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신문을 보는데 오타를 발견했다. ‘Beauty and the dogs’라는 영화에 대해 소개하고 감독을 인터뷰 한 글이었다.
그런데, 글중 기자분의 실수로 Dogs 대신 beast를 써서 미녀와 개들이 아닌 야수가 되어 버렸다.
오타를 꼬집거나 나쁜 의도가 있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업무적으로는 실수일 수 있지만, 그럴 수 있다.

누군가가 이해되는 실수를 하면, 반감보다는 오히려 공감이 간다. 나도 그럴 수 있으니까,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미녀와 야수를 재밌게 보았을 수도 있겠지. 감독이 의도한 바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dog 대신 beast를 썼겠지. 이런 가정이나 조건 없이 단순한 실수였다 하더라도 공감이 된다. 오히려 미소가 난다. 백치미 혹은 약간 모자란 것이 사람의 매력이 되는 것처럼.

이 실수가 즐거운 이유는 반가운 이유는 공감이 더 가는 이유는. 어쩌면 내가 이해받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죄를 지은 것은 아닌데. 변명하기가 더 부끄럽도록 다름을 틀림으로 인정할 수는 없는 나인데 말이다.

같은 날짜, 같은 신문에 실린 글 한토막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특정 현상을 두고 의견을 갖기 쉽다. 그걸 답이라고 믿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쉽다. 그럴수록 자기 확신도 강해진다. 그런다고 그게 답이냐는 또 다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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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google.co.kr/amp/mnews.joins.com/amparticle/22407377

#미투 #Me too 혹은 #With you 가 화제이다.
화제를 넘어 화재가 날정도로 여기저기에서 빵빵 터진다. 아는 이름들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참 철렁철렁한다.

새학기가 시작된 3월 2일, 중앙일보 ‘최민우의 블랙코드’ 면에 미투 관련한 글이 실렸다.‘성이 아니라 권력이다.’라는 제목이다. 41세 전직 무용수가 본인도 미투를 하고 싶다는데, 문제는 대상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 교수이라는 것이다. 술자리, 티켓팔이 등에 여성인 자신을 내보내고 권유했다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술자리에 부르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공연 티켓을 좀 팔아보라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단지, 그 수단으로 성을 이용하게끔 유도했다는 것, 다시 말해 이용해먹은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 주체와 대상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잘못이다. 문제가 가지는 본질은 남성이 여성을 억압했다가 아니라, 권력을 이용해 타인의 성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문제의 본질은 성이 아니라 권력이다.

내가 방점을 주고싶은 부분이 있다. ‘성이 아니라’ 바로 이거다.
나는 남성이다. 그리고 여성이 절대적으로 많은 곳에서 일한다. 이곳에서 나는 성소수자이다. 부서가 있고 그에 맞는 업무가 있지만, 가장 많은 일은 운전이나 짐을 옮기는 일이다. 쉽게 말하면, ‘여성이 하기에 어렵거나 위험한 일들’이다. 물론, 어렵거나 위험하지 않아도 운전을 하고 짐을 옮기는 일들은 남성에게 몰린다. 괜찮다. 이해할 수 있다. 그정도 일은 아름다운 마음으로 기쁘게 할 수 있다. 물론 몸은 고되다.
문제는 남성으로서 배려(?)받을 때이다. 혹시나 내가 성적 문제를 저지를까봐 리더들로부터 어떠한 취급이나 조치를 받을 때가 있다. 물론 직접적인 이유를 말하진 않지만, 알 수 있다. 내가 그렇게 느낀다. 어느정도로 느끼느냐 하면,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으로 받는다는 정도이다. 그것이 ‘배려’라고 한다. 나한테는 배려는 아닌것 같다. 수컷 애완견을 거세시키는 이유가 애완견에 대한 배려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 얘기를 들으니 어떠한가? 내 표현이 과한가? 지나치게 예민한가? 그럴 수 있다. 입장은 각자가 다르고, 누구의 생각이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나는 좀 힘들다. 미쳐 죽어버리겠어 정도는 아니지만, 정말 쉽지 않다.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쩔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를 위한 배려라는데, 내가 예민한 것이고 그렇게까지 생각하는것은 아니라는데 어떻게 하는가. 하지만, 적어도 당사자인 나는 그렇게 느낀다.
나는 피해자이며, 내 주변이 무조건 잘못했고 고쳐야한다는 것이 아니다. 나를 향한 진정어린 배려일 수 있기에, 아직 어리고 경험없는 내가 잘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정말 잠재적 성범죄자 일수도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내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를 통해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맞으니까 아프다. 그뿐이다.

내 하소연을 늘어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힘든데 배려라고 하고, 원래 그런 것이라 하고, 참으라고 하고, 당신이 예민한 것이라 하고, 내가 틀린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참고 버티다가 지금까지 갔을 것이다. 전부는 아닐지언정 조금은 공감할 수 있다.

아마도 같은 자리에서, 응원한다. 이 말을 하고 싶었다.


하관_천수호


아버지께 업혀왔는데

내려보니 안개였어요


아버지 왜 그렇게 쉽게 풀어지세요

벼랑을 감추시면

저는 어디로 떨어집니까


중앙일보 사설란은 ‘시가 있는 아침’이라는 코너로 시작한다. 먹먹하다. 시를 읽고 떠오른 단어이자 감상이다. ‘먹먹하다’라는 단어를 조금 더 알게되었다.


‘아버지께 업혀왔는데

내려보니 안개였어요’

내가 업혀있었다는 것을, 나를 업어준 이가 사라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갑자기 알지는 못했다. 안개처럼 서서히, 기분나쁘게 조금씩 알게된다. 안개 속에 떠있던 발이 땅에 슬쩍 닿을 때쯤에서야, 나는 온전히 내 발로 서게 된다. 내 몸이 이리더 무거웠던가


‘아버지 왜 그렇게 쉽게 풀어지세요

벼랑을 감추시면

저는 어디로 떨어집니까’


왜 그리 쉽게 풀어지냐는 말은 원망보다는 울먹임이다. 억울함이다.

나를 때렸든, 사랑했든, 어떤 모습이었든, 아버지가 있었다. 나는 떨어졌고, 떨어지고 있으며, 떨어질 수도 있었다. 아버지는 벼랑이었다. 가까이 가고싶지도 않고, 내려다 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는 떨어질 벼랑도 없다. 살아있을 때는 몰랐다.

노력하지 않아도 아버지가 있었다. 이제 무슨 수를 써도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0년이 넘었다. 정확히는 11년이다. 이제 갓 삼십대의 막내에서 탈출한 나는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신 편이다.

그때문일까, 나는 죽음에 대해 담담한 편이다. 무감각하지는 않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어쩌겠는가. 남은 이들은 삶을 이어가야 한다. 나는 남겨진 자 이지만, 남은 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오늘도 문 앞에 놓인 신문을 편다.

중앙일보_20170920_노트북을 열며_어공과 늘공

http://news.joins.com/article/21952131


'어공'은 '어쩌다 공무원', '늘공'은 '늘상 공무원'이라고 한다.

보통 행정력을 갖춘 사람은 그 외 전문성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필요해 의해 전문가를 영입하면 그는 '어공'이 되고 행정력을 가진 자는 '늘공'으로 그 자리에 항상 있다.

일은 전문가가 하지만, 보통 결정권자는 비전문가이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간극이 있다.

또래 친구들이나 크고 작은 조직 중에서도 목표를 중시하는 어공이 있고 절차를 중시하는 늘공이 있다.

맞네 틀리네 하는 논쟁은 대부분 이 범주 내에 있다.

단기적 목표는 이룰 수 있지만, 궁극적 목적과는 반대로 가는 경우. 궁극적 목적을 추구하다 보니, 결국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


나는 무어가 맞다 할 수 없다. 둘다 필요하다. 합의점을 찾는 과정에서 정답은 나오지 않을지라도, 답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을 잘 끌고 가는 것이 앞으로 시대에 필요한 리더상 중 하나이지 않을까.

http://news.joins.com/article/21898942


2017년 9월 2일 토요일 중앙일보 신문 15면에 청와대 밥상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대통령 별로, 자리가 갖는 의미 별로 청와대 밥상에 대해 다뤘다.


그런데 맨 아래에 이번 청와대 밥상을 책임진 임지호 셰프의 간단한 Q&A가 내 마음에 왔다.



Q. 제일 자신 있는 요리는?


A. "그런 건 없다. 음식은 계속 변해 간다."



이 Q&A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것을 할 수 있니?라는 질문을 누군가 하면.. 나는 보통 '할 수 있어. 혹은, 이것은 할 수 없어. 왜냐하면 ㅇㅇ때문이야'라고 한다.

그런데, 질문을 한 사람은 위와 같은 답을 원하지 않는다. 사실 답이 아니기도 하다.

'현 상태에서는 정확히 니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어. 하지만, A와 B를 준비해 준다면 언제까지 요정도는 완성시킬 수 있어'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마도 질문자가 원하는 답일 것이다.

내가 하는 대답은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할수밖에 없는 말이다. 예측하고 실행해낼 능력이 사실 없어서이다.


어느 분야에서나 시간이 지나면 노하우가 쌓이고 전문가가 된다. 되기 싫어도 한 분야에 있으면 그렇게 되는것 같다. 유명세와는 별개로 말이다.

위 질문에서는 제일 자신 있는 요리를 물었다. 질문은 말 그대로이다.

답은 '제일 자신 있는 요리같은 것은 없다.' 라고 말한다. 그 이유로는 음식이 계속 변해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맛있는 음식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같은 음식이라도, 사람에 따라 장소에 따라 때에 따라 다른 맛을 말한다.

결국, 때와 상황과 사람을 다 고려하여 음식을 만들어 냈을 때 '최고'는 아니어도 '최선'의 맛이 된다.

음식은 계속 변해간다 라는 말은 요리사가 고려하고 배려해야 할 조건도 변한다는 말이다.

임지호 셰프의 답은, 나는 항상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다. 라는 매우 겸손한 답변으로 다가왔다.


음식뿐이 아니다. 삶에서의 전문영역도 계속 변해간다.

언젠가 나도 위와 같은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당당하게, 하지만 겸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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