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내용은 (사)위드에서 각 나라의 기본 정보를 공부하는 

'라마나욧 스터디'를 위해 직접 제작한 자료입니다.


이번 글에서 다룰 국가는 바로 캄보디아 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슈 및 보건영양에 대해 다뤄보려 합니다.

이 파트는 캄보디아의 현 상태와 미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캄보디아에는 많은 NGO가 있다. 코이카 기준,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국가의 NGO가 있는 나라가 캄보디아이다. 3429개 단체가 활동하고 있어서 전세계 NGO의 나라라고도 불리운다.

ODA계의 악동이라는 별칭도 있으며, 현재 NGO는 돈 많이 주는 좋은 직장으로 인식이 된다. 풍부한 공적자금 유입으로 정부 부패가 심한 편이다. 


2015년에는 새 NGO법이 개정되었다. 이른바 NGO탄압법이라고 불리운다. 많은 NGO가 들어와서 자금을 풀게한 다음, 자신에 유리하게 상황을 통제하려는 국가적 정책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캄보디아에 건강한 NGO상이 필요하다. 


배트남전과 내전때 깔린 불발탄과 지뢰가 캄보디아 전역에 퍼져 있다.

모두 제거하는데에 약 150년이 걸릴 전망이며, 피해자의 1/3이 어린이이다. 지금껏 2만명 정도가 사망하고 4만 4천명 정도가 부상을 입었다.



캄보디아에서 활발히 진행되는 사업 중 하나가 이 지뢰제거 사업이다. 이 때에 사람 대신 아프리카 주머니쥐를 이용한 제거 방법도 있다.



하루 1.9$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이 33.6%이다. National poverty line 이하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1 4%, 영유아 100명중 25명이 생후 1년 내에 사망한다.



캄보디아의 평균 교육기간은 5.8년으로 재학 기간이 짧다.

문맹률은 23.7%이고, 그중 여성 문맹률이 33%이다.

캄보디아는 킬링필드의 영향으로 지식층이 단절되어, 가르칠 교사가 부족한 형편이다.

교육과정과 교육방식도 불일치한다. 교육과정은 자유로운 프랑스이지만, 진행방식은 억압하고 통제하는 구소련 방식이다.



1990년 기준, 극단적으로 심각한 상황에서 심각한 상황으로 호전되었다.(말이 호전이지, 사실 호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영양결핍이 심한데 5세미만 유아 중 1/3이상이 정상 신장, 체중, 지능에 다다르지 못한다.



캄보디아에서 보이는 영양결핍 형태는 ‘숨은 기아’이다. 비타민과 무기질 함량이 적은 곡식을 주로 섭취하여 칼로리는 높지만 미량영양소 섭취가 부족하다.



그 대안으로 여러 대안이 논의되고 있는데, Iron fish가 그중 하나이다. 철분이 부족하네 음식에 저 철생선을 넣고 끓여 철분을 보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음식에 철분이 있을지라도 그 철분이 몸에 흡수되는 철분인지는 다른 문제라고 한다. 홍보는 그럴듯하게 되는듯 한데,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위 방법이 기발해 보이지만, 그래도 기본인 음식으로 영양을 보충하는게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Simple is best.



캄보디아는 지하경제가 발달해 있다. 그 중 하나가 성매매이다.

에이즈 감염자가 약 7만 5000명이며, 해마다 약 1000명씩 증가하고 있다.

아동 성매매가 특히 심각한데, 구호기구로부터 2012년부터 3년간 구조된 아동 수만 320명이다.



두번째는 바로 마약이다.

캄보디아는 마약 유통 본거지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일상에서 구하기 쉬우며, 18-35세 중 1만 3천여명 정도가 마약을 한다는 통계가 있다.

릭샤(인력거) 기사중 다수가 마약을 하고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것 중 유명한 것이, 대마초 피자이다. 그 정도로 마약이 만연해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번 글은 캄보디아의 '이슈 및 보건영양'에 대해 다뤄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마지막으로 캄보디아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를 클릭하여 캄보디아에 관한 다른 정보를 살펴보세요:)

캄보디아_1.기본정보(나라이름, 지리, 기후, 인구, 언어, 역사)

캄보디아_2. 역사(고대에서 현대까지)

캄보디아_3. 종교(구성, 정령신앙, 기독교)

캄보디아_5. 정리


아래 내용은 (사)위드에서 각 나라의 기본 정보를 공부하는 

'라마나욧 스터디'를 위해 직접 제작한 자료입니다.


이번 국가는 캄보디아 입니다. 지난 글들에서 캄보디아에 대한 여러 정보를 다루었습니다.

이 포스팅은 간단히 캄보디아의 상황과 설명을 한줄로 정리하기 위해 작성했습니다.

더 자세한 설명은 다른 작성 글을 참고해 주세요:)


 

캄보디아는 역사적으로 크메르 공화국 때 문화적 전성기를 이루었다. 하지만, 현재는 킬링필드 및 내전으로 기초 인프라가 무너진 상태이다.

이 때문에 교육, 영양, 지하경제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지식층과 젊은 층은 기독교에 열려있는 편이다. NGO 등 다양한 루트로 선교 가능성이 열려 있는 나라이다.


이상으로 캄보디아에 대해 다뤄보았습니다.

앞으로도 다른 나라의 여러 정보들을 다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캄보디아_1.기본정보(나라이름, 지리, 기후, 인구, 언어, 역사)

캄보디아_2. 역사(고대에서 현대까지)

캄보디아_3. 종교(구성, 정령신앙, 기독교)

캄보디아_4. 이슈 및 보건영양


아래 내용은 (사)위드에서 각 나라의 기본 정보를 공부하는 

'라마나욧 스터디'를 위해 직접 제작한 자료입니다.

이 글에서 다룰 국가는 캄보디아 입니다.



그 중에서도 역사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후난(Funan) 왕국 86~550년

인도로부터 종교와 정치제도를 들여와 1세기경 캄보디아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후난 왕국이 건립되었다. 3세기 초 왕국의 전성기를 맞아 남쪽으로는 말레이시아, 서쪽으로는 미얀마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며 중상주의 정책을 펼쳐 인도 등의 주변국들과의 무역이 성행했다.

 

첸라 왕국 550~802년

 후난왕국으로부터 독립해 세워진 첸라 왕국은 점차 영토를 확장시켜 7세기에는 후난 왕국을 완전히 정복했다. 이후 8세기에는 육첸라(land Chenla)와 수첸라(water Chenla)로 양분되었다.

 

앙코르 왕국 802~1431년(크메르 제국이라고도 한다.)

 크메르 문명의 황금기라 불리는 앙코르 왕국은 9~13세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캄보디아라는 이름의 유래이기도 하다. 캄보디아의 대표적 유적 앙코르왓(Angkor Wat)이나 앙코르 톰(Angkor Thom)도 앙코르 왕국의 건축물이며, 강력한 정권 하에서 문화적 독창성에 있어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14세기부터 점차 몰락해 1431년 태국에 정복당했다.



*앙코르왓

앙코르왓은 힌두 사원입니다.(wat은 사원이라는 뜻입니다.) 인간과 코끼리의 힘으로만 지었다고 합니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어 대단한 건축기술을 자랑합니다. 역사에서 잊혀져 있다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한 탐험가로부터 발견이 되었습니다. 혹시 ‘화양연화’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이 앙코르왓입니다. 화양연화는 ‘인생에 가장 찬란한 순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처럼 캄보디아 역사에서 가장 빛나게 기억되는 순간인것 같습니다. 캄보디아가 되기까지 많은 국기가 있었는데, 전부 이 앙코르왓이 국기에 새겨져 있습니다.



캄보디아의 암흑기 1431~1863년

15~19세기는 계속적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영토가 축소되어 캄보디아의 암흑기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잦은 침략과 정복을 당했으며, 중국과 일본으로부터도 잦은 외침을 겪었다.

프랑스 식민지배기 1863~1953년

1863년 노르돔 왕이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다는 조약에 서명하고 단계적으로 식민지배를 받았다. 식민지가 되었지만, 이 선택이 없었다면 아마도 캄보디아는 다른 나라에 정복되어 지금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1941년 프랑스 식민정부에 의해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가 왕으로 즉위했다.

크메르 공화국

1954년 프랑스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한 이후, 세계 흐름에 따라 공산주의 자본주의 등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1966년 총선에서 승리한 ‘론 놀’이라는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켜 우익정부를 수립하였고 ‘크메르 공화국’을 만들게 된다. 여기서 우익이란, 긍정적 의미의 민주주의가 아닌 당시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 민주주의를 말한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역사를 이어 보려면, 베트남전을 살펴봐야 한다.

1955년 베트남공화국이 성립했다.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나, 토지개혁도 실패하고 정부는 부패하여 치안이 약화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주의 세력 중심으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만들어졌다.(한국에 있었던 남민전은 배트남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홍세화씨가 대표적 인물이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하에 있던 무장단체가 바로 베트콩이다. 베트콩이 남베트남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정부를 상대로 승리해갔고, 미국이 개입하는데 이것이 베트남전의 시작이다. 



미국의 참전한 이유는 남베트남이 공산화 되도록 놔두면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에서 같은 편인 자본주의 국가들이 하나 둘씩 공산주의화 되고 말 것이라 예상(도미노 이론)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에 미국이 관여한 이유와 비슷하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불리했다. 미국군은 전차와 비행기를 이용하는 구식 전쟁에 익숙했는데, 베트남전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전투는 정글에서 펼쳐졌는데 미국이 자랑하는 중장비를 활용할 수 없었다. 베트콩은 지형에 있숙했고, 유리할 때 싸우고 불리하면 숨는 전략을 펼쳤다. (이 때, 정글숲 풀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고엽제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남베트남은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아 군사연합작전을 수행하기도 어려웠다. 남베트남에 무기를 공급하면, 그 무기들이 북베트남이 약탈해 쓰는 정도였다. 중국이나 주변국 눈치때문에 더 큰 개입도 어려웠다. 전쟁비용도 낭비가 심했다.(100명 상대로 20억 달러 정도를 사용했는데, 1명을 잡은 꼴이었다고 한다.)



베트콩이 유리한 이유 한 가지가 더 있는데, 호치민 루트이다. 호치민 루트는 북베트남에서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거쳐 남베트남 전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루트이다. 이 루트로 물자보급, 군 재정비, 휴식 등이 이뤄졌다. 캄보디아나 라오스 입장에서는 이를 막을 능력도 없었고, 특별히 피해를 주지도 않았으니 별 대처를 하지 않았다. 미국은 호치민 루트를 막기 위해, 캄보디아와 라오스 전역을 폭격하는데 이가 비밀전쟁이다. 



미국은 성과없는 소모전을 이어갔다. 남베트남은 의지를 잃었고, 도와줄 명목도 사라진 전쟁이었다. 1973년, 미국과 북베트남은 파리에서 ‘베트남 평화협정’을 맺고 미군은 철수한다. (미국은 이 의미없는 전쟁을 빠져나오기 위해 여러 고민을 했는데, 이 때 나온 단어가 지금까지도 쓰이는 출구전략(Exit Strategy)이다.) 결국 미군은 철수했고, 베트남은 공산화가 되었다. 단순하게 이야기한다면, 마치 한국전쟁 때에 북한이 승리해서 지금 남한도 공산화가 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크메르 루즈는 1976년 ‘민주 캄푸치아’로 국명을 개칭한다.

크메르 루즈는 극단적 공산체제를 추구하고, 당시 크메르 루즈 리더였던 폴 포츠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흉내내는데, 이 때 일어난 사건이 ‘킬링필드’이다. 

처음에는 지식인들(안경을 쓰거나, 똑똑해 보이거나, 손이 곱거나, 영어를 알아듣거나)을 잡아 처형했고, 가진자들, 비협조적인 자들 등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단순히 처형 뿐 아니라, 강제노동으로 인한 과로사, 굶주림과 질병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뿐만 아니라, 보복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처형당한 사람들의 가족들, 갓난 아이까지 죽였다. 독일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처럼 소수민족도 처형했는데, 그 중에는 베트남계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150만명이 사망하였고, 극단적 농본주의 정책으로 비효율적인 농업이 이뤄졌다. 이에 가뭄이 더해져서 출생률이 떨어지고 기아 상황이 심각했다.

캄보디아에 살고있던 베트남계 사람들과 친 베트남인들은 베트남으로 다수가 난민으로 건너간다. 베트남은 난민인 ‘삼린’을 내세워, 크메르루즈를 누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민주 캄푸치아)를 세운다.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은 베트남 괴뢰 정권이라는 이유로 세계 각국에게 정당한 나라로 승인을 받지 못했다. 이후, 크메르루즈 리더인  폴포트를 포함하여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에 대항하는 ‘캄푸치아 연합정부’를 설립하고 이렇게 캄보디아 내전이 시작된다. 웃긴 상황은, 베트남전에 패한 미군이 크메르루즈를 지원하여 베트남에 대항한 것이다. 
이 양쪽 모두 이기기 위해, 민간인을 징집하고 소년병을 동원하고, 군비를 대기 위해 마약을 팔고, 전국에 지뢰를 깔았다. 사상자가 속출한건 물론이고, 농업도 복구되지 않았으며 기아와 역병도 창궐했다. 킬링필드 이후에, 이 내전시기에도 수십만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된다.


1991년, 캄보디아 계파들과 세계각국이 참여한 파리평화협정으로 내전이 끝났다. 

1993년 입헌군주제로 캄보디아 왕국이 설립되어 현재까지의 역사가 이어진다. 



아직도 캄보디아는 전쟁에 의한 피해를 복구중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킬링필드와 내전으로 인해 지식층이 단절되었고, 전쟁과 살육에 대한 사회적 트라우마가 아직 사람들에 있다. 

몇년 전, 캄보디아 기획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킬링필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쟁시절 개들이 사람 팔을 물고 돌아다닌 장면을 흔하게 보아서이다.

그리고, 2016년 캄보디아 킬링필드 핵심전범 중 2명이 종신형이 확정되었다.



이번 글은 캄보디아의 '역사'에 대해 다뤄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캄보디아의 종교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를 클릭하여 캄보디아에 대한 다른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캄보디아_1.기본정보(나라이름, 지리, 기후, 인구, 언어, 역사)

캄보디아_3. 종교(구성, 정령신앙, 기독교)

캄보디아_4. 이슈 및 보건영양

캄보디아_5. 정리


네팔의 NGO인 UMN을 방문하였다.
UMN은 크리스찬이 모여 활동하는 NGO로 다양한 국가 출신이 와서 활동하고 있다.
보통 저개발국가에는 많은 NGO가 다양한 활동을 한다. 하지만, 연대가 없으면 효율적으로 중복되지 않는 활동을 하기는 어렵다. UMN은 중복되지 않고, 서로 시너지가 나도록 사람과 단체, 일의
성격을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로컬NGO와 시업을 하고, 이양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 세계적 단체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해당지역이 가진 이슈와 솔루션을 따라갈 수는 없다. UMN은 능력있는 로컬 NGO와 함께 사업을 하고, 지속가능하도록 그 사업을 이양한다.

사실 위에 언급된 것들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NGO가 하는 일이지만, 지키면서 하기는 어렵다. UMN은 교과서처럼 위 과정을 따르고 있었다.

물론, 내부에 들어가서 큰 눈으로 보면 또 다를지
모르지만, 좋은 단체의
모형을 보았다.


네팔에 입국했다.
리서치를 위해 인도로 향하는 루트이다.

1. 비자발급
- 미리 양식을 검색해. 프린트해서 사진을 붙여 제출하는 방법
- 도착하면 있는 기계에 간단한 정보 입력하고, 사진도 즉석에서 찍으면 종이가 나와서 그것을 그냥 내면. 되는 방법
- 아래 방법을 택하니 편하고 좋았다.

2. 비자 수수료
15일 짜리 비자는 가격이 $25이다. 돈은 다른 창구에 미리 수납하여 영수증을 과 위에 설명된 종이를 함께. 내면 비자를 준다.
그런데, 수납하는 곳에서 계속 한국돈 3만원을 내라고 강요를 했다. 아무래도 $25보다 3만원이 더 환율적으로. 이익이 있나보다. 직원들에게 인센티브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이렇게 무사히 네팔에 입국하였다.
네의 보호를 받는 나라.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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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지도나 문서를 찾아보면, 미얀마는 버마라고도 불리며 두 이름이 같이 쓰인다. 버마는 브라만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했다. 이 글에서는 편의를 위해 이하 미얀마로 통칭하겠다.
대한민국은 1991년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가 내린 결정에 따라 미얀마라고 부르고 있다. 외국에서는 미얀마 보다는 버마라는 이름을 주로 쓴다. Myanmar known as burmese 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왜 한 나라에 다른 두 이름이 공존하는 것일까. 먼저 미얀마의 역사를 봐야 한다.




대한민국 이전에 조선왕조가 있었던 것처럼, 버마 왕조가 있었다. 버마 왕조의 역사는 영국에 의해 1885년 끝이나고, 1886년에 영국령 인도에 속한 한 주로 존재했다. 1937년에는 버마가 인도로부터 분리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1942년 아웅산과 일본군이 미얀마에 들어와 일본 식민지가 시작된다. 아웅산은 미얀마의 독립운동 혁명가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현 미얀마를 이끄는 아웅산 수찌가 아웅산의 딸이다. 아웅산은 미얀마 독립을 목적으로 일본군과 함께 미얀마에 들어왔으나, 영국보다 잔인한 일본군의 통치를 보고 생각을 바꾼다. 1945년, 일본군이 패망하고 아웅산은 영국 정부와 담판을 지어 독립을 이끌어냈다. 아웅산은 미얀마에서 ‘민족의 영웅’, ‘국부’로 불린다.


독립 후, 버마연방이 설립되었다. 민주적 정치가 행해졌으나, 1962년 네윈 장군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군부독재가 시작되었다. 이후 군부를 향한 계속된 민중 저항이 있었다.
2010년에는 길었던 군부독재가 끝나고, 민주적 투표가 이뤄졌다. 이 투표에서 승리한 당은 바로 군사정권의 지원을 받는 당이었다. 형식적 민주화는 되었으나 군사정권만 연장된 꼴이었다. 이후 2015년에 개최된 총선에서 야당인 국민민주연맹이 상하원·지역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며 정권교체를 확정했다. 국민민주연맹을 이끄는 당수가 바로 아웅산 수찌이다. 이렇게 2015년에야 군사정권에서 벗어나 실질적 민주화를 이루었다.



미얀마 이름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버마와 미얀마, 이 둘로 국호가 병용되고 있었다. 앞에 언어에서 구어와 문어가 다르다고 했는데, 구어로는 버마, 문어로는 미얀마였다.
1989년, 군부에서 미얀마의 공식 명칭을 미얀마로 변경했다. 버마라는 이름이 영국 식민지시대의 잔재라는 이유와 주류 민족인 버마족 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포괄하겠다는 의미에서였다. 현재 두 개 이름이 혼용되는 것은 이에 대한 반발이다. 군부를 향한 저항은 국민 정서를 대변한다. 국민들은 군부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외국 언론사 및 시민단체, 정부 등도 마찬가지였다. 미얀마는 정통성도 정당성도 없는 군부가 지은 이름이다. 군부를 인정치 않는 사람들은 미얀마 대신 버마라는 단어를 쓴다. 외국에서는 ‘버마라고 알려진 미얀마’라는 표현을 쓴다. 한국 일부 언론사도 미얀마 군부를 인정치 않는다는 의미로 버마라는 표현을 쓴다. 물론, 공식 명칭은 미얀마이다.
이렇게, 미얀마는 민주화 역사가 짧다. 군부 잔재도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위 정보들은 서적과 인터넷 검색, 저자의 기본상식을 토대로 쓰여졌습니다.

한 나라에 대해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텐데, 크게는 직접 살아보는 방법과 자료 및 문헌조사로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조사도 하고 살아도 보면 좋겠지만, 외부에서 검색할 수 있는 자료는 이정도구나 하는 수준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캄보디아 출장을 갔다.

대부분 저개발국가가 해당되지만, 캄보디아는 미량영양소가 부족한 영유아가 많다.

무슨 말이냐...!

탄수화물인 밥은 많이 먹어서 살은 찌지만, 비타민과 철분 미네랄 등의 미량영양소는 섭취하지 않아서

몸과 머리가 골고루 성장하지 않을 위험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환경적으로 엄청 편식을 하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다양한 단체가 여러 방법으로 이 문제에 뛰어들고 있다.

내가 일하는 위드에서는 영양보충식을 만들어 공급한다.

대부분의 미량영양소는 캄보디아에 나는 여러 작물, 길가에 난 식물 등에서 섭취할 수 있다.

이를 이용해 영양보충식을 만들어 영유아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출장은 영양보충식 공장 건축 과정의 모니터링이었다.


사진과 페북에 남겼던 간단한 느낌을 남긴다.


길 위에서




gno



1 . 비행기에서 승무원이 물었다.
“Are you Cambodian?”
내가 웃으며 답했다.
“No, I’m Korean”
스튜어디스는 한국인이었다.
어느 나라를 가든 오해를 받는다.


2. 노을을 지나는 전기선이 예뻤다.


3. 산이 없다. 끝이 사라지는 길이 많다.


4. 사람들이 작다. 나는 평균키다.


5. 다음에 온다면 앙코르왓을 가보고 싶다. 화양연화 마지막 장면과 마주하고 싶다.


내가 일하는 WITH에서는 라마나욧 스터디를 한다. 아니, 했었다.

잠시 멈춰있던 그 흐름을 내가 이어받게 되었다.

시작하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리한 것을 아래에 남긴다.

첫달에 진행한 '인도'에 관한 내용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라마나욧 모임을 맡게 되다.

  라마나욧 모임은 왜 해야 하는가? 글을 시작하게 된 질문이다.

 

  라마나욧 모임을 담당하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라마나욧 스터디와 라마나욧 모임을 담당하게 되었다. 라마나욧 모임은 Yellow Window(이하 YW라 표기)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시간이다. 정보를 나누기 위해서는 득하는 공부, 영어로 스터디가 필요하다.(위드 내부에서는 관습적으로 공부보다는 스터디 라는 말을 쓴다.) 스터디는 지식을 모아 내것으로 소화하는 과정이다. 지식이 소화되면 정보와 그를 통해 얻은 마음이 생긴다. 이를 나누기 위해서는 다시 정보의 가공과 선별 그리고 콘텐츠화가 필요하다. 이 과정들이 선행된 다음 단계가 라마나욧 모임이다.

 


흔한 인도 거리. 대부분 인도인이 믿는 힌두교에서는 소를 숭배한다.

길가와 도로에서 쉽게 소들을 볼 수 있다. 젖도 짜고, 일도 시키지만 숭배해서 죽이지는 않는다. 혹시나 실수로 소를 차로 치면 운전자는 죽임을, 차는 불태움을 당한다고 한다. 그런 인도는 세계 최대 소고기 수출국이기도 하다.(물소는 먹지는 않아도 도축이 가능하다고 한다.)

 

 

위드 그리고 YW

  위드는 국제개발협력 NGO이며, 그 중에서도 식품영양 분야에 특화되어 있다. 많은 국제개발협력 NGO가 여러 나라에 도움을 준다. 도움이 필요한 나라는 어디인가? 주관적인 가치관과 객관적인 수치에 따라 갈릴 수 있는 질문이다. 위드에 그 질문을 한다면, 답은 ‘YW’이다. YW란 여러 기준을 가지고 위드가 선정한 우선적으로 도와야 할 땅이다. 현재는 총 73개국이 YW에 속해있고, 그 중 20개국을 우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국가로 정하고 있다. 위드는 단순히어려운 나라’, ‘못사는 나라를 돕지 않는다. YW를 돕는다. 여기까지는 위드 홈페이지만 들어가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YW는 여러 수치들로 선정되었다. 수치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였다. 선정, 발견, 위탁 등등 여러 아름다운 단어들로 꾸밀 수 있겠지만, 그 땅들을 향한 뜨거운 마음과 감동이 우선적으로 있었기에 YW를 새로이 볼 수 있는 눈도 있었을 터이다.

  수치란 명확하지만 작은 등불과 같다. 놓인 몇몇 부분은 밝히지만 전체에는 미치지 못한다. 수치를 더 늘리고 나열하고 분석하면 어떨까. 나라들을 특정 기준으로 분류하고 선정할 수는 있지만 온전히 알기는 어렵다. 세상에 없던 기준을 만들고 세우는 일에는 가치가 있다. 또한 그 무게만큼 무거운 일이다. 그보다 더한 일은 만든 가치를 지켜내는 일이다. 지키기 위해서는 시도가 필요하다. YW를 발견한 데에서 크치지 아니하고, 위드에 라마나욧 모임이 필요한 이유를 생각해보면 여기에 있지 않을까.


파트나 기차역 안, 깨진 유리창 너머로 시장이 보인다.

YW는 어쩌면 위드가 발견한 깨진 유리창이 아닐까. 깨짐을 발견한 이가 가지는 사명은 바로 회복이다.

깨진 유리창 이론을 보고 생각한 내용 맞다.

 




라마나욧 모임이 필요한 이유

  누군가를 알아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가공된 정보와 결과물을 읽어내고 시간이 필요하다. 필요가 충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데이터는 때로 사실을 왜곡한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일반화시키며, 그 시각만이 옳다고 확층편향시킨다. 정보는 일방적이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더 우선순위를 둬야하는 시간이 있다. 대상과 갖는 만남과 대화 시간이다. 무언가를 캐내기 위해 급히 물어보는 아픈 질문이 아닌 서로를 알아가는 대화이다. 직접 만남일 수도 있고, 적힌 문장과 문장 그 사이에 있는 의중을 볼 수도 있다. 행간을 읽는다고 한다. ‘알기가 아닌알아가기위함이다. 기약 없는 만남일지라도 묵묵히 그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한 나라에 대한 알아감도 그렇다. 앞에서 설명했듯 위드는 YW 73개국을 지정했다. 그 중 20개국은 우선적으로 도와야 할 나라로 다시 분류된다. 20개국 중 하나인인도(India)를 예로 들어보자. 인도 사람들은 위드라는 단체가 자신이 사는 국가를 또한 자신들을 YW로 지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만약,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군대에서 나도 모르게 관심병사로 지정받고, 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을 위한 관리감독을 받는 기분과 비슷할까. 그들은 어떨까.

  어떠한 나라를 돕기 위해서는 'YW로 지정됬다.' 라는 사실 외에도 많은 조사가 필요하다. 심지어, 도움이 필요한지 우리가 생각하는 필요가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필요와 일치하는지 여부부터 말이다. 그 시작이 라마나욧 스터디이다. 전부를 알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들도 보고자 하는 노력이다. 내가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 함께 말이다.

 

힌두교와 불교 발상지인 바라나시. 다양한 종교를 가진 순례객이 모인다

인도에는 신이 3 3천만 정도 있다고 한다. 숫자 자체에 의미는 없지만, 무제한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라마나욧스터디 ; 인도

  지난 라마나욧 모임에서 나눌 나라는 인도(India)였다. 멀지 않은 지난 5, 리서치차 인도를 방문했다. 이주가 채 안되는 기간이었다. 이번 모임과 관계있는 방문은 아니었다. 현장감이 사라지기 전에 이 스터디를 하게 되어 다행이기도 했다.  

  인도에 대한 책을 읽었다. 책을 찾으니 인도를 다룬 여행 에세이류가 많았는데, 그 외 심도있는 정보를 다룬 책은 많지 않았다. 관련 세미나도 다녀왔다. 현장에서 살아가시는 분들이 해 주시는 경험과 조언이 실체적으로 다가왔다. 인도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인도 특유 종교와 사상이 녹아 있는 영화들도 있지만, 오히려 상상할 수 있는 악습들에 대해 고찰하게 하는 영화가 주류처럼 등장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도 마찬가지였다. 이름은 익히 들어 알던 다큐멘터리를 이번 기회를 핑계로 보았다. 한 사람이 관심을 가졌고, 아이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았다. 허나 진정한 변화는 또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하게 하였다. 매일 아침, 시간이 없으면 저녁에라도 신문을 꼭 챙겨보려 노력한다. 관심을 갖고 보니 인도에 관한 기사가 의외로 많았다. 총리가 바뀌고서 많은 변화와 발전을 하고 있기에 주목받는 인도였다. 경제와 인권, 사회 등 여러 측면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관심이 가는 기사들은 스크랩도 했다.

 이번 인도 스터디에 제목을 붙인다면젊은 인도이다. 전 세계 30세 이하 인구 중 5명중 1명은 인도인이다. 종교, 사회, 문화, 정치, 경제 여러 분야에서 변화와 반응이 빠르다. 카스트제도, 여성차별 등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빠르게 무녀져가고 있다. 핵 보유국이며 IT 강국이라지만 특정 지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빈부 차이만큼 삶 자체가 가지는 어려움이 큰 나라가 인도였다.

 

 

갠지스강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

시체를 화장하고, 빨래를 하고, 씻고, 물놀이 하는 이 모든 일들을 갠지스 강에서 볼 수 있다.


 

라마나욧 그리고 아픔의 거리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라마나욧 모임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아픔에는 거리가 있다. 대상이 가지는 아픔이 있다면, 그 아픔과 내가 갖는 거리도 있다. 대상을 사랑하고 알게 될 수록, 아픔과 내가 갖는 거리는 줄어든다.

아픔이 있는 거리가 있다.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걸어 넘어가야 하는 길이 있다. 내 발로 직접 걸을 때에, 멀리서는 차를 타고는 볼 수 없는 아픔을 봐야만 한다.

라마나욧 스터디는 무얼까. 나름 결론을 내면, 아픔의 거리를 줄이는 또한 걷는 일은 아닐까

 

  길을 걷는 이는 내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길을 걸은 자들이 있다. 그 목적지는 같더라도 길은 다를 수 있다. 시간과 공간, 두 축이 같을 수는 없으니까 당연하다. 앞서 걸은 이가 변한만큼 길도 변했다. 업데이트 되지 않은 가이드를 따라가려면 시작부터 이질감을 느낀다. 결국 길은 걷는 각자가 개척해야 한다. 길에 올랐고, 오르고 있고, 오르려는 모든 사람이 느꼈고, 느끼고 있으며, 느끼지 않을까.

한 가지, 공통된 감동이 있다. ‘아픔의 거리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 밟지 않으면 몰랐을 그 거리를 걸었을 때, 아픔이란 단어가 희망으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이다.

 

   "참된 발견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가 한 말이다. 저 땅이 YW라고 말하는 행위는 어렵지 않다. 그 땅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변했는가는 다른 일이다. 이제야 조금, 앞이 보이는 듯 하다.



파트나역에서 떠나기를 기다리는 기차. 정확한 출발시간과 도착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래도 기차는 결국 출발하고, 목적지에 도착한다. 필요한 것은 기다림과 기대함이다.

 



1. 제목

- 오병이어 선교회 31주년 기념영상


2. 내용

- 오병이어선교회가 31주년을 맞이함(처음~ 28초)

- 31주년간 의 의미를 간단히 살펴봄_Yellow Window(28초~ 40초)

- 향후, 추진할 '오병이어하우스'에 대한 비전 선포(40초~ 마지막)


3. 사용한 프로그램

- Final cut pro X(파이널컷)

- Motion5

- Pixelmator

- keynote


4. 사용한 소스

- 픽토그램(thenounproject.com)

- keynote 내장 그림

- 직접그린 그림(지인을 통해)

- 음원: Hillsong-03-Forever Reign-A Beautiful Exchange

- 오병이어선교회 로고


5. 제작기간

- 2일 + a


6. 제작과정

(1) Pre-production

- 나는 글을 쓰거나 영상을 만든다. 취미이기도 하고 업무의 연장이기도 하다. 창작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야에 재능은 별로 없지만 좋아하고 잘하고 싶어한다.

- 창작이 시작되는 때는 자의보다는 누군가 혹은 단체의 요청일 때가 많다.

- 요청은 보통 '이틀 내로 이런 영상 좀 만들어줘' '이런 영상'이 무엇인지는 요청한 사람도 모른다. 그러니 나도 알 수 없다.

- 영상을 관통하는 주제는 ㅇㅇ이야. 내가 지정한 이 음악을 사용해줘. 시간은 1분 30초 이내로 해줘. 사진은 내가 보내주는 15장을 사용해줘. 각 사진 옆에 들어갈 문구는 내가 적어서 보내줄게. 배치는 이렇게 해주면 좋겠어. 디테일한 배치는 네가 봐서 맞춰주면 좋겠어. 이정도로 요청을 해주면 대략 어떻게 작업을 해야하며, 어떤 결과물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
- 하지만, 보통 '이런 영상을 만들어줘'라는 피상적 요청이 대부분이고, 그 이후에 필요한 작업은 요청받은 자의 몫이다.

- 이번 작업도 비슷했다. '오병이어선교회의 31주년을 맞이하는 감사와 오병이어하우스라는 것을 만들기 위해 후원회를 발족하는데, 그 비전을 선포하는 영상을 만들어 줘.' 라는 요청이었다.

- 이런 피상적 요청을 받았을 때 어려운 점은, 요청자의 '기호'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멋있는 것'을 만들어줘. 라고 해서 내가 생각하는 멋있는 것을 만들었을 때에, 요청자가 생각하는 멋있는 것과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멋지지 않아? 라는 말보다 원하는게 정확히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하기도 하지만, 생명에너지의 낭비를 줄일 수 있다.(고생을 덜할 수 있다.)

- 대략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수 있다. 메시지를 정확히 캐치한 전문작가가 감동적인 카피를 만들어내고, 프로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그림 소스를 바탕으로 트랜디한 모션그래픽 디자이너가 깔끔하지만 단조롭지 않으며 웅장한 모션으로 메시지를 완성해내면 된다. 전문 포토그래퍼나 비디오그래퍼가 메시지에 합당한 영상소스를 기획하고 따는 것도 좋겠다. 문제는 나는 위 중 그 무엇에도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위 역할을 다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틀동안, 예산 없이.

- 영상이 필요한 날짜는 8/24(목) 이었고, 8/21(월)에 아래와 같은 글을 받았다. 물론, 다른 일이 있어서 당일 밤에야 글을 볼 수 있었고, 다음날에야 틀을 짤 수가 있었다.

since 1986

오병이어에 심겨진 사랑의 겨자씨

너무 작아서 밭에 뿌리면 보이지 않지만 때가 되면 싹이 돋고 큰나무가 됩니다.

오병이어에 담긴 영양과 복음의 비밀이 열쇠가 되어

지금까지 수많은 작은 일에 순종을 깨닫게 하신 그분의 계획에 감사드립니다.

 

고통 받은 지구촌 yellow window~ 하나님 나라 임하기까지

먹지 못하는 영양과 복음으로 소외된 이웃! 고통 받은 지구촌 yellow window를 보여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자라나는 씨앗이 되도록 사명을 맡기신 축복에 감사합니다.

그분의 겸손한 모험 에 참여하는 충만한 한 알의 씨앗이 되고자

yellow window지역에 사랑의 겨자씨를 심고 또 심습니다.

 

오병이어 비젼 프라미스 2036!

“오병이어하우스”를 준비하며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할 수 있는 지난 30여년 동안의 오병이어!

세월이 가면 갈수록  자신에게 매이지 않고 공동체 부르심과 비젼을 향해

뜨거운 열정과 변함없는 헌신으로 사역하고 있는 오병이어 사역자들!

그들의  오병이어공동체 와의 만남은 어느새 자신의 인생에도 전부가 되었습니다.

 

이세대가 가기전에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오병이어공동체 ~ 지금부터 영원까지

하나님과 세상을 향해 우리 모두는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둘줄 믿고 새노래를 힘차게 부릅니다.

 

선교사 안식관마련 및  영성 훈련센터건립!을 통해

-공동체 영성훈련을 통해 사역자를 세우고

-오병이어선교사 재교육과 장기,은퇴사역자들의 정서적 건강과 쉼을 위한 복합 공간으로

가족 신앙 공동체를 준비합니다.  오병이어하우스!

 

오병이어에 심겨진 세상을 변화 시킬 충만한 씨앗들이  큰나무가 되어 많은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여는 나날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선교사 안식관마련 및  영성 훈련센터건립!

오병이어하우스!

함께 동참 해주세요~


- 항상 그랬지만, 가장 어려웠던 점은 영상을 만들만한 '소스'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소스를 만들어낼 시간과 장비가 있지도 않았다.

- 결국 글과 모션그래픽(말을 어렵게 썼지만, 그림이 움직이는)효과를 통해 영상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 내가 가진 재산을 살펴보았다. 파이널컷은 내가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툴이다. 모션 5는 아주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있고, 간단한 움직임은 검색을 통해서 따라하며 만들어볼 수 있는 정도이다. 키노트는 실제로 몇번 사용해보지는 않았지만, 어떤 효과를 낼 수 있는지를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정도이다.

- 이렇게 일단 시작을 하였다.


(2) 초반_오병이어선교회가 31주년을 맞이함(처음~ 28초)


- 먼저 SINCE 1986이라는 키워드를 잡아서 오병이어선교회가 31주년을 맞이해서 지금까지 왔다는 메시지를 담으려 했다.

- SINCE 1986이란 말로 시작해서 씨가 심기고,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는다는 이미지를 사용하려 했다. 씨와 열매의 이미지를 쓴 이유는 몇가지가 있다. 우선, 위에 주어진 글에서 '겨자씨'라는 표현을 썼다. 성경에도 자주 나오는 표현이고, 보통의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는 비유이다. 겨자씨라는 단어를 쓴 것을 보니, 그 비유를 이미지로 사용하는 것이 글쓴이의 기호에도 맞다고 생각했다. 두번째 이유는 키노트를 이용하여 기술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이다.

- 주요 효과는 키노트의 전환효과를 이용해서 내었다.

- Since1986 / 오병이어에 심긴 사랑의 겨자씨 / 영양과 복음의 씨앗이 / 새싹이 되고 / 나무가 되고 / 오병이어를 드림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어갑니다.

- 문구는 위와 같고, 각 단계에 따라 씨앗이 심겨서 나무가 되고 열매가 됨을 이미지로 표현하려 했다.

- 종교성이 있는 영상이기 때문에, 표현에 신경을 많이 썼다.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기 위함은 아니다. 단지, 자칫하면 매우 주관적이며 감상적이기만 한 표현만 난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올드하다, 촌스럽다'라고 이야기되는 것들이다. 가끔 스스로의 감상에 취해 억지 감동을 주기 위한 표현이 있다. 그 억지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non 크리스찬 뿐 아니라, 같은 크리스찬도 동일하게 느낀다. 사실 자체가 감동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억지스럽지 않은 사실적 감동'을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작자로서의 내 취향이며 주관이었다.

- 사실, 위 문구의 마지막에 '오병이어를 드림으로 풍성한' 은 최종 결재권자의 요청으로 넣었다. 최종결재권자가 저 표현을 '꼭 넣었으면 좋겠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어떠한 객관성이나 심미적 관점과는 별개로 요청자의 취향 문제이다. 내적 불편함은 있었다. 좀 과한 표현이라 생각했다. 감동과 의미를 강요하는 느낌도 있었고, 배치적으로 글이 많아서 눈에 잘 안들어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주관적 판단이긴 하다.


(3)중반_31주년간 의 의미를 간단히 살펴봄_Yellow Window(28초~ 40초)

- 오병이어선교회는 Yellow window라는 전략지역을 갖고있다. 여러 지표를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우선적으로 접근해야 할 나라를 분류하였다. 이것은 큰 장점이며 특이점이다.

- 그래서 31년간의 의미를 이 Yellow window라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셨으며, 현재 그 땅을 섬기고 있다라는 메시지를 담으려 했다.

- 보여주신 땅 / 이곳에서 우리는 오늘도 / 영양으로 복음을 심습니다.

- 주요 효과는 키노트의 전환 효과를 이용해서 내었다.

- 마지막에 퍼진 하트는 실제로 오병이어선교회가 나가있는 나라이다.

- '영양으로 복음을 심습니다' 라는 카피를 제일 많이 고심하여 만들었다. 오병이어선교회는 영양사들이 선교 목적으로 모여 탄생한 단체이며, 그것이 전문성을 띄어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도 영양이라는 전문성으로 입지가 있는 NGO를 만들어낸 단체이다.

- 영양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복음' 이라는 가치를 알리고 심고 퍼뜨리는 것이 오병이어선교회의 존립목적이다.

- 영양과 복음은 단체의 중요한 두 축이다. 절대적으로 복음이 우선이지만, 영양은 이 단체의 정체성과 같다. 둘의 관계를 피상적으로는 알겠지만, 구체적인 말로는 표현되지 않았다.

- 그래서, '영양으로 복음을 심습니다'라는 카피를 만들게 되었다. 고려한 사항들은 여러가지가 있다. 앞에서 말한 '겨자씨'를 심는다 라는 이미지. 영양과 복음이 단체의 중요한 두 가치이지만, 영양이라는 전문성을 이용해서 복음을 심고 퍼뜨리는 데에 쓰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해당 전공자들의 감동.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 이런 사항들을 고려했을 때, '영양으로 복음을 심습니다'라는 카피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 주관적으로 만족하는 카피이고, 객관적으로도 좋은 카피라고 생각한다.


(4)종반_ '오병이어하우스'에 대한 비전 선포(40초~ 마지막)

<인터넷이 잘 안되는지, 종반 영상이 안올라가네요ㅠ 나중에 올려놓겠습니다.>

- 초중반에서, 오병이어선교회가 만들어져서 31년간 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 이제, 마지막에 오병이어하우스를 위한 후원회를 만드는데, 이 의미를 열고 고무시킬 수 있는 내용을 넣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 위에 주어진 글에서는 글 자체를 넣지 않는 이상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생각했다. 객관적 사실보다는 감상이 많았기 때문이다. 난 감성적이고 감상적인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참 감동은 사실에 기초했을 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좋다. 왜냐하면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식의 논리는 말하는 사람 외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오병이어하우스'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여주셨고, 그것이 만들어지고 선한 기능을 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은 있다. 하지만 믿음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 말과 분위기로 설명과 설득을 해내는 것과 그것을 영상으로 표현하고 설명해야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영상은 보여주는 것을 통해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상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인지 뭔지는 알고 공감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영상으로 표현하는가는 다음 문제이다.

- 결국, '오병이어하우스'라는 것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것. 그 오병이어하우스는 요양원, 영성훈련센터, 선교사안식관&은퇴마을로 이뤄진다는 것. 이를 통해 사명자를 양성하고, 선교사 재교육이 이뤄지며, 은퇴선교사들이 건강한 쉼을 가질 수 있는 '세대를 잇는 가족신앙 공동체' 를 이룬다는 문서에 정리된 객관적 내용을 넣기로 생각을 했다.

- 앞에 이야기했듯, 오병이어하우스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자료는 없었다. 사진도, 설계도도 없었다. 그래서, 관계된 지인에게 일러스트를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 구글링을 통해 원하는 스케치들을 보내고 마을 가운데에 세 건물을 넣은 조감도 식의 일러스트 스케치를 그려달라는 요청을 했다.

- 지인이 포토샵으로 작업을 해서 보냈고, pixelmator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작업물을 png로 변환했다.

- 일러스트그림을 통해, 건물의 이름과 역할을 하나씩 설명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를 위해 일러스트를 손으로 스케치하는 효과를 넣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키노트로는 색칠하는 듯한 효과를 내기 어려웠다. 결국 모션5를 이용하게 되었다. 서두에 이야기했지만, 모션을 잘 다루지는 못한다. 어떻게 작동되는지 개념 정도야 따라갈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동작시키는지는 간단한 것만 보고 따라할 수 있을 정도이다.

- 모션5는 다음 유투브 링크의 영상을 참고했다. 이전에도 손글씨 쓰는 효과는 해봤지만, 한번 더 보고 참고했다.다. https://www.youtube.com/watch?v=prPWZ7y0b94

- 마지막으로 '다시 꿈'이라는 31주년의 주제를 띄우고 오병이어선교회의 로고로 마무리를 했다.


7. 마무리하며

- 결국 하룻밤을 꼬박 새어야 만들 수 있었다.

- 결과물은 짧고 별거 없어 보이지만, 어떻게 구성하고 표현해갈지를 생각하고 하나씩 구현해 가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이 들어갔다.

- 가치를 나타내는 것은 항상 어렵다. 자칫하면 허풍과 거짓말이 되기 때문이다.

- 만들기 전에는 불평과 불만이 많았다. 소스도 없었고 메시지도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들기 참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떻게 어려웠느냐.. 3시에 중요한 손님이 오는데, 음식을 사와야해. 근데 돈은 언제 얼마를 줄수있을지 모르겠어. 그리고 지금 10분 남았어. 이런 말을 듣는 기분이랄까. 중요한 손님이 온다는 것도 알겠고, 그 손님을 대접하고 싶은 마음도 같다. 그런데, 돈을 받아야 음식을 살 수 있는 것이고, 얼마인지를 알아야 메뉴도 생각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그것들을 10분이 남은 지금까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려워서 하기 싫은 마음은 둘째치고, 물리적으로 해낼 수 있을지를 책임지고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물론, 만드는 과정을 돌아보면 즐겁다. 내가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원 의도를 잘 살리고 성장시켜 전달되는 현장도 즐겁다.

- 내가 힘들어하는 요청이 사실 앞으로도 계속 올 것이다. 힘들다고만 하지 않도록, 요청을 프로처럼 받아서 구현해낼 수 있는 내공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혹시, 만드는 과정의 궁금한 점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시간과 여건이 허락하는 한, 성심껏 답을 남기겠습니다:)

  아프리카 대륙 대부분의 나라를 보면, 영어 혹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쓴다. 영국의 식민지였느냐, 프랑스의 식민지였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마다가스카르 같은 경우는 프랑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프랑스어와 현지어인 말라가시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공용어로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두 언어를 유창하게 사용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적당히 반씩 섞어서 쓸 수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를 상상했는데, 실제로 보니 둘 다 아니었다.


마다가스카르의 옛날 왕궁에서 찍은 안내 돌판이다. 써있는 글은 말라가시어인데, 문자로는 영어를 사용한다. 우리나라에 한글이 있기 이전에 한자를 문자로 쓰며 우리말을 쓴것과 유사한 것이다. 읽는 법이 조금 다르지만, 영어를 읽을 줄 안다면 말라가시어를 읽어내려가기에 큰 무리가 없다. 


 사실, 보통 현지인(말라가시인)들은 프랑스어를 잘 하지 못하고, 현지어인 말라가시어만을 사용한다. 사용하는 단어 중, 프랑스어가 외래어로써 가끔 섞여있기는 하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의 사람들도 아직 어묵을 ‘오뎅’이라고 하거나, 찹쌀떡을 ‘모찌’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숫자를 쓸 때에도 보통 현지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쓴다.

 그러면, 프랑스어는 언제 쓰이는 것일까? 프랑스어는 주로 관공서에서 쓰는 서류나 계약서 등에 사용되는데, 소위 ‘잘 살고 배운’ 말라가시인들이 주로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 더 ‘잘 살고 배운’ 사람들은 영어까지도 잘한다.

 아내와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현지인들이 자기들끼리는 현지어로 대화를 하다가 주문을 할 때는 프랑스어로 말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주문을 받은 사람은 같은 현지인이었고 주문이 끝나자 다시 자기들끼리는 ‘편한’ 현지어로 이야기를 했다. 프랑스어를 쓴다는 것은 ‘잘 살고, 배운’ 사람이라는 것을 티 낼 수 있는 수단이고 증거인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아주 간단한 현지어는 구사할 수 있지만, 프랑스어는 하지 못한다. 현지인이 볼 때에는 나는 참 이상한 사람이다. 외국인인데도 고급인 프랑스어를 안 쓰고 누구나 다 사용하는 현지어만 할 줄 아니까 말이다. 하루는 동네 시장에 야채를 사러 갔다. 현지어로 야채가 얼마인지 물어봤는데, 금액을 프랑스어로 이야기해주는 것이었다. 내가 웃으며, “Azafady, tsy afaka teny frantsay. Teny gasy, azafady”(미안해요. 저 프랑스어를 할 줄 몰라요. 말라가시어로 말해주세요)라고 말하니 가게 주인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현지어 숫자로 가격을 말해 주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마다가스카르를 보면 어떠한 의미에서는 식민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를 포함하여, 자국의 것보다 프랑스의 것을 더 우월하게 여기는 현지인들을 제법 많이 보았다. 생활의 많은 측면들에서도 프랑스와 주종관계처럼 보이는 것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나라들이 아프리카 대륙에 적지 않을 것이라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대문에 글을 쓰고 있다. 쓰는 내용은 'MAMA CENTRE'이다. 이른바 '마마센터'인데, center가 아니라 centre인 이유는 프랑스어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말라가시어를 현지어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일상용어에 프랑스어가 섞여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적절한 외래어를 쓰면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되는 것처럼(절대, 항상 그렇지는 않다.), 정식적인 용어나 명칭을 정할 때에 프랑스어를 많이 정한다.


 마다가스카르와 비교해 본다면, 우리나라는 참 대단한 면이 있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아직 일본어의 잔재가 우리의 언어생활 속에 남아있지만, 오용되고 있는 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대중에 널리 퍼져있는 듯하다. 물론, 한국에는 영어열풍이 아직도 불고 있다. 누군가 영어로 말을 걸어오면 위축되고, 외국인에게는 무조건 영어로 응대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나에게도 있음을 고백한다. 단순히 영어 실력 때문에 나의 그런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공용어를 쓴다는 것이 단순히 두 개의 언어를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마다가스카르의 사람들을 보며, 또한 나의 모습을 보며 언어의 문제는 한 나라의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태도가 실린 아주 묵직한 문제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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