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공부 첫번째 시간.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의 나라인 네팔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살펴보자.


이번 포스팅에서 살필 기본정보에 대한 목차는 위와 같다.

먼저, 나라이름이다. 네팔의 '네'는 네팔의 수호신 이름이라고 한다. 혹자는 네팔의 시초가 되는 민족의 한 현자 이름이라고 한다.

'팔'은 보호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네팔은 '네의 보호' 곧, 신의 보호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본정보 두번째는 지리이다.

전체 면적은 147,181 km² 세계적으로는 94번째로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

북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 자치구, 서쪽으로는 인도의 우타라칸드 , 남쪽으로는 우타르프라데시 주와 비하르 , 동쪽으로는 시킴 주와 웨스트벵골 주에 접하는 내륙국이다. 국경 길이는 2926 km, 그중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은 1236 km, 인도와의 국경 1690km 달한다.

내륙국이며, 다른 나라와의 접촉면이 넓다는 것은, 그만큼 침략이나 간섭이 많았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네팔에는 그 유명한 히말라야 산맥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맥이다.

이 글을 읽은 사람들 중 누구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을텐데, 맞다.

에베레스트는 히말라야의 여러 봉 중 하나이며, 세계에서 가장 높다.

그 외에도 K2나 한국영화 히말라야의 배경이 된 안나푸르나 등 유명한 산이 많다.

이 산들은 기본적으로 8천미터를 다 넘어간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는 백두산은 2744m정도이다.

 인더스강갠지스강브라마푸트라강창강(양쯔강) 등 아시아권 문화의 근원을 이루는 여러 강들이 이 히말라야 산맥에서 흘러나온다.

기후는 아열대 몬순기후에 속한다. 덥고 습하고 계절에 따라 비가 많이 온다는 뜻이다.

6-9월은 우기이며 폭우로 인한 피해가 많다.

10-5월은 건기이며, 밤낮 기온차가 심하다.

이는 지역마다 고도차가 커서 강수량과 기온차가 심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인구는 당연히 네팔인이 제일 많고, 그 다음이 인도인 부탄인 순이다.

불교사원 근처에는 티베트 난민촌이 많다고 한다.

총 인구는 약 2800만이다.

평균연령은 20.07세로 젊은 편이다.

여자 1,000명당 남자 수는 1,060 명으로 남자의 수가 많다.

네팔인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한다.

주력 수출상품은 사탕수수 및 담배이다.

하지만, 지형이 험해 생산력이 열악하다.

그 외에도 히말라야를 통한 관광업이 흥하다.

사용하는 언어는 '네팔리', 바로 네팔어이다. 하지만, 다양한 부족이 있고 각 부족들 내에서는 각자의 부족어로 대화를 한다.

미디어에서는 힌디어로 된 방송이 많이 나온다.

보통 저개발국가에 가면, 그 나라 자체방송이 아닌 근처 큰 나라의 방송이 더빙 혹은 자막처리되어 방송된다. 어릴 때부터 힌디어에 노출이 된다는 소리인데, 많은 네팔인이 힌디어를 듣고 이해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특히 인도 국경에 인접한 도시에서는 힌디어가 많이 쓰인다.

젊은 층의 경우는 영어가 매우 능숙하며, 700만 정도가 제 2언어로 영어를 사용한다.



※위 정보들은 서적과 인터넷 검색, 저자의 기본상식을 토대로 쓰여졌습니다.

한 나라에 대해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텐데, 크게는 직접 살아보는 방법과 자료 및 문헌조사로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조사도 하고 살아도 보면 좋겠지만, 외부에서 검색할 수 있는 자료는 이정도구나 하는 수준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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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출장을 갔다.

대부분 저개발국가가 해당되지만, 캄보디아는 미량영양소가 부족한 영유아가 많다.

무슨 말이냐...!

탄수화물인 밥은 많이 먹어서 살은 찌지만, 비타민과 철분 미네랄 등의 미량영양소는 섭취하지 않아서

몸과 머리가 골고루 성장하지 않을 위험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환경적으로 엄청 편식을 하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다양한 단체가 여러 방법으로 이 문제에 뛰어들고 있다.

내가 일하는 위드에서는 영양보충식을 만들어 공급한다.

대부분의 미량영양소는 캄보디아에 나는 여러 작물, 길가에 난 식물 등에서 섭취할 수 있다.

이를 이용해 영양보충식을 만들어 영유아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출장은 영양보충식 공장 건축 과정의 모니터링이었다.


사진과 페북에 남겼던 간단한 느낌을 남긴다.


길 위에서




gno



1 . 비행기에서 승무원이 물었다.
“Are you Cambodian?”
내가 웃으며 답했다.
“No, I’m Korean”
스튜어디스는 한국인이었다.
어느 나라를 가든 오해를 받는다.


2. 노을을 지나는 전기선이 예뻤다.


3. 산이 없다. 끝이 사라지는 길이 많다.


4. 사람들이 작다. 나는 평균키다.


5. 다음에 온다면 앙코르왓을 가보고 싶다. 화양연화 마지막 장면과 마주하고 싶다.


미얀마 공부_공유.pdf



미얀마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온라인으로 접근 가능한 매체로만 미안마에 대해 알아보았다.

위에 첨부는 발표용 pdf파일이고, 아래는 그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사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얼마든 찾을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목차를 나누고 내 것으로 하나씩 소화하며 정보를 모았다는 데에 무게를 더할 수 있다.

이슈가 무엇일까, 중요한 내용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선별하며 글을 썼다.

감정과 감성적인 판단은 최대한 자제하려 노력했다.

필요하신 분은 참고하시길, 그리고 출처는 꼭 밝혀주시길:)




1. 기본정보

(1)위치

인도차이나 반도는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한 반도이다.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얀마는 인도차이나반도에 속해있으며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 라오스, 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2)수도

 공식 수도는 네피도이다. 2006년까지는 양곤이었으나 바뀌었다. 현재까지도 양곤은 경제수도라고 불리고, 많은 지도에서 아직도 양곤을 수도라 표기하고 있다.

(3)기후

기후는 전반적으로 고온다습한 열대 몬순 기후이다. 계절은 건기, 우기, 겨울로 나눠진다. 건기중 가장 시원한 계절인 11월-2월 기간중 평균최저 기온은 17℃이나, 3월에서 5월 기간중 평균 최고기온은 40℃가 넘는다.

(4)인구

인구는 약 5350만명이다.(2017년 10월 8일 12:41시 기준 53,501,874명) 평균나이는 27.9세로 젊은 편이며 약 40%가 도시에 살고있다.


(5)언어

공용어는 버마어(미얀마어)이며, 구어체와 문어체가 다른 형태로 쓰이는 특징이 있다.






2. 미얀마 국명 그리고 역사


(1)배경

여러 지도나 문서를 찾아보면, 미얀마는 버마라고도 불리며 두 이름이 같이 쓰인다. 버마는 브라만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했다. 이 글에서는 편의를 위해 이하 미얀마로 통칭하겠다.
대한민국은 1991년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가 내린 결정에 따라 미얀마라고 부르고 있다. 외국에서는 미얀마 보다는 버마라는 이름을 주로 쓴다. Myanmar known as burmese 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왜 한 나라에 다른 두 이름이 공존하는 것일까. 먼저 미얀마의 역사를 봐야 한다.


(2)역사: 버마왕조부터 현대까지

대한민국 이전에 조선왕조가 있었던 것처럼, 버마 왕조가 있었다. 버마 왕조의 역사는 영국에 의해 1885년 끝이나고, 1886년에 영국령 인도에 속한 한 주로 존재했다. 1937년에는 버마가 인도로부터 분리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1942년 아웅산과 일본군이 미얀마에 들어와 일본 식민지가 시작된다. 아웅산은 미얀마의 독립운동 혁명가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현 미얀마를 이끄는 아웅산 수찌가 아웅산의 딸이다. 아웅산은 미얀마 독립을 목적으로 일본군과 함께 미얀마에 들어왔으나, 영국보다 잔인한 일본군의 통치를 보고 생각을 바꾼다. 1945년, 일본군이 패망하고 아웅산은 영국 정부와 담판을 지어 독립을 이끌어냈다. 아웅산은 미얀마에서 ‘민족의 영웅’, ‘국부’로 불린다.

독립 후, 버마연방이 설립되었다. 민주적 정치가 행해졌으나, 1962년 네윈 장군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군부독재가 시작되었다. 이후 군부를 향한 계속된 민중 저항이 있었다.
2010년에는 길었던 군부독재가 끝나고, 민주적 투표가 이뤄졌다. 이 투표에서 승리한 당은 바로 군사정권의 지원을 받는 당이었다. 형식적 민주화는 되었으나 군사정권만 연장된 꼴이었다. 이후 2015년에 개최된 총선에서 야당인 국민민주연맹이 상하원·지역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며 정권교체를 확정했다. 국민민주연맹을 이끄는 당수가 바로 아웅산 수찌이다. 이렇게 2015년에야 군사정권에서 벗어나 실질적 민주화를 이루었다.



(3) 두 이름을 가진 나라


미얀마 이름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버마와 미얀마, 이 둘로 국호가 병용되고 있었다. 앞에 언어에서 구어와 문어가 다르다고 했는데, 구어로는 버마, 문어로는 미얀마였다.
1989년, 군부에서 미얀마의 공식 명칭을 미얀마로 변경했다. 버마라는 이름이 영국 식민지시대의 잔재라는 이유와 주류 민족인 버마족 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포괄하겠다는 의미에서였다. 현재 두 개 이름이 혼용되는 것은 이에 대한 반발이다. 군부를 향한 저항은 국민 정서를 대변한다. 국민들은 군부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외국 언론사 및 시민단체, 정부 등도 마찬가지였다. 미얀마는 정통성도 정당성도 없는 군부가 지은 이름이다. 군부를 인정치 않는 사람들은 미얀마 대신 버마라는 단어를 쓴다. 외국에서는 ‘버마라고 알려진 미얀마’라는 표현을 쓴다. 한국 일부 언론사도 미얀마 군부를 인정치 않는다는 의미로 버마라는 표현을 쓴다. 물론, 공식 명칭은 미얀마이다.
이렇게, 미얀마는 민주화 역사가 짧다. 군부 잔재도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3. 아웅산 수찌

(1)민주화 그리고 아웅산 수찌

앞에서 설명한, 민족의 영웅 아웅산이 낳은 딸이 바로 아웅산 수찌이다.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가정을 꾸려 살아가던 중, 1988년 군부반대 집회인 ‘8888항쟁’에 참가하면서 민주화 운동 지도자로 급부상하게된다. 정부에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야당세력을 통합한 수찌는 1989년에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서방세력도 군부에 민주화 압박을 했다. 1990년에 총선이 이뤄져서 수찌가 이끄는 야당연합이 압승했으나, 군부는 선거결과를 무효시키고 야당 지도부를 투옥시킨다. 1991년 수찌는 민주화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는데, 가택연금으로 시상식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2010년 다시 총선이 있었고, 군부인 여당이 압승을 거둬 수찌는 연금에서 해지된다. 연금에 처해진 동안에도 수찌는 몰래 외국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등 암암리에 민주화 활동을 했다.

2015년 수찌가 이끄는 야당연합이 총선에서 승리했다. 2016년에는 야당연합에서 틴초라는 대통령이 배출되었다. 미얀마 헌법상, 외국인 배우자 및 자녀를 두고 있는 자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 현재 수찌의 직함은 외교부 장관 겸 국가자문역이다.


(2)아웅산 수찌가 가지는 의미

아웅산 수찌는 민주화 운동에서 상징적 인물이다.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으니, 군부에서도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다. 현 총선에서 승리하고 대통령을 배출한 야당 실질적 지도자이며, 사실상 대통령 역할을 수행하는 위치에 있다. 미얀마에 대한 모든 국내외 기대가 아웅산 수찌에 쏠리는 이유이다.

수찌는 상징적 민주화 인물이지만, 시민사회 문제에는 큰 발언을 하지는 않았다. 현실 정치에 참여한 기간도 길지 않다. 대통령을 넘는 권한을 갖지만, 결국 대통령은 되지 못한다는 한계도 있다.

상징적 권력, 실질적 권력이 있지만 현실 정치에서 문제를 풀어낼지는 미지수이다. 짧은 민주화 역사, 군부 잔재, 수찌라는 조합은 정치, 종교, 사회 등 여러 영역에서 기대와 혼란을 함께 보인다.





4. 종교

(1) 불교의 나라 미얀마

미얀마를 수식하는 단어들이 있다. 황금의 나라, 천불천탑의 나라, 기부의 나라, 그리고 이 모두를 포함하는 '불교의 나라'이다.

불교역사가 2,500년이 넘는 미얀마에는 탑이 400만개가 넘는다. 그 중 관광지로도 유명한 쉐다곤 파고다가 있다. 파고다는 '불탑'을 의미한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는 탑골 공원이 가진 다른 이름이 파고다 공원인 이유다. 같은 이름을 가진 어학원도 있다.) 미얀마에 있는 불교신자들은 공덕을 위해 얇은 금을 불상 혹은 탑에 붙인다. 옛날부터 이 때문에 미얀마는 금 세공기술이 발달하기도 했고, 황금의 나라라고도 불린다. 2016년 기준으로 GDP가 1,391달러(한화 약 150만원)인 미얀마는 세계에서 기부지수가 1위인 기부의 나라이기도 하다.(한국은 75위이다.)  불교 최고 덕목이자, 수행방법인 보시가 기부로 나타난다. 어려운 이들에게 기부를 하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이 불교 관련 시설과 승려들에게 기부된다. 이 이름들이 생긴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불교국가 미얀마가 있다. 이 모든 이름들은 불교적 공덕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얀마는 국민 90%가 불교를 신앙종교로 갖고있다. 그 외, 기독교(4%), 이슬람교(4%) 등(정령신앙 1%, 기타신앙 2%)이 나머지 10%를 차지한다.


(2) 신쀼의식과 종교모독죄

미얀마 남자들은 일생에 한번 이상은 반드시 신쀼의식을 치른다. 부처가 왕자일 때 출가하여 수행했듯이 남자들도 유년기에 단기간 승려 생활을 재현하는 행사이다. 아들이 신쀼의식을 받을 경우, 그 어머니도 함께 공덕을 쌓게 된다고 믿는다. 미얀마에는 ‘종교 모독죄’가 있기도 하다. 불교 관련 시설에 신발을 신거나 짧은 옷차림으로 들어가면 이 죄에 속한다. 불교 관련 이미지를 종교적 목적 외에 사용해도 죄에 속하는데, 부처 문신을 하거나 부처 캐릭터 가방을 드는 등이 이에 해당한다. 종교 모독죄를 저지르면, 구속이나 구금 그리고 강제추방을 당할 수 있다. 이렇게 국민 정서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불교는 미얀마에 깊이 들어와 있다.





5. 소수민족 탄압

(1)로힝야족 사태

불교나라 미얀마에서 이슈가 되는 한 사건이 있다.  스스로는‘미얀마 소수민족’으로, 미얀마 정부에서는 ‘불법 이민자’로 분류하는 로힝야족 탄압이다. 로힝야족은 무슬림으로 인도 동부 언어인 벵골어를 쓰며, 180만~200만 규모로 78년 이전엔 대부분 미얀마 서부와 북부에 살았다.

과거부터 지속적으로 이슈가 된 사건이지만, 아웅산 수지가 집권함에 따라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로힝야족은 인근국가인 방글라데시로 도망가거나 보트피플로 연명하기도 하는 처지이다. 21세기형 홀로코스트(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독일 제국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유태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천1백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이다.) 라고도 불린다.


(2)영국 식민시대 그리고 소수민족

로힝야족 사태는 여러 요소가 겹쳐 만들어졌다. 먼저 영국 식민지 시대를 살펴보자.

영국 식민지 시대 때, 영국 정부와 영국 기독교 선교사들은 미얀마 국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노력했다. 기대와는 다르게 불교가 강한 미얀마, 그중 버마족을 개종시키기는 어려웠다. 영국 정부는 버마족을 견제하기 위해, 산간이나 구석에 사는 소수민족을 개종시켜 미얀마 식민통치 부역자로 사용하였다. 로힝야족은 무슬림이지만 식민통치 부역자로 사용된 종족 중 하나였다.(우리나라 친일파와 비슷하다.)


(3)정치적 이유 : 군부독재가 자행한 불교 사회주의

로힝야족 탄압은 군부독재에서 시작했다. 군부독재자였던 네윈은 버마족과 불교를 우선시하는 ‘버마식 사회주의’, ‘불교 사회주의’를 국정철학으로 내세웠다. 일당독재, 외국인 추방, 등 폐쇄적 요소들이 담긴 그 정책에는 소수민족 탄압도 포함되어 있었다. 1982년, 미얀마 군부가 만든 국적법에서 국민 기준을 영국 통치 이전부터 거주한 민족으로 제한했다. 식민잔재를 청산하겠다는 법이다. 로힝야족은 본인들이 토착민족이라 주장했지만, 결국 외국에서온 이민자로 분류되었다.

1978년, 로힝야족 20만명이 방글라데시로 밀려났다. 91~92년에는 25만명 이상이 쫓겨났고, 그 흐름은 계속되고 있다. 단순히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군부와 로힝야족간 방화, 살인, 강간 등 비인도적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4)종교적 이유 : 소수종교 탄압

민주화가 된 현재에도 로힝야족 탄압은 끊어지지 않았다. 민주화 과정에서 불교와 민족주의가 결합하여 배타적인 소수 종교 탄압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미얀마 불교 자체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일부 과격한 불교 민족주의 단체가 탄압을 행하고 있다. 이는 타임지에도 미얀마 불교 테러리즘의 얼굴 이라는 제목으로 다뤄진 적이 있다. 최근에도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위엄있는 W)가 발표되었다. 극단적 불교 지도자 중 대표적 인물은 ‘아신 위라투’라는 사람이다.


(5) 소수종교 탄압과 기독교

정부군, 불교와 같은 종교, 사회, 정치적 요소들이 결합되어 로힝야족 사태가 발생하였다. 로힝야족은 소수종교 탄압 예시 중 하나일 뿐이다. 미얀마에 사는 기독교인 수십만명이 종교박해를 피해 말레이시아에 난민으로 있다는 기사도 발표되었다.


현재, 실질적인 미얀마 지도자인 아웅산 수찌는 이런 탄압에 대해 특별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는 상황이다.


6. 가난, 영양, 질병

(1)아시아 개발은행 자료 : 가난선과 유아사망률

아시아 개발은행에 참고할 만한 미얀마 자료가 있다. 자료에 따르면, 미얀마 국민 25%가 동아시아 국가빈곤선 아래에 있다.(In Myanmar, 25.6% of the population lives below the national poverty line.), 하루에 태어나는 아이 천명 중 40명은 첫 돌 전에 생을 마감한다.(For every 1,000 babies born in Myanmar, 40 die before their first birthday.)


(2) WFP 자료 : 아동 영양

WFP에서도 참고할 만한 자료가 있다. 아이들 중 35%가 만성영양실조에 의해 성장 둔화 징조를 보인다. 아이들 중 8%는 심각한 급성영양실조에 처해있다. (Undernutrition rates continue to be among the highest in the region. More than 35 percent of children in Myanmar show signs of stunted growth caused by chronic malnutrition, while 8 percent of children are acutely malnourished.)


(3) 식량 안보 불안

이와 같은 가난과 영양 문제는 식량 안보 불안에서 생긴다. 식량안보가 불안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진과 사이클론 등 자연재해가 빈번하기 때문이며, 다른 한 가지는 불안한 내부정세로 인해 많은 내부 유혈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정치, 종교, 사회 문제가 결국 식량안보까지 이어진다.


(4)로힝야족 아동영양

아동 영양상태만 보면, 방글라데시 연안에 사는 소수민족 아이들 상태가 가장 심각하다고 한다. 이는 바로 앞에서 이야기 한, 로힝야족 아이들 이야기이다. 여러 국제기구에서 아이들을 위한 지원을 하려 하나, 미얀마 정부에서는 그런 지원조차 봉쇄하고 있는 실정이다.

관련한 최근 기사를 아래에 인용한다.

“로힝야족 인권단체인 아라칸 프로젝트의 크리스 레와 국장은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고 있다"며 "이런 간접적 희생자들이 정부군에 의해 살해된 이들보다 많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단체에 따르면 미얀마 정부군이 살해한 로힝야족 수는 200명 정도이지만 봉쇄에 따른 지원 부족으로 사망한 어린이수는 무려 1천명에 달한다.

작년 두 마을에서 진행된 조사에 따르면 이 지역에 사는 어린이 1만3천155명 중 3천466명이 심각한 급성영양실조(SAM)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봉쇄로 인해 3천200명의 어린이가 이에 추가될 것으로 우려된다고 신문은 전했다.”

(5) 교육 및 질병

그 외, 다른 문제들도 심각하다. 미얀마 어린이들 중, 약 50%만 초등교육을 마친다.(Coupled with food insecurity, only about half of school age children complete their primary education.)

World Development Indicators(2015)에 의하면 중학교(lower secondary) 입학률이 48.3%, 중학교 수료율이 48.7%이다.

결핵 환자 비율은 아시아에서 제일 높으며, 세계 평균 3배이다.(Tuberculosis (TB) prevalence rates in Myanmar are among the highest in Asia and three times the global average.)  HIV 발생 위기그룹, 특히 마약류 주사가 그 원인인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인 23%가 된다.(HIV prevalence among at-risk groups, especially people who inject drugs, is one of the highest in the world, at 23 percent.)


내가 일하는 WITH에서는 라마나욧 스터디를 한다. 아니, 했었다.

잠시 멈춰있던 그 흐름을 내가 이어받게 되었다.

시작하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리한 것을 아래에 남긴다.

첫달에 진행한 '인도'에 관한 내용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라마나욧 모임을 맡게 되다.

  라마나욧 모임은 왜 해야 하는가? 글을 시작하게 된 질문이다.

 

  라마나욧 모임을 담당하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라마나욧 스터디와 라마나욧 모임을 담당하게 되었다. 라마나욧 모임은 Yellow Window(이하 YW라 표기)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시간이다. 정보를 나누기 위해서는 득하는 공부, 영어로 스터디가 필요하다.(위드 내부에서는 관습적으로 공부보다는 스터디 라는 말을 쓴다.) 스터디는 지식을 모아 내것으로 소화하는 과정이다. 지식이 소화되면 정보와 그를 통해 얻은 마음이 생긴다. 이를 나누기 위해서는 다시 정보의 가공과 선별 그리고 콘텐츠화가 필요하다. 이 과정들이 선행된 다음 단계가 라마나욧 모임이다.

 


흔한 인도 거리. 대부분 인도인이 믿는 힌두교에서는 소를 숭배한다.

길가와 도로에서 쉽게 소들을 볼 수 있다. 젖도 짜고, 일도 시키지만 숭배해서 죽이지는 않는다. 혹시나 실수로 소를 차로 치면 운전자는 죽임을, 차는 불태움을 당한다고 한다. 그런 인도는 세계 최대 소고기 수출국이기도 하다.(물소는 먹지는 않아도 도축이 가능하다고 한다.)

 

 

위드 그리고 YW

  위드는 국제개발협력 NGO이며, 그 중에서도 식품영양 분야에 특화되어 있다. 많은 국제개발협력 NGO가 여러 나라에 도움을 준다. 도움이 필요한 나라는 어디인가? 주관적인 가치관과 객관적인 수치에 따라 갈릴 수 있는 질문이다. 위드에 그 질문을 한다면, 답은 ‘YW’이다. YW란 여러 기준을 가지고 위드가 선정한 우선적으로 도와야 할 땅이다. 현재는 총 73개국이 YW에 속해있고, 그 중 20개국을 우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국가로 정하고 있다. 위드는 단순히어려운 나라’, ‘못사는 나라를 돕지 않는다. YW를 돕는다. 여기까지는 위드 홈페이지만 들어가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YW는 여러 수치들로 선정되었다. 수치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였다. 선정, 발견, 위탁 등등 여러 아름다운 단어들로 꾸밀 수 있겠지만, 그 땅들을 향한 뜨거운 마음과 감동이 우선적으로 있었기에 YW를 새로이 볼 수 있는 눈도 있었을 터이다.

  수치란 명확하지만 작은 등불과 같다. 놓인 몇몇 부분은 밝히지만 전체에는 미치지 못한다. 수치를 더 늘리고 나열하고 분석하면 어떨까. 나라들을 특정 기준으로 분류하고 선정할 수는 있지만 온전히 알기는 어렵다. 세상에 없던 기준을 만들고 세우는 일에는 가치가 있다. 또한 그 무게만큼 무거운 일이다. 그보다 더한 일은 만든 가치를 지켜내는 일이다. 지키기 위해서는 시도가 필요하다. YW를 발견한 데에서 크치지 아니하고, 위드에 라마나욧 모임이 필요한 이유를 생각해보면 여기에 있지 않을까.


파트나 기차역 안, 깨진 유리창 너머로 시장이 보인다.

YW는 어쩌면 위드가 발견한 깨진 유리창이 아닐까. 깨짐을 발견한 이가 가지는 사명은 바로 회복이다.

깨진 유리창 이론을 보고 생각한 내용 맞다.

 




라마나욧 모임이 필요한 이유

  누군가를 알아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가공된 정보와 결과물을 읽어내고 시간이 필요하다. 필요가 충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데이터는 때로 사실을 왜곡한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일반화시키며, 그 시각만이 옳다고 확층편향시킨다. 정보는 일방적이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더 우선순위를 둬야하는 시간이 있다. 대상과 갖는 만남과 대화 시간이다. 무언가를 캐내기 위해 급히 물어보는 아픈 질문이 아닌 서로를 알아가는 대화이다. 직접 만남일 수도 있고, 적힌 문장과 문장 그 사이에 있는 의중을 볼 수도 있다. 행간을 읽는다고 한다. ‘알기가 아닌알아가기위함이다. 기약 없는 만남일지라도 묵묵히 그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한 나라에 대한 알아감도 그렇다. 앞에서 설명했듯 위드는 YW 73개국을 지정했다. 그 중 20개국은 우선적으로 도와야 할 나라로 다시 분류된다. 20개국 중 하나인인도(India)를 예로 들어보자. 인도 사람들은 위드라는 단체가 자신이 사는 국가를 또한 자신들을 YW로 지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만약,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군대에서 나도 모르게 관심병사로 지정받고, 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을 위한 관리감독을 받는 기분과 비슷할까. 그들은 어떨까.

  어떠한 나라를 돕기 위해서는 'YW로 지정됬다.' 라는 사실 외에도 많은 조사가 필요하다. 심지어, 도움이 필요한지 우리가 생각하는 필요가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필요와 일치하는지 여부부터 말이다. 그 시작이 라마나욧 스터디이다. 전부를 알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들도 보고자 하는 노력이다. 내가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 함께 말이다.

 

힌두교와 불교 발상지인 바라나시. 다양한 종교를 가진 순례객이 모인다

인도에는 신이 3 3천만 정도 있다고 한다. 숫자 자체에 의미는 없지만, 무제한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라마나욧스터디 ; 인도

  지난 라마나욧 모임에서 나눌 나라는 인도(India)였다. 멀지 않은 지난 5, 리서치차 인도를 방문했다. 이주가 채 안되는 기간이었다. 이번 모임과 관계있는 방문은 아니었다. 현장감이 사라지기 전에 이 스터디를 하게 되어 다행이기도 했다.  

  인도에 대한 책을 읽었다. 책을 찾으니 인도를 다룬 여행 에세이류가 많았는데, 그 외 심도있는 정보를 다룬 책은 많지 않았다. 관련 세미나도 다녀왔다. 현장에서 살아가시는 분들이 해 주시는 경험과 조언이 실체적으로 다가왔다. 인도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인도 특유 종교와 사상이 녹아 있는 영화들도 있지만, 오히려 상상할 수 있는 악습들에 대해 고찰하게 하는 영화가 주류처럼 등장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도 마찬가지였다. 이름은 익히 들어 알던 다큐멘터리를 이번 기회를 핑계로 보았다. 한 사람이 관심을 가졌고, 아이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았다. 허나 진정한 변화는 또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하게 하였다. 매일 아침, 시간이 없으면 저녁에라도 신문을 꼭 챙겨보려 노력한다. 관심을 갖고 보니 인도에 관한 기사가 의외로 많았다. 총리가 바뀌고서 많은 변화와 발전을 하고 있기에 주목받는 인도였다. 경제와 인권, 사회 등 여러 측면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관심이 가는 기사들은 스크랩도 했다.

 이번 인도 스터디에 제목을 붙인다면젊은 인도이다. 전 세계 30세 이하 인구 중 5명중 1명은 인도인이다. 종교, 사회, 문화, 정치, 경제 여러 분야에서 변화와 반응이 빠르다. 카스트제도, 여성차별 등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빠르게 무녀져가고 있다. 핵 보유국이며 IT 강국이라지만 특정 지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빈부 차이만큼 삶 자체가 가지는 어려움이 큰 나라가 인도였다.

 

 

갠지스강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

시체를 화장하고, 빨래를 하고, 씻고, 물놀이 하는 이 모든 일들을 갠지스 강에서 볼 수 있다.


 

라마나욧 그리고 아픔의 거리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라마나욧 모임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아픔에는 거리가 있다. 대상이 가지는 아픔이 있다면, 그 아픔과 내가 갖는 거리도 있다. 대상을 사랑하고 알게 될 수록, 아픔과 내가 갖는 거리는 줄어든다.

아픔이 있는 거리가 있다.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걸어 넘어가야 하는 길이 있다. 내 발로 직접 걸을 때에, 멀리서는 차를 타고는 볼 수 없는 아픔을 봐야만 한다.

라마나욧 스터디는 무얼까. 나름 결론을 내면, 아픔의 거리를 줄이는 또한 걷는 일은 아닐까

 

  길을 걷는 이는 내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길을 걸은 자들이 있다. 그 목적지는 같더라도 길은 다를 수 있다. 시간과 공간, 두 축이 같을 수는 없으니까 당연하다. 앞서 걸은 이가 변한만큼 길도 변했다. 업데이트 되지 않은 가이드를 따라가려면 시작부터 이질감을 느낀다. 결국 길은 걷는 각자가 개척해야 한다. 길에 올랐고, 오르고 있고, 오르려는 모든 사람이 느꼈고, 느끼고 있으며, 느끼지 않을까.

한 가지, 공통된 감동이 있다. ‘아픔의 거리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 밟지 않으면 몰랐을 그 거리를 걸었을 때, 아픔이란 단어가 희망으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이다.

 

   "참된 발견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가 한 말이다. 저 땅이 YW라고 말하는 행위는 어렵지 않다. 그 땅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변했는가는 다른 일이다. 이제야 조금, 앞이 보이는 듯 하다.



파트나역에서 떠나기를 기다리는 기차. 정확한 출발시간과 도착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래도 기차는 결국 출발하고, 목적지에 도착한다. 필요한 것은 기다림과 기대함이다.

 

로힝야족 미얀마 국경이탈 다시 급증세…누적 난민 58만2천명


미얀마 로힝야족이 매일매일 핫이슈이다. 한국에서 검색만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로힝야족 사태를 정리해 보았다.

정치, 종교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일어난 일이며, 아웅산수찌도 이 문제와 연관이 있다.


(1)로힝야족 사태

불교나라 미얀마에서 이슈가 되는 한 사건이 있다.  스스로는‘미얀마 소수민족’으로, 미얀마 정부에서는 ‘불법 이민자’로 분류하는 로힝야족 탄압이다. 로힝야족은 무슬림으로 인도 동부 언어인 벵골어를 쓰며, 180만~200만 규모로 78년 이전엔 대부분 미얀마 서부와 북부에 살았다.

과거부터 지속적으로 이슈가 된 사건이지만, 아웅산 수지가 집권함에 따라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로힝야족은 인근국가인 방글라데시로 도망가거나 보트피플로 연명하기도 하는 처지이다. 21세기형 홀로코스트(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독일 제국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유태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천1백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이다.) 라고도 불린다.


(2)영국 식민시대 그리고 소수민족

로힝야족 사태는 여러 요소가 겹쳐 만들어졌다. 먼저 영국 식민지 시대를 살펴보자.

영국 식민지 시대 때, 영국 정부와 영국 기독교 선교사들은 미얀마 국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노력했다. 기대와는 다르게 불교가 강한 미얀마, 그중 버마족을 개종시키기는 어려웠다. 영국 정부는 버마족을 견제하기 위해, 산간이나 구석에 사는 소수민족을 개종시켜 미얀마 식민통치 부역자로 사용하였다. 로힝야족은 무슬림이지만 식민통치 부역자로 사용된 종족 중 하나였다.(우리나라 친일파와 비슷하다.)


(3)정치적 이유 : 군부독재가 자행한 불교 사회주의

로힝야족 탄압은 군부독재에서 시작했다. 군부독재자였던 네윈은 버마족과 불교를 우선시하는 ‘버마식 사회주의’, ‘불교 사회주의’를 국정철학으로 내세웠다. 일당독재, 외국인 추방, 등 폐쇄적 요소들이 담긴 그 정책에는 소수민족 탄압도 포함되어 있었다. 1982년, 미얀마 군부가 만든 국적법에서 국민 기준을 영국 통치 이전부터 거주한 민족으로 제한했다. 식민잔재를 청산하겠다는 법이다. 로힝야족은 본인들이 토착민족이라 주장했지만, 결국 외국에서온 이민자로 분류되었다.

1978년, 로힝야족 20만명이 방글라데시로 밀려났다. 91~92년에는 25만명 이상이 쫓겨났고, 그 흐름은 계속되고 있다. 단순히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군부와 로힝야족간 방화, 살인, 강간 등 비인도적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4)종교적 이유 : 소수종교 탄압

민주화가 된 현재에도 로힝야족 탄압은 끊어지지 않았다. 민주화 과정에서 불교와 민족주의가 결합하여 배타적인 소수 종교 탄압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미얀마 불교 자체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일부 과격한 불교 민족주의 단체가 탄압을 행하고 있다. 이는 타임지에도 미얀마 불교 테러리즘의 얼굴 이라는 제목으로 다뤄진 적이 있다. 최근에도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위엄있는 W)가 발표되었다. 극단적 불교 지도자 중 대표적 인물은 ‘아신 위라투’라는 사람이다.



  아프리카 대륙 대부분의 나라를 보면, 영어 혹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쓴다. 영국의 식민지였느냐, 프랑스의 식민지였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마다가스카르 같은 경우는 프랑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프랑스어와 현지어인 말라가시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공용어로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두 언어를 유창하게 사용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적당히 반씩 섞어서 쓸 수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를 상상했는데, 실제로 보니 둘 다 아니었다.


마다가스카르의 옛날 왕궁에서 찍은 안내 돌판이다. 써있는 글은 말라가시어인데, 문자로는 영어를 사용한다. 우리나라에 한글이 있기 이전에 한자를 문자로 쓰며 우리말을 쓴것과 유사한 것이다. 읽는 법이 조금 다르지만, 영어를 읽을 줄 안다면 말라가시어를 읽어내려가기에 큰 무리가 없다. 


 사실, 보통 현지인(말라가시인)들은 프랑스어를 잘 하지 못하고, 현지어인 말라가시어만을 사용한다. 사용하는 단어 중, 프랑스어가 외래어로써 가끔 섞여있기는 하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의 사람들도 아직 어묵을 ‘오뎅’이라고 하거나, 찹쌀떡을 ‘모찌’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숫자를 쓸 때에도 보통 현지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쓴다.

 그러면, 프랑스어는 언제 쓰이는 것일까? 프랑스어는 주로 관공서에서 쓰는 서류나 계약서 등에 사용되는데, 소위 ‘잘 살고 배운’ 말라가시인들이 주로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 더 ‘잘 살고 배운’ 사람들은 영어까지도 잘한다.

 아내와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현지인들이 자기들끼리는 현지어로 대화를 하다가 주문을 할 때는 프랑스어로 말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주문을 받은 사람은 같은 현지인이었고 주문이 끝나자 다시 자기들끼리는 ‘편한’ 현지어로 이야기를 했다. 프랑스어를 쓴다는 것은 ‘잘 살고, 배운’ 사람이라는 것을 티 낼 수 있는 수단이고 증거인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아주 간단한 현지어는 구사할 수 있지만, 프랑스어는 하지 못한다. 현지인이 볼 때에는 나는 참 이상한 사람이다. 외국인인데도 고급인 프랑스어를 안 쓰고 누구나 다 사용하는 현지어만 할 줄 아니까 말이다. 하루는 동네 시장에 야채를 사러 갔다. 현지어로 야채가 얼마인지 물어봤는데, 금액을 프랑스어로 이야기해주는 것이었다. 내가 웃으며, “Azafady, tsy afaka teny frantsay. Teny gasy, azafady”(미안해요. 저 프랑스어를 할 줄 몰라요. 말라가시어로 말해주세요)라고 말하니 가게 주인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현지어 숫자로 가격을 말해 주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마다가스카르를 보면 어떠한 의미에서는 식민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를 포함하여, 자국의 것보다 프랑스의 것을 더 우월하게 여기는 현지인들을 제법 많이 보았다. 생활의 많은 측면들에서도 프랑스와 주종관계처럼 보이는 것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나라들이 아프리카 대륙에 적지 않을 것이라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대문에 글을 쓰고 있다. 쓰는 내용은 'MAMA CENTRE'이다. 이른바 '마마센터'인데, center가 아니라 centre인 이유는 프랑스어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말라가시어를 현지어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일상용어에 프랑스어가 섞여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적절한 외래어를 쓰면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되는 것처럼(절대, 항상 그렇지는 않다.), 정식적인 용어나 명칭을 정할 때에 프랑스어를 많이 정한다.


 마다가스카르와 비교해 본다면, 우리나라는 참 대단한 면이 있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아직 일본어의 잔재가 우리의 언어생활 속에 남아있지만, 오용되고 있는 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대중에 널리 퍼져있는 듯하다. 물론, 한국에는 영어열풍이 아직도 불고 있다. 누군가 영어로 말을 걸어오면 위축되고, 외국인에게는 무조건 영어로 응대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나에게도 있음을 고백한다. 단순히 영어 실력 때문에 나의 그런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공용어를 쓴다는 것이 단순히 두 개의 언어를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마다가스카르의 사람들을 보며, 또한 나의 모습을 보며 언어의 문제는 한 나라의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태도가 실린 아주 묵직한 문제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타문화권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마주한다는 것은 설레기도 하지만 긴장되기도 하는 일이다.


한국에서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로 가려면, 대부분 1번 이상 경유하는 항공편을 이용해야 한다. 우리 같은 경우는 태국의 방콕과 케냐의 나이로비를 거쳐 마다가스카르의 안타나나리보로 입국하는 경로였다.


​케냐 공항에서 마다가스카르로 가는 공항에서 마신 커피. 케냐에서 케냐AA를 마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한국을 잘 떠나서 방콕에 도착하였다. 비행기에도 공항에도 같은 동양권의 사람들이 가득했다. 문제는 방콕에서 나이로비로 출발하는 비행기에서 있었다. 공항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비행기에 타고 보니 우리를 빼고는 주변에 보이는 모든 사람이 ‘흑인’이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아프리카에 간다는 실감이 났다.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모를 압박과 긴장감이 우리에게 있었다. 문화권이 다를 뿐 아니라, 우리와 생김새가 전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이 만들어낸 우리 안의 편견이었을 것이다. 물론, 반년을 살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


내가 사랑하던 자카랴와 나의 발. 내 발도 타서 검어졌다. ​


​마다가스카르의 사랑하던 말라가시인 가족. 잘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흑인처럼 새까맣지는 않다.

같은 동양인이라도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사람 각각의 생김새가 갖는 특징이 있다. 같은 한국 사람 중에서도 생김새가 다르고 피부색도 조금씩 다르다. ‘흑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나라마다, 또한 종족마다 조금씩 다른 피부색과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살았던 마다가스카르의 말라가시인 같은 경우는 체구가 작고, 인도 사람을 연상시키는 어두운 갈색 피부톤을 갖고 있었다. 반면, 우리가 경유했던 케냐의 사람들 같은 경우는 정말 밤처럼 까만 피부에 근육질의 큰 몸집을 갖고 있다. 물론, 사람마다 개인차는 있고 그 차이를 우리가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한 번은, 지나가는 ‘흑인’에게 안녕하냐는 의미의 말라가시어인 ’마나호아나’ 하고 인사를 건네었는데, 굉장히 기분 나쁜 표정으로 ‘Hello!’ 하고 나를 스쳐갔던 기억이 있다. ‘Hello!’라는 말에는 ‘나는 마다가스카르 사람 아닌데, 너 왜 그 언어로 나한테 인사해?’라는 의미가 담겨있었을 것이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비행기 안에서의 그 긴장감, 그 떨리는 순간이 우리에게는 아프리카에 진입하는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아프리카에 대한 글을 써보려고 앉았다. 아프리카라는 이름에 걸맞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글을 시작해야 할까? 끝이 없는 초원, 그 사파리의 왕좌를 차지한 사자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검은 대륙의 신비와 놀라움에 대해 이야기해도 좋겠다.


 글을 잘 포장하기 위한 매력적인 소재를 떠올리려 잔머리를 굴리던 내게 떠오른 건, 참 부끄럽게도 한 아이와 그 엄마의 이름이었다. ‘자카랴와 쥬스트라’.

 자카랴. 결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우리 부부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첫사랑과 같은 아이였다. 인형처럼 새까만 피부와 내 영혼까지도 관통하는 눈망울을 가진 아이였다. 자카랴가 처음으로 걷기 시작했을 때를 기억한다. 넘어질 듯 넘어질 듯 아장아장 걸어와 나에게 안겼던 그 순간에는 내가 기쁨이라는 감정을 마치 처음 접한 듯이 기뻤다. 자카랴가 막 입을 떼고 말하기 시작한 때를 기억한다. 잠잠히 내 품에 안겨있을 때,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다다’라고, 그들의 언어로 ‘아빠’라 말해주었을 때는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났었다. 그다음 날부터 자카랴가 모든 사물을 가리키며 ‘다다’라고 부르는 것을 본 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았지만 말이다.

 쥬스트라는 자카랴의 엄마였다. 처음 만났을 때에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나눴다. 남편은 멀리 돈을 벌러 가서 홀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는 것, 나와 같은 나이임에도 이미 다섯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 그중 한 아이는 하늘로 보내 주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소통에 필요한 것은 언어보다도 이해하려는 마음과 전하고픈 마음이라는 것을 그날 알게 되었다.

엄마인 쥬스트라와 아들인 자카랴이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사진을 찍는 것을 고마워하기도,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마치, 검은 성모마리아 같다는 생각도 하게된 아름다운 모습니다.

 우리 부부는 결혼하자마자 아프리카 대륙의 마다가스카르라는 나라로 오게 되었다. 우리가 아프리카에 가면, 주어진 반년의 시간 동안 무언가 대단한 것을 보게 될 줄 알았다. 뭔지는 몰라도 심오한 것을 알게 될 줄 알았다. 사실 그런 것들을 기대했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미디어에서, 책에서 본 엄청난 것들을 사실 그 땅에서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건물만큼 큰 바오바브나무를 보았고 그 희귀하다는 여우원숭이도 보았지만 우리가 만난 가치 있는 것들은 책에 나오지 않는 작은 것들이었다. 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아이를 안았을 때, 집을 방문했을 때, 함께 밥을 먹을 때, 시시덕거리며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에, 그들을 볼 수 있었고 그들과 마주한 우리를 오히려 더 잘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자카랴를 안을 수 없을 정도로 냄새가 많이 났는데, 아내가 씻기고서라도 안고 뽀뽀해주겠다며 목욕을 시키는 장면이다. 물론, 나중에는 냄새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어디를 가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아프리카’라고 단순히 이야기했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어디를 갔다 왔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이제는 조금 다르게 말한다.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마다가스카르라는 나라에 갔다 왔고, 그 나라에만 18개의 종족이 있으며, 내가 살았던 곳에서는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러고 보니, 이제 조금 아프리카가 보이는 것 같다. 아프리카는 나라가 아닌 대륙이라는 것, 그 대륙 안에는 수많은 나라가 있으며, 그 나라 안에는 또 수많은 종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도 형태는 다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와 같이 소중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마다가스카르에서 보낸 반년의 시간은, 나에게 아프리카를 이해하는 시작과 같은 시간이었다. 우리 부부가 그곳에서 보냈던 평범한 일상 중 기억나는 것들을 담담히 이야기하려 한다. 이 시간을 통해, 아프리카와 우리의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를, 그들에 대해 알고 우리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지피지기’의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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