공화국

1954년 프랑스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한 이후, 세계 흐름에 따라 공산주의 자본주의 등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1966년 총선에서 승리한 ‘론 놀’이라는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켜 우익정부를 수립하였고 ‘크메르 공화국’을 만들게 된다. 여기서 우익이란, 긍정적 의미의 민주주의가 아닌 당시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 민주주의를 말한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역사를 이어 보려면, 베트남전을 살펴봐야 한다.

1955년 베트남공화국이 성립했다.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나, 토지개혁도 실패하고 정부는 부패하여 치안이 약화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주의 세력 중심으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만들어졌다.(한국에 있었던 남민전은 배트남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홍세화씨가 대표적 인물이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하에 있던 무장단체가 바로 베트콩이다. 베트콩이 남베트남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정부를 상대로 승리해갔고, 미국이 개입하는데 이것이 베트남전의 시작이다. 



미국의 참전한 이유는 남베트남이 공산화 되도록 놔두면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에서 같은 편인 자본주의 국가들이 하나 둘씩 공산주의화 되고 말 것이라 예상(도미노 이론)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에 미국이 관여한 이유와 비슷하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불리했다. 미국군은 전차와 비행기를 이용하는 구식 전쟁에 익숙했는데, 베트남전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전투는 정글에서 펼쳐졌는데 미국이 자랑하는 중장비를 활용할 수 없었다. 베트콩은 지형에 있숙했고, 유리할 때 싸우고 불리하면 숨는 전략을 펼쳤다. (이 때, 정글숲 풀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고엽제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남베트남은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아 군사연합작전을 수행하기도 어려웠다. 남베트남에 무기를 공급하면, 그 무기들이 북베트남이 약탈해 쓰는 정도였다. 중국이나 주변국 눈치때문에 더 큰 개입도 어려웠다. 전쟁비용도 낭비가 심했다.(100명 상대로 20억 달러 정도를 사용했는데, 1명을 잡은 꼴이었다고 한다.)



베트콩이 유리한 이유 한 가지가 더 있는데, 호치민 루트이다. 호치민 루트는 북베트남에서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거쳐 남베트남 전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루트이다. 이 루트로 물자보급, 군 재정비, 휴식 등이 이뤄졌다. 캄보디아나 라오스 입장에서는 이를 막을 능력도 없었고, 특별히 피해를 주지도 않았으니 별 대처를 하지 않았다. 미국은 호치민 루트를 막기 위해, 캄보디아와 라오스 전역을 폭격하는데 이가 비밀전쟁이다. 



미국은 성과없는 소모전을 이어갔다. 남베트남은 의지를 잃었고, 도와줄 명목도 사라진 전쟁이었다. 1973년, 미국과 북베트남은 파리에서 ‘베트남 평화협정’을 맺고 미군은 철수한다. (미국은 이 의미없는 전쟁을 빠져나오기 위해 여러 고민을 했는데, 이 때 나온 단어가 지금까지도 쓰이는 출구전략(Exit Strategy)이다.) 결국 미군은 철수했고, 베트남은 공산화가 되었다. 단순하게 이야기한다면, 마치 한국전쟁 때에 북한이 승리해서 지금 남한도 공산화가 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크메르 루즈는 1976년 ‘민주 캄푸치아’로 국명을 개칭한다.

크메르 루즈는 극단적 공산체제를 추구하고, 당시 크메르 루즈 리더였던 폴 포츠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흉내내는데, 이 때 일어난 사건이 ‘킬링필드’이다. 

처음에는 지식인들(안경을 쓰거나, 똑똑해 보이거나, 손이 곱거나, 영어를 알아듣거나)을 잡아 처형했고, 가진자들, 비협조적인 자들 등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단순히 처형 뿐 아니라, 강제노동으로 인한 과로사, 굶주림과 질병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뿐만 아니라, 보복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처형당한 사람들의 가족들, 갓난 아이까지 죽였다. 독일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처럼 소수민족도 처형했는데, 그 중에는 베트남계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150만명이 사망하였고, 극단적 농본주의 정책으로 비효율적인 농업이 이뤄졌다. 이에 가뭄이 더해져서 출생률이 떨어지고 기아 상황이 심각했다.

캄보디아에 살고있던 베트남계 사람들과 친 베트남인들은 베트남으로 다수가 난민으로 건너간다. 베트남은 난민인 ‘삼린’을 내세워, 크메르루즈를 누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민주 캄푸치아)를 세운다.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은 베트남 괴뢰 정권이라는 이유로 세계 각국에게 정당한 나라로 승인을 받지 못했다. 이후, 크메르루즈 리더인  폴포트를 포함하여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에 대항하는 ‘캄푸치아 연합정부’를 설립하고 이렇게 캄보디아 내전이 시작된다. 웃긴 상황은, 베트남전에 패한 미군이 크메르루즈를 지원하여 베트남에 대항한 것이다. 
이 양쪽 모두 이기기 위해, 민간인을 징집하고 소년병을 동원하고, 군비를 대기 위해 마약을 팔고, 전국에 지뢰를 깔았다. 사상자가 속출한건 물론이고, 농업도 복구되지 않았으며 기아와 역병도 창궐했다. 킬링필드 이후에, 이 내전시기에도 수십만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된다.


1991년, 캄보디아 계파들과 세계각국이 참여한 파리평화협정으로 내전이 끝났다. 

1993년 입헌군주제로 캄보디아 왕국이 설립되어 현재까지의 역사가 이어진다. 



아직도 캄보디아는 전쟁에 의한 피해를 복구중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킬링필드와 내전으로 인해 지식층이 단절되었고, 전쟁과 살육에 대한 사회적 트라우마가 아직 사람들에 있다. 

몇년 전, 캄보디아 기획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킬링필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쟁시절 개들이 사람 팔을 물고 돌아다닌 장면을 흔하게 보아서이다.

그리고, 2016년 캄보디아 킬링필드 핵심전범 중 2명이 종신형이 확정되었다.



이번 글은 캄보디아의 '역사'에 대해 다뤄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캄보디아의 종교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를 클릭하여 캄보디아에 대한 다른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캄보디아_1.기본정보(나라이름, 지리, 기후, 인구, 언어, 역사)

캄보디아_3. 종교(구성, 정령신앙, 기독교)

캄보디아_4. 이슈 및 보건영양

캄보디아_5. 정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