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들어, 언젠가부터 몸이 좀 안좋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서 잠시 자다가 스멀스멀 일어나니 아내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놓아 잠시 몸을 담갔다. 몸이 따뜻해지니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목욕탕 같이 울림이 있는 공간에서 목소리를 내다 보면, 공간과 소리가 공명되는 지점이 있다. 어떤 지점일지 읽는이가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목욕탕에서 이런 저런 소리를 내 보는데, 맘에 드는 소리를 찾은 순간이다. 첫 소리부터 그 지점과 만나기는 어렵다. 이렇게도 내보고 저렇게도 내보고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가 구애받지 않고 목소리를 찾다보면 어느새 그 지점에 가 있다. 그럼에도, 비교적 쉽게 그 지점으로 다다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내가 나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혼자는 그렇다 치자. 만약, 누군가가 함께 이 울림이 있는 공간 안에 있다면 어떨까. 각자의 지점을 찾고, 다시 또 함께 할 지점을 따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소리내는 것이 좋아서 흥얼거리다가 문득, 내 목소리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목소리를 조금 더 키워내야 하지만,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옳은 소리일지, 맞는 소리일지, 아름다운 소리일지 자신이 없다. 이래저래 소리를 내보면 곧 찾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주변 큰 목소리에 묻혀 엄두도 내지 못한다. 내 목소리는 점점 묻혀지고, 잊혀진다.


나는 고삼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놀랍거나 심각한 고백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발생하는 일이 조금 일찍 발생한 것이니. 물론,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남들이 다 갖고 있는 수많은 아픔 중 하나이지만, 짐작하기 어려운 형태의 아픔이 있었다. 이 때도, 나는 내 목소리를 내고 싶었나보다. 누군가에게 솔직해질 때가 있었다. 그러면, 자연스레 나의 아픔을 이야기하게 되는데 반응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들어주는 사람, 듣지 않는 사람이다. 들어주는 사람은 말 그대로이다. 솔루션을 내지는 않는다. 고개를 끄덕이고, 빈잔을 채워준다. 공감에 공명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나는 그 순간만큼은 그 사람의 공간 안에서 평온하다. 듣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은 내 말을 끊고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 정도의 아픔은 뭔지 안다며, 듣지 않아도 뻔하다며, 자신이 아는 범주 안에 나를 우겨넣는다. 그리곤, 나의 약함에 대해 말한다. 아직 어리다. 연약하다. 강해져야 한다. 쓸데없는 감정이다. 나는 입을 닫는다.

나중에 알고보면, 듣지 않는 사람들은 놀라운 공통점이 있었다. 대부분이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아픔을 겪거나, 남을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산 사람들이 많았다. 항상 자신의 목소리를 내 왔기에, 내 목소리만 들렸기에, 그것이 옳은 목소리라고 생각하기에 다른 소리를 듣고싶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다시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크고 좋은 소리를 가졌다. 하지만, 그 사람과 함께 노래하고 싶지는 않다. 그 공간에는 들어가기도 싫다. 나도, 때로는 듣는 것을 넘어 함께 노래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저 좋은 소리를 가진 사람보다는, 내 목소리에 공명해주며 함께 소리를 내주는 사람이 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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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신문을 보는데 오타를 발견했다. ‘Beauty and the dogs’라는 영화에 대해 소개하고 감독을 인터뷰 한 글이었다.
그런데, 글중 기자분의 실수로 Dogs 대신 beast를 써서 미녀와 개들이 아닌 야수가 되어 버렸다.
오타를 꼬집거나 나쁜 의도가 있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업무적으로는 실수일 수 있지만, 그럴 수 있다.

누군가가 이해되는 실수를 하면, 반감보다는 오히려 공감이 간다. 나도 그럴 수 있으니까,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미녀와 야수를 재밌게 보았을 수도 있겠지. 감독이 의도한 바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dog 대신 beast를 썼겠지. 이런 가정이나 조건 없이 단순한 실수였다 하더라도 공감이 된다. 오히려 미소가 난다. 백치미 혹은 약간 모자란 것이 사람의 매력이 되는 것처럼.

이 실수가 즐거운 이유는 반가운 이유는 공감이 더 가는 이유는. 어쩌면 내가 이해받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죄를 지은 것은 아닌데. 변명하기가 더 부끄럽도록 다름을 틀림으로 인정할 수는 없는 나인데 말이다.

같은 날짜, 같은 신문에 실린 글 한토막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특정 현상을 두고 의견을 갖기 쉽다. 그걸 답이라고 믿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쉽다. 그럴수록 자기 확신도 강해진다. 그런다고 그게 답이냐는 또 다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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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함께 느낀다는 뜻이다. 이 단어가 바르게 쓰이면 서로를 이해하고 벽을 허무는 데에 요긴하다.
잘못쓰인다면 너를 소외시키는 우리를 따로 만들어버릴 뿐이다.

우리와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본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공동체의 결정이야’ 라는 말을 들으면 의문이 든다. 나 빼고 우리 혹은 공동체인가. 마치, 나도 공동체인듯 하면서, 당신네들과 다른 생각을 가졌으면 공동체가 아니라는 묘한 어감, 사실은 압박이 든다.

아프리카 대륙의 한 나라인 마다가스카르는 말라가시어를 사용한다. 말라가시어에는 ‘우리’라는 단어가 두 개이다. Isika(이시꺄)와 izahai(이자하이) 이 둘이다.
차이는 ‘우리’를 나타내는 범주에 있다. ‘우리’에 청자가 포함된다면 isika, 포함되지 않는다면 izahai이다.
예를 들어보면, ‘우리는 하나다.’ 할때는 isika이다. 반면에, ‘우리 생각은 다르다.’하고 상대방과 구분지을 때는 izahai를 사용한다.

한국말에서의 ‘우리’는 아마도 isika에 가까울 것 같다. 물론 구분짓는 순간 izahai가 되어 버린다.

미투와 위드유가 유행처럼 번졌다. 분명, 사회에 공감을 만들어냈다. 더 나아가(후퇴일수도)아이콘이 되고, 트렌드가 되고, 상품이 되어간다.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생겼다. 이슈의 중심에 있지만 철저한 소외이다. 잘못을 했든 안했든 소외는 맞다.

유명 배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아야 한다. 용서를 구하고 사죄도 해야한다. 우리(Isika)일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죄인으로 의심받는 이일지라도, 죄인이라도, 심한 말로 나쁜 놈이라도, 그들도 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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