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손가락과 손목 마디가 아파온다. 허리까지 슬며시 내려오기 시작한 이 아픔은 모호한 경계선에 걸쳐있다. 강도가 낮은 지속적 아픔. 나는 알지만 남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아픔의 종류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병원에 갈만큼 아프지 않은 통증이다. 이런 아픔은 말하기도 티내기도 어렵다. 병원이 분과별로, 사람 신체부위별로 나눠져 있는 것은 좋지만 그 사이에 숨어있는 아픔은 어찌된 영문인지 더 보이질 않는다. 끔찍한 말이지만, 손가락이 하나 잘려나가거나 피 정도는 나야지 조금 생색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아픔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아픔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아픔이라 인식하니까. 이럴때면, 부끄럽지만 짜증이 난다.

아픔의 원인을 생각해 본다. 짐작가는 바가 있다. 하지만, 아픔이 명확하지 않으니 그 원인도 흐리다. 그래도 생각이라는 것을 해본다면, 특정한 일을 해서일 것이다. 평소 자세나 생활습관이 좋지 않아 아플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가 그려지지만, 극단적으로 분류해보면 원인은 바로, 남 잘못과 내 잘못이다,

언젠가 이런 아픔에 대해 타인에 나누었을 때에, 사람들은 ‘내 잘못’에 꽂힌다. ‘내 잘못’이란 두 가지 의미이다. 듣는 자와 말하는 자 각자의 입장에서 ‘내 잘못’이다. 타인의 아픔,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더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면,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인정함’이다. 어떠한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해석을 인정함으로, 본인의 말과 삶이 보여주는 메시지가 일치하지 않았음을 다시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다. ‘인정’이 있은 후에서라야 대화가 가능하다. 대화가 시작됨으로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틀어진 것을 바른 쪽으로 옮기는 시도가 시작된다.
단계와 절차가 순적하다면 좋으련만, 문제는 인정하지 않음에서 발생한다. 차라리 책임지고 싶지 않다고 하면 되는데, 그 말만 빼고 모든 지식과 사상이 총동원되기 시작한다. 그 순간, 말이 길어지기 시작하고 대화는 이상해진다. 모순이 발생하고, 인과관계가 틀어진다. 부분은 인정하고 나머지는 불인정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만 이야기한다. 결국, 말만 난무하고 시작되지도 못한 대화는 단절되고 남은 것은 이름조차 없는 통증 뿐이다. 남은 것이 하나 더 있다. ‘네 잘못’.

그런데, 이런 통증은 몸뿐 아니라 마음에서도 나타난다. 이 통증은 이름이 없는 것을 넘어 보이지도 않는다.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마음은 아무리 쑤시고, 두드려 패도 피가 나지 않는다. 때린 자는 말한다. 문제는, 당신 마음에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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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좋아하지 않는 유형이 있다.

과거의 경험과 경력만을 앞세워 말하는 사람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누군가를 보면, 대략 알 수 있는 성향과 능력들이 있다.
매우 추상적으로 생각했을 때, 현재는 과거의 결과인데 대화하다보면 과거가 궁금해지는 사람이 있고, 과거가 별로 궁금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매력적이거나 존경할만 하거나 호감이 가는 사람이 전자이다. 그 사람이 가진 객관적 모습과 내가 가진 감이 더해져 나오는 판단이다. 여기서의 ‘판단’은 정죄와는 다르다.

대화중 불쑥, 자신의 경험 그리고 경력을 꺼내어 놓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과거를 나의 현재와 비교하며, 그 둘이 같이 않음을 틀림으로 결론지으며 대화를 이끌어나간다. 스스로는 옳다는 전제이다.

대중을 상대로 한 강의라면 적절할 수 있다. 메시지는 흩어지고, 청중들에게 해석의 자유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허나, 사람대 사람으로 이뤄지는 대화에서는 매우 폭력적인 행위이다. 한국 정서에서 선생과 제자, 선배와 후배 같이, 서로가 그런 상하관계임(나는 앞 예시가 상하관계라고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이해하고 인정한다.)을 인정하고 듣는 설교라면 기분은 나쁠지언정 수용이 된다.

자리의 목적과 설정이 공유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은 자리에서 암묵적으로 상하관계를 설정하고 말하는 경우,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경력과 경험이다. 그저 숨쉬면 붙고 불어 따라오는 양적 경험 말이다.

과거 없이 현재와 미래만 말하는 사람은 사기꾼일 수 있다. 현재와 미래는 납득이 가야한다. 그를 설명하는 근거는 견고히 쌓인 과거이며 어떻게 증거할지는 개인 능력에 달렸다. 물론, 진실된 이야기는 그 자체 만으로도 힘이 있다.

내가 주절거린 모든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닌 예의의 문제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써 내려왔다. 배운다는 것은 타인의 문화, 곧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배우지 않고 가르치기만 하려는 사람의 세계는 얼마나 좁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라는 상투적인 말로 끝나야 맞겠지만, 실상은 눈에 훤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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