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내용은 (사)위드에서 각 나라의 기본 정보를 공부하는 

'라마나욧 스터디'를 위해 직접 제작한 자료입니다.

이 글에서 다룰 국가는 캄보디아 입니다.



그 중에서도 역사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후난(Funan) 왕국 86~550년

인도로부터 종교와 정치제도를 들여와 1세기경 캄보디아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후난 왕국이 건립되었다. 3세기 초 왕국의 전성기를 맞아 남쪽으로는 말레이시아, 서쪽으로는 미얀마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며 중상주의 정책을 펼쳐 인도 등의 주변국들과의 무역이 성행했다.

 

첸라 왕국 550~802년

 후난왕국으로부터 독립해 세워진 첸라 왕국은 점차 영토를 확장시켜 7세기에는 후난 왕국을 완전히 정복했다. 이후 8세기에는 육첸라(land Chenla)와 수첸라(water Chenla)로 양분되었다.

 

앙코르 왕국 802~1431년(크메르 제국이라고도 한다.)

 크메르 문명의 황금기라 불리는 앙코르 왕국은 9~13세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캄보디아라는 이름의 유래이기도 하다. 캄보디아의 대표적 유적 앙코르왓(Angkor Wat)이나 앙코르 톰(Angkor Thom)도 앙코르 왕국의 건축물이며, 강력한 정권 하에서 문화적 독창성에 있어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14세기부터 점차 몰락해 1431년 태국에 정복당했다.



*앙코르왓

앙코르왓은 힌두 사원입니다.(wat은 사원이라는 뜻입니다.) 인간과 코끼리의 힘으로만 지었다고 합니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어 대단한 건축기술을 자랑합니다. 역사에서 잊혀져 있다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한 탐험가로부터 발견이 되었습니다. 혹시 ‘화양연화’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이 앙코르왓입니다. 화양연화는 ‘인생에 가장 찬란한 순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처럼 캄보디아 역사에서 가장 빛나게 기억되는 순간인것 같습니다. 캄보디아가 되기까지 많은 국기가 있었는데, 전부 이 앙코르왓이 국기에 새겨져 있습니다.



캄보디아의 암흑기 1431~1863년

15~19세기는 계속적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영토가 축소되어 캄보디아의 암흑기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잦은 침략과 정복을 당했으며, 중국과 일본으로부터도 잦은 외침을 겪었다.

프랑스 식민지배기 1863~1953년

1863년 노르돔 왕이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다는 조약에 서명하고 단계적으로 식민지배를 받았다. 식민지가 되었지만, 이 선택이 없었다면 아마도 캄보디아는 다른 나라에 정복되어 지금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1941년 프랑스 식민정부에 의해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가 왕으로 즉위했다.

크메르 공화국

1954년 프랑스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한 이후, 세계 흐름에 따라 공산주의 자본주의 등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1966년 총선에서 승리한 ‘론 놀’이라는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켜 우익정부를 수립하였고 ‘크메르 공화국’을 만들게 된다. 여기서 우익이란, 긍정적 의미의 민주주의가 아닌 당시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 민주주의를 말한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역사를 이어 보려면, 베트남전을 살펴봐야 한다.

1955년 베트남공화국이 성립했다.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나, 토지개혁도 실패하고 정부는 부패하여 치안이 약화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주의 세력 중심으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만들어졌다.(한국에 있었던 남민전은 배트남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홍세화씨가 대표적 인물이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하에 있던 무장단체가 바로 베트콩이다. 베트콩이 남베트남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정부를 상대로 승리해갔고, 미국이 개입하는데 이것이 베트남전의 시작이다. 



미국의 참전한 이유는 남베트남이 공산화 되도록 놔두면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에서 같은 편인 자본주의 국가들이 하나 둘씩 공산주의화 되고 말 것이라 예상(도미노 이론)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에 미국이 관여한 이유와 비슷하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불리했다. 미국군은 전차와 비행기를 이용하는 구식 전쟁에 익숙했는데, 베트남전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전투는 정글에서 펼쳐졌는데 미국이 자랑하는 중장비를 활용할 수 없었다. 베트콩은 지형에 있숙했고, 유리할 때 싸우고 불리하면 숨는 전략을 펼쳤다. (이 때, 정글숲 풀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고엽제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남베트남은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아 군사연합작전을 수행하기도 어려웠다. 남베트남에 무기를 공급하면, 그 무기들이 북베트남이 약탈해 쓰는 정도였다. 중국이나 주변국 눈치때문에 더 큰 개입도 어려웠다. 전쟁비용도 낭비가 심했다.(100명 상대로 20억 달러 정도를 사용했는데, 1명을 잡은 꼴이었다고 한다.)



베트콩이 유리한 이유 한 가지가 더 있는데, 호치민 루트이다. 호치민 루트는 북베트남에서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거쳐 남베트남 전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루트이다. 이 루트로 물자보급, 군 재정비, 휴식 등이 이뤄졌다. 캄보디아나 라오스 입장에서는 이를 막을 능력도 없었고, 특별히 피해를 주지도 않았으니 별 대처를 하지 않았다. 미국은 호치민 루트를 막기 위해, 캄보디아와 라오스 전역을 폭격하는데 이가 비밀전쟁이다. 



미국은 성과없는 소모전을 이어갔다. 남베트남은 의지를 잃었고, 도와줄 명목도 사라진 전쟁이었다. 1973년, 미국과 북베트남은 파리에서 ‘베트남 평화협정’을 맺고 미군은 철수한다. (미국은 이 의미없는 전쟁을 빠져나오기 위해 여러 고민을 했는데, 이 때 나온 단어가 지금까지도 쓰이는 출구전략(Exit Strategy)이다.) 결국 미군은 철수했고, 베트남은 공산화가 되었다. 단순하게 이야기한다면, 마치 한국전쟁 때에 북한이 승리해서 지금 남한도 공산화가 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크메르 루즈는 1976년 ‘민주 캄푸치아’로 국명을 개칭한다.

크메르 루즈는 극단적 공산체제를 추구하고, 당시 크메르 루즈 리더였던 폴 포츠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흉내내는데, 이 때 일어난 사건이 ‘킬링필드’이다. 

처음에는 지식인들(안경을 쓰거나, 똑똑해 보이거나, 손이 곱거나, 영어를 알아듣거나)을 잡아 처형했고, 가진자들, 비협조적인 자들 등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단순히 처형 뿐 아니라, 강제노동으로 인한 과로사, 굶주림과 질병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뿐만 아니라, 보복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처형당한 사람들의 가족들, 갓난 아이까지 죽였다. 독일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처럼 소수민족도 처형했는데, 그 중에는 베트남계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150만명이 사망하였고, 극단적 농본주의 정책으로 비효율적인 농업이 이뤄졌다. 이에 가뭄이 더해져서 출생률이 떨어지고 기아 상황이 심각했다.

캄보디아에 살고있던 베트남계 사람들과 친 베트남인들은 베트남으로 다수가 난민으로 건너간다. 베트남은 난민인 ‘삼린’을 내세워, 크메르루즈를 누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민주 캄푸치아)를 세운다.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은 베트남 괴뢰 정권이라는 이유로 세계 각국에게 정당한 나라로 승인을 받지 못했다. 이후, 크메르루즈 리더인  폴포트를 포함하여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에 대항하는 ‘캄푸치아 연합정부’를 설립하고 이렇게 캄보디아 내전이 시작된다. 웃긴 상황은, 베트남전에 패한 미군이 크메르루즈를 지원하여 베트남에 대항한 것이다. 
이 양쪽 모두 이기기 위해, 민간인을 징집하고 소년병을 동원하고, 군비를 대기 위해 마약을 팔고, 전국에 지뢰를 깔았다. 사상자가 속출한건 물론이고, 농업도 복구되지 않았으며 기아와 역병도 창궐했다. 킬링필드 이후에, 이 내전시기에도 수십만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된다.


1991년, 캄보디아 계파들과 세계각국이 참여한 파리평화협정으로 내전이 끝났다. 

1993년 입헌군주제로 캄보디아 왕국이 설립되어 현재까지의 역사가 이어진다. 



아직도 캄보디아는 전쟁에 의한 피해를 복구중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킬링필드와 내전으로 인해 지식층이 단절되었고, 전쟁과 살육에 대한 사회적 트라우마가 아직 사람들에 있다. 

몇년 전, 캄보디아 기획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킬링필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쟁시절 개들이 사람 팔을 물고 돌아다닌 장면을 흔하게 보아서이다.

그리고, 2016년 캄보디아 킬링필드 핵심전범 중 2명이 종신형이 확정되었다.



이번 글은 캄보디아의 '역사'에 대해 다뤄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캄보디아의 종교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를 클릭하여 캄보디아에 대한 다른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캄보디아_1.기본정보(나라이름, 지리, 기후, 인구, 언어, 역사)

캄보디아_3. 종교(구성, 정령신앙, 기독교)

캄보디아_4. 이슈 및 보건영양

캄보디아_5. 정리


아래 내용은 (사)위드에서 각 나라의 기본 정보를 공부하는 

'라마나욧 스터디'를 위해 직접 제작한 자료입니다.

이번 국가는 캄보디아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기본정보를 다루려 합니다.

기본정보 목차는 위와 같습니다.

나라 이름, 지리, 기후, 인구 및 경제, 언어입니다.



나라 이름의 뜻을 보면, 그 나라에 대해 어느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우리나라의 전신이 조선이었던 것처럼, 캄보디아는 ‘크메르 제국’이었다. 이를 다른 말로 읽으면 ‘캄부자’입니다. 이를 다시 프랑스어로 읽으면 '캉보주'(Cambodge)라고 하는데 이를 영어로 읽으면 캄보디아(Cambodia)이다.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속해 있습니다. 인도차이나 반도란,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있는 지역을 말한다.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 그리고 미얀마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또한, 캄보디아의 왼쪽에는 타이만이 위치해 있다. 캄보디아 옆에 있지만 ‘타이(태국)’만 이다.(대한민국의 동해를 Sea of japan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남한 1.4배 되는 크기이며, 산지보다는 평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캄보디아는 열대 몬순 기후입니다. 10월~1월은 30 °C 정도이며, 2월~5월은 32 °C ~ 35 °C에 이른다.

우기와 건기로 나눌 수 있는데, 우기는 5월~10월 이며, 강수량의 75%가 우기에 내립니다. 특히, 7-9월에 비가 많이 내린다.

건기는 10월~4월 사이로 11월~1월 사이는 우리나라 초가을 정도로 매우 시원하다.



GDP는 전세계가 불황이었던 2009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7프로 대를 유지하고 있다. 아무리 전 세계가 불황이었지만, 심하게 GDP가 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캄보디아 경제가 외부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의미이며, 불안정하다는 말이다.



민족 구성은 크메르(90%), 베트남(5%), 화교(1%), 참족(4%) 등 30여 인종이 있습니다. 크메르인 외에 베트남인이 5%가 있는데, 이는 캄보디아 역사(캄보디아 정부수립 과정)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인구는 약 1600만(1,595만 7,223명)명으로 우리나라 1/3정도 됩니다.(2016년 7월 추정치, US CIA World Factbook) 인구 그래프를 보면 특이점이 있는데, 1970년 중반에서 1980년 초반까지 인구가 감소한 것입니다. 눈대중으로 보더라도 800만 가까이에서 600만 근처로 감소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이유도 뒤 역사 부분에서 설명될 것이다.(킬링필드 결과)



언어는 크메르어를 사용한다. 캄보디아 외에도, 베트남이나 태국 등지에 있는 크메르계역 사람들에게 쓰인다.

코트라에 의하면, 비즈니스계를 중심으로 영어가, 지식층을 중심으로 불어가,  젊은 층, 관광지를 중심으로 영어 사용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화교 사회 중심으로는 중국어가 쓰인다고 한다.



이번 글은 캄보디아의 '기본 정보'에 대해 다뤄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캄보디아의 역사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를 클릭하여 캄보디아에 관한 다른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캄보디아_2. 역사(고대에서 현대까지)

캄보디아_3. 종교(구성, 정령신앙, 기독교)

캄보디아_4. 이슈 및 보건영양

캄보디아_5. 정리





몽골 비자 발급


몽골 비자는 주한몽골대사관 비자과에 가서 받아야 한다. 위치는 위와 같다.

신용산역 3번 출구로 나와서 생각없이 걷다 보면

기아자동차가 있는 건물 5층에 사무실이 있다.

사실 몽골 비자를 받으로 오는 것은 5번째 정도 된다.

일반도 받아보고, 급행도 받아보고, 이래저래 여러 형태로 비자를 받아 보았다.


몽골 비자 보통 가격은 15,000원이다.

돈은 농협에서 계좌번호 301-0128-3473-21로 보내고 입금증을 들고 가야 한다.

그런데, 몇번을 오다보니 현금으로 그냥 내는 사람도 보았다.

해외여행 관련한 업무가 항상 그렇듯 케바케 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계좌이체 후 입금증 들고가는 것을 추천한다.


농협은 대사관 건물 바로 옆에 있다.


입금증을 현금대신 들고간다.

만약, 서류에 문제가 있어 다음에 다시 와야 해도 전날 입금한 입금증을 그대로 들고 오면 된다.

그 상황도 겪어봤다....ㅠ


주한몽골대사관 비자과 입구


들어가서 왼쪽에 바로 있는 곳에서 번호표를 뽑아야 한다.

만약에 대기인이 아무도 없다면, 안뽑고 그냥 창구로 가도 된다.


창구는 세개이지만, 갈때마다 하나만 열려있다.

직원분은 몽골분인데 절대 눈도 안마주치고 말도 안건다.

탁탁탁 도장찍고 접수증을 주고 끝이다.


여권과 사진을 부착한 신청서가 있어야 한다.

만약 신청서를 미리 써오지 않았다면, 2번창구 옆에 신청서가 있으니 작성하면 된다.

사진은 흰 배경이기만 하면 된다. 사이즈는 여러개를 다 해봤는데 실패한 적은 없었다.

예전에는 이미지 파일을 워드에 넣어 인쇄해도 비자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무조건 사진을 붙여야 한단다.

접수증은 이렇게 생겼다. 아래에 동그라미 친 날짜에 맞춰서 다시 방문하면 된다.

만약 시간이 없다면, 오천원을 추가로 지불하고 우편수신이 가능하다.


다른 나라 비자에 비해 받기가 수월한 몽골비자이다. 

인도를 가기 전,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힌두교' 였습니다. 

힌두교는 신이 많다. 힌두 사람은 어떻다. 문화는 어떻다드라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인도에 가기 전 많은 이들이 듣는 소리일 듯 합니다.

바라나시에 있는 작은 사당

힌두에 대한 신비감, 두려움, 이질감 등등 알지 못하면서 들었던 막연한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했지만, 힌두를 그저 종교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신이 있는 종교, 그에서 오는 삶의 형태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힌두를 그렇게만 이해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아래에 힌두에 대해 나름 생각한 것을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민족에 대해 생각해 봐야 했습니다. 민족에 대한 생각은 아래 링크를 통해 포스팅을 보면 좋을듯합니다.

http://yungumsulsa.tistory.com/entry/%EB%AF%BC%EC%A1%B1%EC%9D%B4%EB%9E%80-%EB%AC%B4%EC%97%87%EC%9D%B8%EA%B0%80%EB%82%B4%EA%B0%80-%EC%9B%90%ED%95%98%EB%8A%94-%EB%AF%BC%EC%A1%B1%EC%9D%B4%EB%9E%80-%EC%9D%B4%EA%B2%83%EC%9D%B4%EB%8B%A4%EC%97%90%EB%A5%B4%EB%84%A4%EC%8A%A4%ED%8A%B8-%EB%A5%B4%EB%82%AD


개인적 의미로의 힌두, '힌두교'라는 단어는 없다!

힌두는 그 자체로 인도인 이라는 뜻입니다.(물론 2억이라는 무슬림 인구가 있기는 합니다.)

우리나라는 '힌두교'라는 단어를 쓰지만, 사실 힌두교에 대응하는 단어는 인도에 없다고 합니다. 영어로 Hinduism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종교의 한 분류로 힌두교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힌두는 인도 문화를 아울러 부르는 단어이며, 태생적으로 주어지는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힌두에게 포교 혹은 개종?

힌두에게 개종을 하라는 것은 문화를 한번에 바꾸라고 하는 것처럼 정상적 범위를 넘어서는 요구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부모를 바꿀 수 있나요? 동생을 바꿀 수 있나요? 우리가 이미 정해져서 바꾼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 있는 것처럼, 힌두에게 힌두문화 자체가 그렇습니다.(물론, 전 힌두가 아니어서 그 입장 자체를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국가적 의미로의 힌두주의

인도는 공식언어만 14개입니다. 같은 인도 내라도 타 지역으로 가면 다른 문화권입니다. 우리나라는 서울과 부산이 문화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인도는 타 지역으로 갔을 때에 언어나 문화, 복식 등 많은 것들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에 갔을 때에 느끼는 이질감보다 더 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과거 파키스탄과의 분리를 통해 종교적 분쟁에 대한 아픔이 있는 나라가 인도입니다.

국가 정책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 좋은 수단이 바로 힌두입니다. 

현재 수상인 '모디'는 힌두 우선주의 정책을 폅니다. 이는 그가 힌두 극렬분자(?)인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종교적 이유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인도를 하나로 묶기 위한 정책이기도 합니다.

생김새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복식도 다른 이 13억 인도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힌두인 것입니다. 


결론을 내보면 인도=힌두라는 공식을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을까요?

개인차원에서는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가 차원에서는 통합을 위한 정책이 바로 힌두인 것입니다.


추가로 생각해 볼 것!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과연 한국사람들은 한 민족이 맞나요?

조선족이나 해외 동포들은 과연 한 민족일까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외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은 한 민족일까요? 우리나라를 하나로 묶는 정체성은 과연 무얼까요?


하나를 조심스레 푸니 다른 묶음을 발견한 기분입니다.


상해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 방문기!


상해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에 갔다. 

지하철 '난징서로'역에 내리면 바로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큰 매장, 축구장 반만한 사이즈, 미친가격 등등등 여러 소문을 등지고 매장을 방문했다.

위 사진에는 가려 보이지 않지만, 큰 쇼핑몰과 붙어있는 건물이었다.


1층!

1층으로 들어가자마자 수많은 커피용품이 나를 반겼다.

커피를 좋아하고, 사먹는 것보다는 직접 내려먹는 것을 좋아하는 나이기에 눈이 즐거웠다.

단순히 디자인 소품으로 놔둬도 좋을 만큼 예쁜 용품들이 많았고, 커피를 내려먹는 사람으로서 탐나는 용품들도 많았다.

위 드립스테이션을 사실 사고 싶었다. 그런데 가격이... 한화기준으로 약 8만원이 넘었다.


모카포트인데... 가격이 한화로 약 25만원 정도로 기억한다...

기타 등등... 내 입장에서는 보는 것만으로 즐거웠다...ㅋ

기념으로 하나라도 사올 수 있었지만, 필요치 않은데 궂이 사고싶지는 않았다.

전반적으로 가격은 정말 사악했다.

예상한 가격에 곱하기 3을 하면 실제 가격과 비슷했다.


아래 사진들은 커피를 직접 볶아, 그 원두들이 전달되는 관(?) 같은 시스템이다.

마치, 퍼포먼스 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구경하고 직원들은 원두를 볶았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따라 로스터리 시설들이 펼쳐져 있다.


2층!

1층은 커피였고, 2층으로 올라오면 차(tea)에 관련된 용품과 차를 판매했다.



총평!


커피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시간을 내어 방문할만 하다.

많은 용품들이 있었지만, 너무 비쌌다. 그 용품들이 스타벅스 오리지널도 있었지만, 대부분 다른 업체와 기획하여 만든 용품이 많았다.

실제로, 드립 내릴 때에는 케맥스를 쓰더라.(한국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도 케맥스를 쓴다.)

앉아서 커피나 빵을 먹고 마실 자리는 잘 없다.


커피를 좋아한다면, 꼭 방문해서 둘러보는 것도 좋다.

마치 커피 페스티벌이 열린 것처럼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용품을 구경한다.

바리스타들은 즐거운 얼굴로 커피를 내리고, 시음하고 싶은 원두로 커피를 직접 내려준다.


외국인들(중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이 구경온다.

스타벅스 외에 주변에 다른 볼거리들도 있으니 겸사겸사 가면 좋을 듯 하다:)


그래도... 위에 드립스테이션은 살걸 그랬나... 하는 물욕이 든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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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_상해임시정부 방문  (4) 2018.03.05

​상해 임시정부에 갔다.

상해 지하철 6호선 신천지역 6번출구로 나가면 된다.

역에서 나오면, 높은 빌딩이 보인다. 임시정부가 '있었던' 지역이 맞는가보다.

6번출구로 나와 바로 왼쪽으로 조금만 길을 따라 믿음을 갖고 가다 보면 왼쪽에 임시정부가 있다.

조금 가서 안나오길래 괜히 주변을 돌았다가 찾았다.

내부는 촬영이 불가하다.

허락을 맡거나 몰래 찍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그러지는 않았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실제 임시정부 모습과 전시관이다.

첫째, 임시정부는 삼층으로 되어있다.

일층은 회의실, 화장실, 부엌

이층은 김구 집무실과 다른 이들의 집무실

삼층은 요인숙소가 있었다. 침대 3개, 탁자, 옷장이 전부였다.


둘째, 전시관은 당시 독립운동가들과 상황을 간소히 설명해 놓았다.


개인적으로 감동이 있었다.

'상해임시정부'라고 하면 뭔가 웅장할거같고, 엄청난 일들이 있었던 곳이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허나, 그저 삶의 장소였다. 밥을 해먹고, 회의를 하고, 차를 마시는 곳. 잠을 잘 수 있는 곳.

묵묵히 삶을 이어갔고, 그 삶의 목적이 독립에 있었다.

그 삶의 흔적들을 보니 숨겨진 장면들이 연상이 되었다.


상해에 간다면, 역사의 한 장면을 보고 오는 것을 추천한다.

김구를 안다면, 대한민국을 안다면, 지금이 궁금하다면.

네팔의 NGO인 UMN을 방문하였다.
UMN은 크리스찬이 모여 활동하는 NGO로 다양한 국가 출신이 와서 활동하고 있다.
보통 저개발국가에는 많은 NGO가 다양한 활동을 한다. 하지만, 연대가 없으면 효율적으로 중복되지 않는 활동을 하기는 어렵다. UMN은 중복되지 않고, 서로 시너지가 나도록 사람과 단체, 일의
성격을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로컬NGO와 시업을 하고, 이양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 세계적 단체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해당지역이 가진 이슈와 솔루션을 따라갈 수는 없다. UMN은 능력있는 로컬 NGO와 함께 사업을 하고, 지속가능하도록 그 사업을 이양한다.

사실 위에 언급된 것들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NGO가 하는 일이지만, 지키면서 하기는 어렵다. UMN은 교과서처럼 위 과정을 따르고 있었다.

물론, 내부에 들어가서 큰 눈으로 보면 또 다를지
모르지만, 좋은 단체의
모형을 보았다.


네팔에 입국했다.
리서치를 위해 인도로 향하는 루트이다.

1. 비자발급
- 미리 양식을 검색해. 프린트해서 사진을 붙여 제출하는 방법
- 도착하면 있는 기계에 간단한 정보 입력하고, 사진도 즉석에서 찍으면 종이가 나와서 그것을 그냥 내면. 되는 방법
- 아래 방법을 택하니 편하고 좋았다.

2. 비자 수수료
15일 짜리 비자는 가격이 $25이다. 돈은 다른 창구에 미리 수납하여 영수증을 과 위에 설명된 종이를 함께. 내면 비자를 준다.
그런데, 수납하는 곳에서 계속 한국돈 3만원을 내라고 강요를 했다. 아무래도 $25보다 3만원이 더 환율적으로. 이익이 있나보다. 직원들에게 인센티브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이렇게 무사히 네팔에 입국하였다.
네의 보호를 받는 나라.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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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지도나 문서를 찾아보면, 미얀마는 버마라고도 불리며 두 이름이 같이 쓰인다. 버마는 브라만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했다. 이 글에서는 편의를 위해 이하 미얀마로 통칭하겠다.
대한민국은 1991년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가 내린 결정에 따라 미얀마라고 부르고 있다. 외국에서는 미얀마 보다는 버마라는 이름을 주로 쓴다. Myanmar known as burmese 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왜 한 나라에 다른 두 이름이 공존하는 것일까. 먼저 미얀마의 역사를 봐야 한다.




대한민국 이전에 조선왕조가 있었던 것처럼, 버마 왕조가 있었다. 버마 왕조의 역사는 영국에 의해 1885년 끝이나고, 1886년에 영국령 인도에 속한 한 주로 존재했다. 1937년에는 버마가 인도로부터 분리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1942년 아웅산과 일본군이 미얀마에 들어와 일본 식민지가 시작된다. 아웅산은 미얀마의 독립운동 혁명가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현 미얀마를 이끄는 아웅산 수찌가 아웅산의 딸이다. 아웅산은 미얀마 독립을 목적으로 일본군과 함께 미얀마에 들어왔으나, 영국보다 잔인한 일본군의 통치를 보고 생각을 바꾼다. 1945년, 일본군이 패망하고 아웅산은 영국 정부와 담판을 지어 독립을 이끌어냈다. 아웅산은 미얀마에서 ‘민족의 영웅’, ‘국부’로 불린다.


독립 후, 버마연방이 설립되었다. 민주적 정치가 행해졌으나, 1962년 네윈 장군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군부독재가 시작되었다. 이후 군부를 향한 계속된 민중 저항이 있었다.
2010년에는 길었던 군부독재가 끝나고, 민주적 투표가 이뤄졌다. 이 투표에서 승리한 당은 바로 군사정권의 지원을 받는 당이었다. 형식적 민주화는 되었으나 군사정권만 연장된 꼴이었다. 이후 2015년에 개최된 총선에서 야당인 국민민주연맹이 상하원·지역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며 정권교체를 확정했다. 국민민주연맹을 이끄는 당수가 바로 아웅산 수찌이다. 이렇게 2015년에야 군사정권에서 벗어나 실질적 민주화를 이루었다.



미얀마 이름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버마와 미얀마, 이 둘로 국호가 병용되고 있었다. 앞에 언어에서 구어와 문어가 다르다고 했는데, 구어로는 버마, 문어로는 미얀마였다.
1989년, 군부에서 미얀마의 공식 명칭을 미얀마로 변경했다. 버마라는 이름이 영국 식민지시대의 잔재라는 이유와 주류 민족인 버마족 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포괄하겠다는 의미에서였다. 현재 두 개 이름이 혼용되는 것은 이에 대한 반발이다. 군부를 향한 저항은 국민 정서를 대변한다. 국민들은 군부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외국 언론사 및 시민단체, 정부 등도 마찬가지였다. 미얀마는 정통성도 정당성도 없는 군부가 지은 이름이다. 군부를 인정치 않는 사람들은 미얀마 대신 버마라는 단어를 쓴다. 외국에서는 ‘버마라고 알려진 미얀마’라는 표현을 쓴다. 한국 일부 언론사도 미얀마 군부를 인정치 않는다는 의미로 버마라는 표현을 쓴다. 물론, 공식 명칭은 미얀마이다.
이렇게, 미얀마는 민주화 역사가 짧다. 군부 잔재도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위 정보들은 서적과 인터넷 검색, 저자의 기본상식을 토대로 쓰여졌습니다.

한 나라에 대해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텐데, 크게는 직접 살아보는 방법과 자료 및 문헌조사로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조사도 하고 살아도 보면 좋겠지만, 외부에서 검색할 수 있는 자료는 이정도구나 하는 수준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도차이나 반도는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한 반도이다.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얀마는 인도차이나반도에 속해있으며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 라오스, 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공식 수도는 네피도이다. 2006년까지는 양곤이었으나 바뀌었다. 현재까지도 양곤은 경제수도라고 불리고, 많은 지도에서 아직도 양곤을 수도라 표기하고 있다.


기후는 전반적으로 고온다습한 열대 몬순 기후이다. 계절은 건기, 우기, 겨울로 나눠진다. 건기중 가장 시원한 계절인 11월-2월 기간중 평균최저 기온은 17℃이나, 3월에서 5월 기간중 평균 최고기온은 40℃가 넘는다.


인구는 약 5350만명이다.(2017년 10월 8일 12:41시 기준 53,501,874명) 평균나이는 27.9세로 젊은 편이며 약 40%가 도시에 살고있다.


공용어는 버마어(미얀마어)이며, 구어체와 문어체가 다른 형태로 쓰이는 특징이 있다.



※위 정보들은 서적과 인터넷 검색, 저자의 기본상식을 토대로 쓰여졌습니다.

한 나라에 대해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텐데, 크게는 직접 살아보는 방법과 자료 및 문헌조사로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조사도 하고 살아도 보면 좋겠지만, 외부에서 검색할 수 있는 자료는 이정도구나 하는 수준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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