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테레즈 라캥


동기

에밀 졸라의 소설, 동명의 영화작품을 기억한다. '테레즈 라캥' 프랑스에 대해 묘한 호감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저게 무슨 뜻일까... 궁금하기도 했다.(사람 이름이었다.) 결국, 고전이어서 선택했다.



내용

1860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펼쳐진 이야기이다. 어린시절 아버지에 의해 고모에게 맞겨진 테레즈, 테레즈의 사촌이자 그녀와 결혼하게 되는 병약한 카미유, 결혼 후 만나게 되는 새로운 남자 로랑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숨은 주인공을 한명 더 이야기하자면 카미유의 엄마인 라캥 부인이다.

사랑에 빠진 테레즈와 로랑은 계획을 꾸며 카미유를 죽인다. 그리고는 죄책감이 불러운 카미유의 유령에 괴로워하다 종국에는 함께 자살을 택한다.


테레즈의 변화

테레즈는 바라는 것도 없는, 무엇을 바라야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여자였다. 모든 일에 수동적으로, 심지어는 결혼조차도 의지없이, 사랑하지도 않는 사촌과 하게 된다. 그런 테레즈가 로랑을 만나 변화를 보인다. 말을 하기 시작하고, 의지를 내비치고, 욕망을 보였다.


숨은 주인공 라캥 부인

마지막에, 라캥 부인은 중풍(?)에 걸린다. 말도, 표현도 못하고 눈뜨고 볼수밖에 없는 몸 상태이다. 그 상태에서 함께 살고 있던 테레즈가 자신의 아들인 카미유를 죽이고, 함께 가담한 로랑과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찌나 충격이었을까. 그 사실을 알리려 모든 노력을 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 테레즈와 로랑의 파국을 보는 것이 삶의 유일한 소망이 되어 결국, 그 소망에 다다른다.

마지막 한 페이지

책의 마지막 한 페이지에서 그 둘은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한다. 그리고 라캥 부인은 그것을 보고 있다. 원래는 서로를 죽이려 했다. 한명은 칼을, 한명은 독약으로 말이다. 그런데, 서로의 무기를 확인한 순간 그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독약을 나눠마셔 함께 죽는다.

아이러니하다. 이 둘은 사랑했다. 첫눈에 반했고, 뜨거웠다. 결혼 후에는 죄책감에 서로를 미워하고 괴롭힌다. 살인을 통해서 이뤄진, 비극을 배태한 결혼이었다. 결국, 그 둘은 마지막 페이지에서야 죽음을 앞두고서야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지체없이 실행한다.



결론

각자의 욕망만을 보고 나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라캥 부인은 자신의 아들만을 위해서 테레즈를 희생시켰다.

카미유는 그런 부인 아래에서 그저 당연히 받으며 자랐고, 그렇게 살고자 했다.

테레즈는 나중에서야 찾은 성적 욕망을 따랐다.

로랑은, 친구의 여자 그리고 재산을 탐했다.

다들, 가엾다. 조금이라도 주변을 돌아봤으면 어땠을까. 나의 결정과 선택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어떠한 영향을 받을지 조금만 고려했다면 어땠을까. 허나, 이런 생각은 싸구려 감상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말이 없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는 가정은 힘이 없다. 이런 세상이다. 이를 인정한 상황에서 나아갈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각자의 저지른 상황을 인정한 다음 걸음은 무엇이었을까. 어디서부터 풀어나갈 수 있었을까. 알 수는 없다.

제목 : 도망치고 싶을 때 읽는 책, 이시하라 가즈코

다시 써본 부제 :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인정하라!

동기

책은 제목으로만 골랐다. 요즘 유행하는 퇴사 시리즈라든가, 괜찮아 시리즈들이 있다. 광고나 기타 매체에서 이 책은 몇번 스쳐가듯 본적이 있다. 작가도 후기도 읽지 않았지만, 제목만으로도 한번 읽어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사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절망이야 다 끝이야 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적어도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고 인지하는 단계이다. 그래서 이 책을 잡게 되었다. 그럴 떄 읽는 책이라고 제목에 써있으니 말이다.

마포중앙도서관에는 누가 대출해갔길래, 상호대차라는 놀라운 시스템을 이용해 책을 빌려보았다.

내용

내용을 한줄로 요약해보라고 한다면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라' 라고 쓰고 싶다.

보통의 우리는 타인중심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남의 눈치를 보고, 나의 감정보다는 남의 의견을 더 우위에 두었다. 물론, 머리로는 내 감정을 소중히 해야함을 알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자존심도 있고, 두려움도 있어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회피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고민을 듣거나 상담 비스무리한것을 하면(내 주제에), 본질에서 벗어난 이야기로 뱅뱅 도는 경우가 많다.

당장 생각나는 예는 연애문제이다. 우리 집 상황이 안좋다. 상대방 집 상황도 안좋다. 그런데 내 상황은 이렇고, 상대방은 이런거 같다. 상대방의 말을 논리적으로 끼워맞추어 결론을 도출해 보면 결국 가장 합리적인 답은 이별이라는 답에 도달한다. 그런데, 헤어지고 싶냐라고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니란다. 계속 또 상황과 주변머리만을 이야기한다. 모두가 한 경우는 아니겠지만,

"'헤어지고 싶어'가 솔직한 내 마음이야. 그런데, 내가 그런 생각과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진 않아. 왜냐면, 주변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 그리고 난 그렇게 나쁜놈이 아니야."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게 들리지 않는다.

'나는 도망치고 싶다.' 이 마음은 결론이면서 시작이다. '도망치고 싶어'라고 솔직히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 이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과연 소수일까. 많은 이들이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을 품지만, 본인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이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계속해서 풀리지 않고 쌓이고 꼬여갈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도망치고 싶다'라는 마음을 가진 것 자체가 실패나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그 마음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나는 그런 상태가 아니야!라고 말한다면 ok다. 허나, 혹시나 그렇다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외면한다면 현재의 상황은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있음을 인지하고 내가 그런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시작인 것이다. 그 해결법은 꼭 도망이나 포기가 아닐 수 있다.

결론

내 경우에는 책을 잡기 전 '도망치고 싶다'라는 마음을 사실 인지하고 인정했다. 어느 순간 알게되었다. 아닐거라고 아닐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맞았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것이 조금은 부끄럽지만, 조금의 용기를 내어 이 책을 집었다. 책을 빌릴 때, 이런 제목의 책을 빌려줄 때 사서가 나를 보며 한심한 듯 생각을 하진 않을까 조금 염려한 것은 안 비밀이다.

책에서는 여러 기술을 이야기해주기도 한다. 거절하는 법이라든가, 이런 기분이 들 때 어쩌해야한다든가 말이다. 여러 말을 하지만 핵심은 '인정하라, 그러면 시작될 것이다.'이다.

책은 술술 읽힌다. 심지어 종이도 두꺼워서 두께도 금방 줄어든다.

엄청난 교훈이나 처세술이 담겨있지는 않다. 우리가 기대하며 펴든 모든 자기계발서가 그러하듯 말이다. 혹시나 '도망치고 싶다.'라는 마음이 듦을 스스로가 인정했다면, 가볍게 읽어볼만한 책이다. ''당신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과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을 알고 인정하고 이 책을 손에 잡은 당신은 제법 용기가 있는 사람이에요." 라고 책의 저자가 말을 건넬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다시 써본 부제

"책은 거들뿐 : 내 생각을 깨는 커스텀 도끼 제작 경험담"




독서편력

읽고싶은 책은 항상 있다. 허나, 읽고싶은 책이라고 해서 항상 술술 읽히는 것은 아니다. 이럴 때 읽는 두 가지 종류의 책이 있다. 고전이거나, 유명인이 쓴 책이거나.



제목 및 저자

이번에 읽은 책은 박웅현씨가 쓴, '다시, 책은 도끼다'이다.

'책은 도끼다'에 이은 후속작이다. 전작은 사실 읽어보지 않았다.

먼저 읽어도 좋겠지만, 시간순으로 읽어야 하는 책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최근에 나온 이 책을 먼저 잡았다.


읽은 동기

TBWA라든지, 박웅현씨라든지, 혹은 그가 만든 여러 카피들은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익히 들은바 있었다.

어떤 책을 읽는 사람일까 궁금했다. 그 책을 어떻게 읽고 있을까 궁금했다.


내용소개

책과 강독법을 소개하는 여덟번의 강의를 책으로 엮었다.

철학, 문학, 예술 등 한 주제 안에 몇가지 책을 선정한다.
그리고는 그 안에 있는 텍스트(저자가 밑줄 친)들을 소개하고 그를 중심으로 책과 자신의 생각을 적어(말해)나간다.
즉, 나는 이런저런 책을 읽었고 이 부분이 좋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나에게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설명해 나간다.

다시, 즉! 자신의 독법을 소개한다.


느낀점

나만의 것, 독특한 것, 개성 등등. 세상에 유일하고, 나에게만 허락되며, 다른 것들과 구분되는 것들을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이 소비자의 욕구 아닐까 싶다. 동시에, 안정되고 손해보지 않는 길을 걷고싶은 마음도 있지 않을까. 박웅현씨의 책을 읽는 사람들의 심정은 그와 같지 않을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면, 그 사람이 읽은 책을 읽으면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으면서 그의 독특한 시선을 공유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환상 말이다.

글을 쓰며 조금 더 명확히 알았지만, 나도 사실 그런 기대로 책을 집은 것 같다. 그런데, 저자는 '그러지 마!'라고 한다.

"빨리 많이 읽는다고 좋은거 아니야, 천천히 하나를 제대로 읽어. 나도 자랑하고 싶어 책을 읽기도 해. 그런데, 나중에 다시 읽었을 때 결국 깨달음이 오더라. 이건 그냥 내가 그랬다는 거고 너까지 그래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여러 책들을 소개하고 자신의 독특한 시선을 말하는 강연을 기대하고 책을 집었건만, 저자는 '야, 그거 아니야:)' 이런다.


다시, 부제 : "책은 거들뿐 : 내 생각을 깨는 커스텀 도끼 제작 경험담"

예쁜 신발, 좋은 옷 등등. 아무리 좋은 기성품이 있어도, 나에게 맞지 않고 어울리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우리의 삶과 생각도 마찬가지다. 각자가 처한 상황과 과거로 인해 지금의 나가 결정되었다. 내가 선택한 부분도 있을 것이며, 그에 따라 가진 생각이 다르고, 지켜야 할 것과 파괴해야 할 것들이 다르다.

도끼를 생각해 보자. 검색도 하지 않고 내 맘대로 막 지어보면... 대인용 도끼, 벌목용 도끼, 조각용 도끼 등 도끼만 해도 그 종류가 수가지일 듯 하다. 같은 벌목용 도끼라 하더라도 사람의 체형과 체구, 손 모양에 따라 디자인과 무게 등의 구성요소가 달라야 할 것이다.

세상은 '좋은 기성품을 사면 되' 라고 말한다. 흐름에 휩쓸려 너도 나도 기성품을 사지만 그 행동에 허무함이 깃드는 이유는 그것이 과연 '나에게 맞는 것'이냐의 문제이다.

독서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는 나를 아는 것이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생각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뿌리에서 시작하여 줄기와 잎사귀를 자라게 하는 양분은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나를 깨는 것이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껍데기를 까부숴야 하는 것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한 구절처럼 말이다.

작가는 여러 책을 통해, 자신의 도끼를 보인다. 그러면서, '이 도끼랑 똑같은 것을 만드세요. 이것만이 가치있어요.' 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도끼를 만든 경험담을 너무나도 즐겁게 이야기할 뿐이다.


기본적인 이야기. 기본중 가장 기본. 허나, 성급하게도 잘 지키지 못하는 기본을 작가는 결국 이야기한다.

흙의 세례 - 이익상 저


100인의 배우, 우리 문학을 읽다. 그중 '흙의 세례'를 들었다.

이 소설은 엄효섭 배우님이 읽으셨다. 사실, 이름만 들어서는 누군지 알기가 힘들어서 검색을 해보았다. 얼굴을 보니, 드라마에 자주 나오시는 분이었다. 얼굴을 보니, 이 분과 마주앉아 읽어주는 느낌이 든다.

1925년 문예지 개벽에 발표된 단편소설이며, 낙향한 지식인 부부의 이야기이다. 지식인의 자기모순과 한계를 나타냈고, 귀농후 아무일도 하지 않는 남편 명호와 열심히 해보려는 아내 혜정의 작은 갈등 이야기를 그린다.

위 간단한 설명은 오디오북에서 엄효섭 배우님이 읽어주신 것을 참고했다.

듣던중 집중하게 되는 인상적인 부분들이 있었다. 주로 남편 명호의 생각을 독백처럼 읽어주는 부분이었다.

1

명호는 항상 자기가 자신의 행동을 조종할 만한 의지의 힘이 박약하여 필경은 아무 긴장한 맛이 없는 생활조차 마음대로 얻을 수 없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의지가 박약한 것만이 원인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일과 또는 귀와 눈에 활동이 있는 이상에는 반드시 아니 보이고, 아니 들리면 아니 될 여러 가지 사상이 도리어 자기라는 육(肉)과 영(靈)의 화합이 아니오, 혼합인 덩어리를 절망의 구렁으로 떠미는 것이 생에 대한 권태를 일으키고, 이 권태가 다시 얼마 남아있지 못한 기력을 소모함인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다른 소위 승리자와 같이 무엇이든지 이기고 나아가지 못하는 이 섬약한 의욕에는 증오를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이러한 증오를 느끼게 됨도 그가 어떠한 동기로든지 무슨 충동을 받을 때의 일이오, 평상시에는 염두에 올리지도 않은 것처럼 태연해 보였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흐리멍덩한 것은 결코 그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떠한 때에 냉정히 자신을 비판할 때에는 자신에 반드시 두 가지의 다른 형식으로 표현된 이중성격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결국은 자기 자신의 불순을 느끼는 동시에, 다른 모든 것이 불순하여 보였다.

따라서 모든 것을 부정하는 처지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그에게는 제왕도 없었다. 모든 권력도 없었다. 이상도 없었다. 있다 하면 그것은 자기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생활의 힘이었다. 날카로운 비수를 가슴에 댄다 하여도 그의 전 인격이 그것을 두려워함이 아니요, 다만 생활하겠다는 본능이 그것의 위혁(威嚇)에 전율할 뿐이었다. 이렇게 대담하면서도 어떠한 때에 곁에서 보는 사람이 웃을 만큼 쉽게 그는 희로의 감정을 나타내었다. 또는 자기와 친한 친구나 친척이 죽었다는 말을 들을 때에 오히려 눈썹 하나를 까딱하지 않고 “사람이란 죽는 것이니 할 수 없지. 언제든지 반드시 죽을 터이니까…… 그가 사람인 이상에는…….”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저 사람에게는 뜨거운 피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의심할 만큼 냉혹해 보였다. 그러한 대신에 어떠한 때이면, 소설 같은 것을 보다가도 눈물을 흘리게 되어 보드라운 감정을 가진 것도 보였다.


나는 무엇일까? 지금, 이순간까지 나를 형성해오고 나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철학이, 누군가는 종교가, 누군가는 함께한 사람에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모든 것에 영향을 받았다.
그런 앎과 깨달음이 지금 내 삶의 모습과 나아가는 방향에 일치된다면 어찌나 좋을까. 명호는 지금 그게 안되나보다. 

"여러 가지 사상이 도리어 자기라는 육(肉)과 영(靈)의 화합이 아니오, 혼합인 덩어리를 절망의 구렁으로 떠미는 것이 생에 대한 권태를 일으키고, 이 권태가 다시 얼마 남아있지 못한 기력을 소모함인 것"

하..! 하고 감탄한 부분은 '화합이 아니오, 혼합인 덩어리'라는 것이다. 부품들의 합과 완성품은 다르다.
모인 부품들을 보는 것만으로는 완성품이 될지 알기 어렵다. 복잡한 물건일수록 그러한데, 한 사람의 생각과 마음은 어떠할까.
화합되지 않은 사상들은, 기대와는 달리 그저 혼합된 덩어리와 같다.
자동으로 어떠한 형체를 갖춰주면 좋으련만, 덩어리에 불과하다. 노력이 부족한 탓일까.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을 보니 그러한 것이다. 현실은 이상에서 참 멀다.


2

그러면요 "지금 하는 일은 장래에 생활을 얻으려고 미리부터 준비하여 두는 노동의 연습이라 하면 어떠할까요. 그러면 우리의 지금 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일평생 사업으로 여기고 노력하는 사업의 신성을 더럽히는 일이 없게 되겠지요. 그리고 자기가 생활에 대한 어떠한 기능을 얻게 되는 셈이겠지요.”

명호의 말이 끝나매 혜정은 빙그레 웃으며,

“그러면 다른 사람들의 신성한 직업을 유희로 아는 것과 같은 모독은 없겠지요. 우리의 태도를 변호하는 말만이 물론 아니겠지요.”하였다.

명호도 따라 웃었다.

명호는 농촌으로 돌아오던 날부터 마음속에 여러 가지 갈등과 모순을 느끼었다. 이것은 자기의 일한 보수가 넉넉히 생활을 지탱치 못하고, 다만 부모의 약간 유산으로 그날을 지낸다 하면, 도리어 다른 사람의 생존을 위하여 일하는 직업의 신성한 것을 모독함이 아닌가 생각함이었다. 처음에는 자기가 농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 하였다. 농촌에 파묻히는 그것 보다도 자기에게는 적당한 다른 무엇이 반드시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핼쑥한 살 밑에서 새파란 심줄이 줄기줄기 비치는 손을 들여다볼 때에 또는 아내의 고운 얼굴빛과 연약한 태도를 바라볼 때에, 그러한 느낌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리고 또 그 사상으로써 톨스토이의 참회 생활 가운데에 농부 노릇한 것과 또는 일본의 어떠한 장군이 농부를 모방하여 똥통을 매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의 직업을 유희시한 것이라 하여 위선이라 단정을 내린 자신으로, 이러한 모독을 다시 하게 된 것을 인생의 어떠한 보복이라 하였다.

그런데 자신의 이 사회에 대한 조그만 불평, 또는 여러 사람 가운데에 뜻을 얻지 못하였다는 실망 그것만으로 온 인생에 대한 자기의 인생관이 변하여, 이러한 농촌을 찾게 된 것은 냉정한 생각이 그를 에워쌀 때에는, 그러한 소극적인 행위를 그의 양심은 부인하였다. 그리고 또는 자신으로 ─ 어떠한 개념 생활에 열중하였던 그로서, 한편 호주머니에 폭탄을 넣고 다니는 테러리스트가 되지 못한 것은 큰 유감이었다. 그의 천연의 유나(柔懦)한 성격이 그것을 허락지 아니하였다. 그는 항상 혼돈한 사회에서 몹시 자극받을 때에는 어떠한 테러리스트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극단이라 할 만한 은둔적 생활을 하는 것이 자신에 배태(胚胎)한 생명력을 신장시킴이라 하였다.

명호는 이 두 가지를 두고 오랫동안 생각한 결과, 그는 T라는 남쪽 나라의 따뜻한 지방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의견에 대하여는 처도 찬성하였었다. 이와 같이 테냐 퇴(退)냐 하는 갈림길에서 퇴를 취한 그로서도 오히려 다른 사람의 직업 모독함이라 하는 데에서 그동안 오래괭이 잡기를 주저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 하는 일은 장래에 생활을 얻으려고 미리부터 준비하여 두는 노동의 연습이라 하면 어떠할까요.
그러면 우리의 지금 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일평생 사업으로 여기고 노력하는 사업의 신성을 더럽히는 일이 없게 되겠지요. 그리고 자기가 생활에 대한 어떠한 기능을 얻게 되는 셈이겠지요.”

어떠한 동기 혹은 인과에 의해 지금 나를 설명해야할 때가 있다.
그 원인이 의지와 능력이 부족해서일 경우 나도 모르게 핑계를 대고 만다.
내가 선택했지만 선택지가 하나뿐이었다면 강제와 무엇이 다를까.
그 강제되는 상황이 '나'라면 속이 터질 것이고, 세상이라면 억울하겠지만 어려움은 혼자만 오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적어도 나는 핑계를 댄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이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있을꺼야! 하고.


농촌에 파묻히는 그것 보다도 자기에게는 적당한 다른 무엇이 반드시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핼쑥한 살 밑에서 새파란 심줄이 줄기줄기 비치는 손을 들여다볼 때에 또는 아내의 고운 얼굴빛과 연약한 태도를 바라볼 때에, 그러한 느낌이 더욱 간절하였다.


원하지 않았던 선택에는 항상 뒤에 숨어있을것만 같은 다른 의미가 담긴다. 막연한 믿음일지도 모른다. 그 믿음으로 살아가지만, 때때로 믿음에 의심이 생긴다. 내 손에 있는 새파란 심줄이나, 아내의 연약함을 내가 보아버렸을 때처럼.


3

“나는 테러리스트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한 모험할 성격이 없는 것은 큰 유감이다. 명예와 공리만을 위하여 인간의 참생활에서 거리가 너무나 먼 단적 문제에만 구니(拘泥) 하는 이매망량(魑魅魍魎) 과는 언제까지든지 길을 같이할 수 없다. 나는 그러한 비열한 생활 수단을 취하여 사회적으로 성공자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야심을 속이지 않고 진실한 내면의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실패자가 됨을 도리어 기뻐한다.

나는 이 첫 시험을 다른 사람의 직업의 신성을 더럽혔다. 그러나 나는 내의 생을 개척하는 길은 다만 여기에 있음을 믿은 까닭에, 때의 늦음을 돌아보지 않고 살아가는 첫 연습을 하였다. 첫걸음을 배웠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 영원히 우리의 시달린 영(靈)을 잠재워줄 것으로 믿을 수는 없다. 나는 이 세상에 믿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 생활을 다시 핍박하는 그때가 오면, 나는 다시 이곳에 불을 놓고 밭을 헤뒤치고 논을 내버리고 표랑의 길을 떠나자! 그러할 때에 같이 갈 이 없으면, 나는 혼자 가자!

끝없는 곳으로. 그러다가 들 가운데에 거꾸러져 죽어도 좋고, 바다에 빠져도 좋다! 나는 그때를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그때를 도리어 반겨 맞이하자!

그때야말로 내외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줄 터이니까……. 그러나, 그러나 오늘의 흙냄새는 사향(麝香)보다도 더 향기로웠다. 나는 언제든지 그러한 흙냄새를 맡고 싶다……. 나는 비로소 흙의 세례를 받았다. 흙의 세례를 받았다.”


"나는 그러한 비열한 생활 수단을 취하여 사회적으로 성공자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야심을 속이지 않고 진실한 내면의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실패자가 됨을 도리어 기뻐한다."

희망과 믿음이 아닌 집착과 아쉬움으로 그 자리에 머무는 사람들이 있다.
자리는 좁아지지만, 다음 걸음을 도무지 내딛지 않고 눌러앉는 이들이 있다.
명호는 사회적 실패자가 됨을 기뻐했다. 적어도, 이 부부의 입장에서는 농촌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 더 삶에 진실된 행동이었기에.


"끝없는 곳으로. 그러다가 들 가운데에 거꾸러져 죽어도 좋고, 바다에 빠져도 좋다! 나는 그때를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그때를 도리어 반겨 맞이하자!

그때야말로 내외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줄 터이니까……. 그러나, 그러나 오늘의 흙냄새는 사향(麝香)보다도 더 향기로웠다. 나는 언제든지 그러한 흙냄새를 맡고 싶다……. 나는 비로소 흙의 세례를 받았다. 흙의 세례를 받았다.”

그 때를 기다린다. 그 때가 올 것이라는 소망이 생겼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 때에 대한 기대감도 생겼다.
오늘 내가 밟는 향기로운 흙이 그 때까지 나를 기다리게 할 수 있을까.
명호는 흙의 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구원의 순간을 맞이했다.


Fin

혜정은 신문을 한참 아무 말 없이 굽어보다가 남편을 불렀다.
이것 보세요 정숙이가 “ . 벌써 시집을 가서 훌륭한 가정의 주부가 될 모양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혜정은 신문을 자기 남편 앞으로 내놓았다. 명호는 아내가 가리키는 곳을 내려다보았다.
S신문의 가정란에 서양식으로 꿈인 서재를 배경으로 삼고 박은 정의 부처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기사에는 두 사람이 다 사회적으로 의의 있는 사업을 한다는 것이 조금 과장적으로 쓰였었다. 그리고 특별이 정숙은 여류 문학가라는 것을 기재하였다.
“벌써 정숙이가 사회에 명망 있는 여류 작가가 되었어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근본이 다른 것이에요!”
“왜요?”
“정숙이는 저보다 나이도 어리지마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사람의 참속은 모르고 지내왔어요. 졸업한 뒤에는 물론 서로 그뿐이었지요.”
명호는 이와 같은 처의 말에는 어떠한 의욕이 이것을 말하게 한 것을 알았다. 그의 마음에도 아직도 자기 명망이란 것을 무엇보다도 좀 더 날리어 보자는 본능이 대단 굳센 것을 짐작하였다. 이것을 상상할 때에 명호의 마음을 점령한 고적은 그 두 동갑 되는 힘으로 그를 괴롭게 하였다. 명호는 다시 눈을 감았다.
혜정은 가만히 앉아 신문을 보다가,
“우리가 이대로 여기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아무 알 사람이 없겠지요. 이 동리 사람 외에는, 그리고 하려고 하는 사람도 없겠지요? 그저 어떠한 늙은이와 늙은이가 살다가 죽었다고 하겠지요? 혹 자손이 생긴다면 그것들이 조금 섭섭한 생각을 하다가 얼마 지내면 그대로 잊어버리겠지요, 네?”
명호는 아무 말 없이 있었다.

그들은 정신이나 육체에 한가지로 피로를 느끼었다. 어둠의 장막이 고적과 싸우는 두 혼을 덮었다.


흙의 세례로 구원을 받았다 생각했건만, 새로운 상황은 다시 이 부부를 흔든다. 나와 같은 위치에 있던 누군가가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말이다.


"그들은 정신이나 육체에 한가지로 피로를 느끼었다. 어둠의 장막이 고적과 싸우는 두 혼을 덮었다."


구원은 받았으나, 그 구원을 끝까지 이뤄내기는 이토록 어렵다. 기쁨과 깨달음의 뒤에는 항상 실망과 아픔이 기다리고 있다. 진리를 알아도, 진리대로 살아가기는 참 어려운 것처럼.

부부는 무얼 깨달았을까, 마지막으로 보인 모습은 어둠이다. 어둠 안에 두 혼이 갖혀버렸다.

아마 다시 빛이 어둠을 가를 것이고, 어둠은 다시 찾아올 것이다.

기대하는 바는, 이 흔들리는 과정마저 그 때를 위한 준비였으면 한다.

그래서, 그 때를 보았으면 좋겠다. 이 날을 위한 준비였구나. 하며 슬며시 미소지을 수 있도록.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에 유시민씨가 2013년 시점에서 답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씨가 쓴 책중 세번째로 읽은 책이다.

유시민씨가 이 책을 쓴 동기는 간단하다. 정치계를 떠나고 비정규직 프리랜서(?)가 되며, 출판사로부터 책 의뢰를 받았다고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을 안고 책을 써달라는 의뢰였다고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누구나 할 수 있을법한 질문이지만, 시원하게 답할수 있는 이가 누구일까. 처음 이 책을 손에 잡은 것도 그 이유였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을까. 좋을까. 바람직할까. 삶이라는 것에 옳음이 있는 것일까. 어떤 가치에 무게를 두어야 하는가. 등등. 어떤때는 알겠다가도, 나이를 먹고 새로운 관계와 상황이 설정될때마다 다시 고민하게 되는 것이 바로 ‘삶’이다. 궁금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책의 제목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였다면 아마 이 책에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작가가 스스로에 대해 질문을 하고, 지금도 그를 더듬고 찾아가며 확정하고 흔들려가는 과정 가운데에 쓴 책이겠다 싶었다. 그래서 책을 펼쳤다.

도 삶에 대한 엄청난 진리를 담고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책을 보지는 않았다. 단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유시민이라는 사람이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하고 생각하는지를 읽었다. 그로 족했다. 맞다, 맞어 하며 동의로 고개를 끄덕이는 부분있었고, 동의되지 않아 갸우뚱 하는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참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책을 읽으면서 유시민씨는 참 폭이 넓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삶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배는 왜 고픈지, 결혼은 왜 하는지, 죽음이란 무엇인지. 이런 류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는 사람들은 많다. 문제는 이상한 개똥철학만 늘어놓다가 끝난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너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맞는거니까. 내 경험으로는 이랬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일관성이 없고, 묘하게 설득력은 있는데 인정은 안된다.

확증편향이라는 단어가 있다. 사람들은 여러 상황에 놓이지만, 그 경험들이 자신이 해석하고 싶은 하나의 확증을 설명하는 편향된 근거로 자리잡는다. 50살이 될때까지 100번정도 나쁜남자를 만나 차였다면, ‘남자는 다 쓰레기다.’라는 확증에 근거1, 근거2....근거100이 자리잡았을 것이다. 이해는 가지만 매우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랄까. 소위 인생선배들이 하는 말중 많은 경우가 그렇다. 나는 이랬고, 내 상황은 이랬어. 그러니까 너는 이렇게 해야해. 당장은 고개를 끄덕여도 나중에는 의문이 생긴다. 왜일까.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우리 부모님은 당신의 부모님과 같지 않으니까. 환경이 다르고 시대가 다르니까. 결국 조언받은대로 살아가려면 뭐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젠가 결국 그렇게 된다. 물론, 배울점만 심플하게 참고해서 나에게 적용하면 상관이 없다.

앞에서 유시민씨가 폭이 넓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유시민씨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이렇다. 왜냐하면 이렇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점에서는 다를 수 있다.’ 내가 어떠한지와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를 잘 설명한다. 일반적 시대적 상황과 자신의 특수 상황을 잘 설명한다. 설득하거나 우기지 않는다. 홍세화씨의 ‘생각의 좌표’에서 읽은 아이디어를 빌리면, 지금 나에게 형성되어있는 생각은 대체 어디로부터 근거되어 왔는가를 알고있는 것이다. 

유시민씨는 그것이 절대적 진리라고 우기지 않는다. 나다움과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생각의 근거가 단단히 서있다. 그러면서도, 고집하지 않으니 유연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 생각을 설명하는 근거에는 임상과 경험도 있지만, 생물학적 근거들도 적지 않게 보인다.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현재까지는 제3자 사이에서도 객관적으로 맞다라고 인정되는 사실들을 잘 조직하여 설명한다. 설명했다기 보다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런 점에서 폭이 참 넓어. 보인다.


책에서는 삶에 대해 생각하기 이전에, 나답게 산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 먼저 짚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삶의 시작과 마지막 가운데를 어떻게 가치있게 살아야할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가치없는 것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말한다. 마지막은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 삶의 마무리로 글을 마친다.


유시민씨는 사상가가 아니다.(사상이 없다거나 부족하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스스로를 작가라 했다.) 사상을 정리하여 책으로 낸 것도 아니다. 위에 말한것처럼 ‘어떻게 살 것인가’에 유시민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답했구나 라는 것으로 족할 듯하다. 십년 후에 다시 이 질문을 받으면 조금 예시나 답변들이 더 날카로운 방향을 잡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책 제목을 조금 더 유치하게 지어보면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에 유시민씨가 2013년 시점에서 답하다.’ 정도 되지 않을까. 물론 제목이 맘에 들지는 않는다.


나는 유시민씨가 아니고, 유시민씨가 가치있다고 한 모든것들이 내게 해당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삶이라는 질문에 담담히 답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 족했다. 이제 나도 그 질문에 답할 차례인듯 하다. 내 스스로에게.


목차는 아래와 같다.

프롤로그|나답게살기

제1장|어떻게 살 것인가

제2장|어떻게 죽을 것인가

제3장|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제4장|삶을 망치는 헛된 생각들

에필로그|현명하게 지구를 떠나는 방법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던 한 부분을 적음으로 글을 마친다.


그대는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는가? 그대는 그 신념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아니라고 말하면 조금 비겁한 것 같고 그렇다고 하자니 감당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질문 형식을 바꾸어 보자. 신념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런 삶이 훌륭하다면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가?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신념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이 훌륭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그것은 훌륭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또 훌륭한 신념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그 신념을 위해 살고 죽어야 하는 것 역시 아니다. 신념을 위해 살고 죽는 것도 훌륭한 인생일 수 있지만, 그것과 다른 인생 역시 얼마든지 훌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 유시민

매일 아침 써봤니?
다음 시즌이 준비된 작가의 블로그 예찬론


취향이지만, 어떤 한 분야에 관련한 책은 무조건 내 마음에 저장해놓는다. 그 분야는 바로 글쓰기이다. 잘 하지는 못하지만 잘 하고 싶다. 만약, 평생동안 하나의 일만을 정해놓고 하라면 바로 ‘글쓰기’라고 말하고 싶다. 일로 해본적도 없으면서 참 웃기다.

글쓰기. 세 글자 짜리 한 단어이지만 참 어렵다. 예전에는, 무척 최근을 포함한 예전에는 무슨말인지도 모르면서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문장들을 영감가운데에 뽑아내어 세상에 탄생시키는 것이 글쓰기인줄 알았다. 물론, 그도 글쓰기의 한 부분이고 꼭 필요한 부분이다. 문제는 천재가 아닌이상, 특히 나같은 둔재는 영감과 만나기까지 길고 긴 시간을 가야한다는 것이다. 요즘 그것을 느낀다.


언제나처럼 서론이 길었지만, 김민식씨의 ‘매일 아침 써봤니?’를 읽게 된 계기는 바로 글쓰기에 관련한 책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점점 글쓰기책라는 책들이 다양해지는데, 글쓰기가 중요하기도 하겠지만 많은 이들이 열광하기도 한다는 의미다. 책을 고르는데에는 제목도 한 몫을 하였다. '매일 아침 써봤니?'라는 말에는 하루에 한번, 그것도 아침에 꾸준히 글쓰기를 해봤냐는 물음이 우선 담겨있고 그 결과로 엄청난 변화 혹은 사건이 있었다 라는 뜻이 있을 터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매력적이었다. 글쓰기를 매일 하고 싶었지만, 못하고 있었으니...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크게 두가지로 보인다.

첫째는 글쓰기가 좋다. 둘째는 블로그가 좋다.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노하우가 담겨있지는 않다. 그것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작가는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블로그와 글쓰기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과정을 서술한다.


작가는 서른 이전에 여러 직업을 가졌다고 한다. 통역사, 세일즈맨 등...그러다 서른에 엠비씨 피디가 되었다. 대표작품으로는 논스톱이 있다. 그런데, 몇년전 엠비씨에서 언론탄압이 있었을 때에 한직으로 좌천을 당하게 된다. 이 순간을 '세상이 내게 일을 주지 않을 때'라고 표현한다. 그때부터 작가는 매일 아침 시간을 내서 글을 쓰고, 그 콘텐츠를 블로그에 올리게 된다. 그러면서 돈도 벌고, 즐거움과 의미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책의 내용은 위가 전부이다.


작가는 이론가는 아니고, 실천가에 가깝다. 저런 놀라운 방법이 있었다니... 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렇게 해야하는 것이구나 하고 알고있지만 하지 못하거나 안하던 것들을 상기하게 된다. 결심도 되고 설레기도 하고 나를 돌아보게도 하는 시간이었다. 
단지, 내가 작가처럼 하더라도 작가와 같이 되기는 어려움이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현직 피디에 이미 다양한 컨텐츠를 만들던 사람, 이미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는 작가가 쓴 글이 가지는 영향력은 다른 일반과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볍게 읽고 마음에 다짐도 하게 하는 좋은 책인 것 같다.


목차는 아래와 같다.

프롤로그|매일 아침, 나를 응원한다.

1장|재미없는 일을 하며 살기엔 인생이 너무 길다

-노는 인간의 시대

-처음엔 무조건 재미

-돈버는 김민식 vs 잘 노는 김민식

-일하는 나와 노는 나가 자꾸 만나야 한다

-꾸준한 실패와 우연한 성공, 그리고 논다는 것

-직업이 아닌 생업을 찾자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2장|쓰기에서 시작된 능동태 라이프

-능동적 인생의 시작, 글쓰기

-창조주보다는 창작자

-누구나 창작짜가 될 수 있다

-쓰는 것도 보는 것도 다 공짜

-세상에 나를 알려라

-인터넷의 바다를 활보할 나의 분신

+유투브 단편 영화 제작 매뉴얼


3장| 쓰면 쓸수록 득이 된다.

-블로그의 수지를 따져보다

-매일같이 글을 쓴 대가

-연예인 부럽지 않다

-수억의 예금 가치가 있는 글쓰기 기술

-매일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글쓰기만큼 남는 장사도 없다

-꿈의, 꿈에 의한, 꿈을 위한 블로그

+새해 결심의 세 가지 조건


4장|매일같이 쓰는 힘

-재능을 이기는 끈기

-꼼수는 통하지 않는다

-즐거워야 매일 쓸수 잇다

-하나를 더하려면 하나를 빼야 한다

-일단 버텨야 한다

-조금 부족할지라도 끈질기게!

-단골가게 같은 공간으로

+-글쓰기 공부, 독서리뷰1


5장|매일의 기록이 쌓여 비범한 삶이 된다.

-세상은 넓고 독자는 많다

-절절히 사랑하는 대상을 찾아라

-뭐든 우선 써봐야 한다

-답은 지금, 여기에!

-쓰고 싶은 걸 마음껏 쓴다

-휴먼다큐의 주인공처럼

-유희로서의 글쓰기

+글쓰기 공부, 독서 리뷰2


6장|쓰는 인생이 남는 인생

-20대는 영어 덕, 40대는 블로그 덕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

-나에게 쓰는 팬레터

-오늘의 일기가 위로가 되기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눌수록 득이 되는 글 나눔

-피드백과 리액션이 있는 인생

+블로그,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에필로그|꾸준한 오늘, 무한한 내일


마지막으로 인상깊었던 구절을 남기고 마무리를 짓는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보여주세요. 그리고 곳곳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정성을 다해 포스팅하는 겁니다. 앞으로 내가 하게 될 일은 과거에 해온 것과 지금 하고 있는 일, 여기에 그리고 있는 미래가 만나는 지점에서 찾게 됩니다. 누군가의 블로그를 보다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여요. 나의 블로그 또한 누군가에게 내 인생을 보여주는 창입니다. 나에게 기회를 줄 사람이 어느 먼 곳에서 나의 블로그를 타고 찾아올 수 있으니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마시기를.

가끔 알라딘 중고서점에 간다.

사고싶은 책이 있을 때도 가지만, 사람들이 판매한 책 제목들을 보러도 간다.

책 제목들을 훑던 중, 한 젊은 친구 둘의 대화를 들었다. 페이퍼백 재질로 된 외국서적을 들고 하는 말이었다.
“우리나라 책도 이렇게 가볍게 만들면 좋겠다. 우리나라 책은 무거워서 자기 전에 읽기가 힘들다.”
자기 전에 항상 책을 읽을만큼 독서에 열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자책도 종이책도 좋아한다. 질감과 경험은 종이책이 좋지만, 많은 곳을 돌아다니는 데에는 무게 제약이 있으니 전자책을 선호한다. 전자책을 우선으로 하되, 구할수 없는 것은 종이책으로 산다. 전자책을 선호하는 필수요인중 하나는 값이 더 저렴해서이다.

이야기가 샜지만, 결국 사용자 경험 문제이다. 편리한가 아니한가. 그런데, 사용자 경험이 어쨋고 저쨋고를 떠나서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읽는 것’이다. 무게와 형태를 떠나, 읽을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결국 읽는 것이 중요하다.

교육에서 가르침이 아닌 배움에 무게를 두어야 하는 것과 같다. 책의 본질은 무엇보다 읽는 것 자체이다.

'생각_Think'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1) 2018.02.04
밤비행기; 밤대륙의 매력  (3) 2018.01.23
놓친 하루 대신  (0) 2018.01.13
좋아하지 않는 대화 유형 : 오만과 편견  (0) 2018.01.11
망원동 아침풍경(1)-감기  (1) 2018.01.0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